“나는 백성희 선생에게 한눈에 반했다. 선생은 당대의 비슷한 연배에서 따라갈 수 없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고, 동서양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배우였다.”(연출가 임영웅) “이성적이고 품위 있는 배우였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연기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그를 닮고 싶었다.”(배우 김금지) “그는 평범한 인물을 맡을 때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작은 역도 크게 만들었다. 그래서 작은 역을 경시했던 배우들에게 얼마나 아까운 역이었는가를 상기시켰다.”(연극학자 유민영)

지난 22일 저녁, 서울 서계동의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 150여명의 연극인들이 한데 모였다. 80대의 원로들부터 20대의 신예들까지, ‘한국연극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백성희 선생(90)의 삶을 함께 돌아보는 자리였다. 올해로 연극인생 73년, 국립극단 배우로만 65년을 보낸 원로배우는 지금 노환 중이다. 서울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얼마 전부터는 시력과 청력이 급격히 떨어져 제대로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국립극단이 연극인 심포지엄 ‘국립극단 65년과 백성희’를 해가 가기 전에 마련한 이유다. 아울러 이 행사는 최근 간행된 회고록 <백성희의 삶과 연극-연극의 정석>의 출간기념회를 겸한 자리였다.
2년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자면, 선생은 1943년 현대극장의 <봉선화>로 데뷔했다. 물론 이에 대해선 연극학계의 이견도 있다. “1년 앞선 1942년 빅터가극단의 <심청>을 데뷔작으로 봐야 한다”(연극학자 김남석)는 의견이다. 하지만 선생은 “멋도 모르던 고등학교(동덕고녀) 시절에 출연한 것이라 공식 데뷔작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니, 그로부터 셈하더라도 73년을 연극배우로 살았다. 덕분에 한국 연극계에서 그와의 인연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날 심포지엄은 바로 그 기억을 꺼내놓는 자리였다. 병상의 선생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들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들 그렇게 ‘치열했던 배우, 따뜻하고 정갈했던 인간’을 기억했다.
사회를 맡은 배우 손숙은 “73년을 배우로 살아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운을 뗐다. 가장 최근 무대는 2013년 10~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바냐 아저씨>(이성렬 연출)로 기록돼 있지만,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선생은 무대에 설 몸과 마음을 지닌 국립극단의 ‘현역’이었다. 배우 손숙은 “세계를 통틀어도 이렇게 오래 무대를 지킨 배우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제가 젊었을 때, 지방공연을 가면 늘 선생님과 한방을 썼어요. 여배우들이 죄다 우리 방으로 몰려와 ‘섯다’를 치곤 했죠. 거의 밤을 새우며 놀았죠. 그런데도 선생님은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맨손 체조를 하셨습니다. 그 꼿꼿하고 당당한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1972년 국립극단에 입단했던 배우 박상규(상명대 교수)는 “인간적으로는 어머니 같았고, 배우로서는 멘토였다”고 회고했다. “1979년 <무녀도>에 함께 출연했습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배우이셨습니다. 낮에는 극단 연습실에서 연습하시고, 밤에는 창과 무당춤을 배우러 다니셨죠. 그야말로 프로였습니다.”
배우 김소희는 2004년 ‘백성희 연극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자전극 <길>에 함께 출연했던 인연을 떠올렸다. “딱 한번 같이 공연했지만, 무대의 두려움을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때 팔순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보다 더 꼿꼿한 척추, 부드러운 혀를 지니고 계셨어요. 끊임없이 훈련하지 않는 배우는 무대에 서면 안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셨지요. ”
배우 박정자는 자리에 나오지 못한 선생의 말을 대신 낭독했다. <백성희의 삶과 연극>(김남석 엮음)에도 수록돼 있는 그 육성의 한 대목은 이렇다.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젊은 남녀의 일몰이 같지 않다는 사실에,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연극에 대한 소회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나의 삶을 구성했다면, 나의 삶은 어쩌면 대단히 가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연극이 있었고, 그 연극은 내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게 만들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새로운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참으로 오랜 여행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연극계 ‘대모’ 백성희…천상의 무대로


ㆍ노환으로 별세…향년 91세
한국 연극의 살아 있는 역사, 연극계의 대모로 불리던 원로배우 백성희 선생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이 65년간 몸담았던 국립극단은 9일 “원로단원 백성희 선생이 입원 중이던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8일 밤 11시18분쯤 별세했다”고 부고를 전했다.
‘연극인생 73년’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한국 연극사에 새긴 고인은 1925년 서울 영락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이경현)이 목재상을 운영하던 중산층 가정의 9남매 중 장녀였다. 본명은 이어순이(李於順伊). 소녀 시절에 일본 잡지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을 구독하며 배우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했고, 동덕고녀 재학 중 부친의 불호령을 무릅쓴 채 ‘빅타무용연구소’에 들어가 춤을 배웠다. 이어서 17세였던 1942년에 ‘빅타가극단’이 공연한 가극 <심청>의 뺑덕어멈 역으로 처음 무대를 밟았다.
‘백성희’는 당시 연출가였던 서항석이 붙여준 예명이다. 그렇지만 고인은 “멋도 모르던 고등학교 시절에 출연한 것이라 공식 데뷔로 보긴 어렵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으니, 그에 따라 공식 데뷔작은 1943년 현대극장이 부민관에서 공연했던 <봉선화>로 기록된다. 구경을 하러 갔다가 대타로 섰던 무대에서 호평을 들었고, 덕분에 재공연부터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그때부터 73년을 배우로 살았다.
데뷔 이듬해에 니혼대학 창작부에서 문학을 공부한 나조화(나도향의 동생)와 결혼했다. 현대극장, 낙랑극회, 신협 등에서 배우로 활약했고 1950년 국립극단에 입단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립극단 단원으로 살았다. 1972년 국립극단이 처음 시행한 직선제를 통해 단장으로 취임, 1974년까지 재임했으며 1991~1993년에도 단장을 지냈다. 1998년에 국립극단 원로단원으로 선임됐고 2002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2011년에는 국립극단에 ‘백성희장민호극장’이 개관, 고인과 장민호 선생(1927~2012)은 ‘한국 연극의 영원한 파트너’로 역사에 남았다. 두 배우는 1950년 <원술랑>을 시작으로 무대에서 60여년을 함께한 ‘연극 동지’였다.
고인은 73년의 연극인생을 살면서 400여편(재공연 및 지방공연 포함)에 출연했다. 정확한 집계가 어려울 만큼 많다. 생전의 고인은 2013년 2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국 작품으로는 <베니스의 상인>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전쟁과 평화>, 국내 창작으로는 김동리의 <무녀도>, 노경식의 <달집>, 차범석의 <산불> 등을 “특히 기억에 남는 연극”으로 꼽았다.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고인은 배역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하는 배우, 광적이라고 할 만큼 치열하게 연습하는 배우’라는 칭찬 외에 “작은 역도 크게 만들어서, 작은 역을 경시했던 배우들에게 얼마나 아까운 역이었는가를 상기시키는 배우”(연극학자 유민영)라는 영예스러운 호평이 뒤따른다.
국립극단 김윤철 예술감독은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건강에 큰 이상이 없으셨다”면서 “올해 공연되는 <3월의 눈>에 출연하고 싶어하시며 끝까지 연기 집념을 보여주셨다”고 전했다. 타계 2주 전 고인을 마지막으로 문병한 배우 손숙은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 드리니까 미소를 짓고 사탕도 오물오물 드셨다. 착한 아기 같았다.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고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마지막 작품은 <3월의 눈>(2013)과 <바냐아저씨>(2013)로 기록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 장례는 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치러지며 12일 오전 10시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이어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노제가 진행된다. 장지는 분당메모리얼파크.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