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은 지금도 예술가들의 거리로 유명합니다. 이 고갯길에 예술가들이 몰려든 것은 19세기 말부터였지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손꼽혔던 오스트리아 빈의 영광이 마침내 저물면서 프랑스 파리가 새로운 예술가들의 도시로 떠오릅니다. 19세기 말의 프랑스는 식민지를 급속히 늘리면서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에너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던 말라르메와 드뷔시 같은 이들이 당시 파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예술가들이었고, 화가로는 고흐와 르누아르, 로트렉 등이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아직 10대였던 피카소가 부푼 꿈을 안고 찾아와 머물렀던 곳도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과거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지요. 또 관습적인 예술 표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들끓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자유로웠고 낭만적인 연애에 열정을 쏟아 붓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 몽마르트르 언덕에 ‘검은 고양이’(Le Chat Noir)라는 카바레가 있었지요. 에드거 앨런 포의 공포스러운 소설 ‘검은 고양이’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 ‘카페’라는 용어로 ‘검은 고양이’를 소개하는 글들이 많은데 정확히 표기하자면 ‘카바레’입니다. ‘검은 고양이’를 홍보하는 당시의 포스터를 찾아봤더니 ‘Cabaret du Chat Noir’라고 적혀 있습니다. 요즘에는 ‘카바레’를 중년 이상 남녀들의 사교장으로,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의 무도회장으로 대개 생각하지요. 하지만 당시의 카바레는 요즘과 좀 달랐습니다. 물론 술을 파는 곳이다 보니 진한 농담을 나누거나 맘에 드는 이성을 유혹하기도 했겠습니다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그곳은 무엇보다 젊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아지트였습니다. 시를 낭송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샹송을 노래했습니다. 때로는 정치적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연극이나 풍자적 만담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검은 고양이’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공연은 인형과 불빛을 이용한 ‘그림자 연극’이었다고 하지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카바레 얘기 조금 더 하겠습니다. 이렇듯이 프랑스 파리에서 19세기 말에 꽃피었던 카바레 문화는 20세기 초반에 접어들어 독일에서 한층 성행합니다. 독일어로는 카바레트(Kabarett)라고 불렀는데, 간판으로 내걸렸던 이름들도 아주 특이합니다. 1900년대 초반에 베를린에는 ‘위버브레틀’(궁극의 캬바레)이 있었고 뮌헨에는 ‘디 엘프 샤르프리히터’(11인의 처형인)라는 카바레트가 있었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건설되면서 독일에서는 카바레트가 크게 융성하지요. 정치적 검열이 완화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표현의 자유가 분출했던 까닭입니다. 기존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많은 예술가들이 카바레트 무대에 자신들의 작품을 올리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까지 유명한 두 명의 인물이 바로 극작가 겸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공연했던 연극으로 <서푼짜리 오페라>가 유명하지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자본주의를 야유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트 바일과 더불어 이른바 ‘좌파 음악가’로 불리는 한스 아이슬러도 브레히트와의 공동 작업으로 카바레트에서 공연을 올렸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융성했던 카바레트는 1933년에 철퇴를 맞지요. 주지하다시피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곳은 불법적 공간이 됩니다. 나치는 카바레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음악들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해 연주와 청취를 아예 금지해 버리지요.
자, 다시 19세기 말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887년이 거의 저물어가던 무렵, 어느 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 새로운 피아니스트가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군대에서 막 제대한 오늘의 주인공, 에릭 사티였습니다. 1866년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의 바닷가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기에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지요.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진한 고독감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외로운 10대 시절을 보낸 사티는 1878년에 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이주하지만 새어머니와 불화와 갈등의 나날을 보내지요. 얼마 뒤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지만 ‘게으르고 집중력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중도 탈락하고 맙니다. 1886년에 군에 입대해서도 여전히 ‘부적격자’였던 모양입니다. 기관지염, 정서 불안 등을 이유로 조기 제대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티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내향적인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게 군대에서마저 방출된 사티가 찾아간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었고, 마침내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는 이 카바레에서 주로 ‘그림자 연극’의 피아노 반주를 맡습니다. 그렇게 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사티는 역시 몽마르트르에 있었던 ‘못의 주막’(Auberge du Clou)으로 자리를 옮길 때(1891년)까지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오늘날 많이 이들이 사랑하는 사티의 초기 피아노 작품들이 바로 몽마르트르 시절에 작곡됩니다. 예컨대 <3개의 사라방드>(1887), <3개의 짐노페디>(1888), <3개의 그노시엔느>(1890, 사티 사망 후 3곡이 추가돼 지금은 6곡) 같은 곡들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3개의 짐노페디>는 작곡가로서의 사티를 세상에 알린 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훗날(1911년) 드뷔시가 세 곡 중의 두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자신의 지휘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3개의 짐노페디>가 보여주는 특징을 요약하자면 정서적 고독감, 단순한 선율, 종교적 신비로움 같은 표현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것은 다른 두 곡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특징들이 제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서 사티 음악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티의 고향은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옹플뢰르입니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은 사티가 특히 좋아했던 곳이 성당이었다고 하지요. 어린 사티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10살 무렵에 옹플뢰르의 성 네오나르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던 비노(Vinot)에게서 음악을 배웁니다. 말하자면 사티에게 첫번째 음악선생이었던 것이지요. 사티는 그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배웠고 그레고리안 성가 등 중세 음악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됩니다. 그의 초기 피아노곡들에서 나타나는 흐릿한 존재감,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듯한 리듬,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시키는 신비한 선율 등은 바로 그런 경험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사티의 초기 음악들은 ‘중세적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고리타분한 종교주의가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날마다 대중적 음악을 연주했던 그는 명상적이면서도 듣는 이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곡들을 선호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주된 흐름이었던 후기 낭만주의, 또 프랑스의 드뷔시가 개척한 인상주의 음악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사티는 감정의 과잉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상주의 음악가들이 애호했던 관념적 소재, 모호한 표현법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티의 음악은 차갑고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듣는 이에게는 감각적으로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는 제목처럼 모두 3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짐노페디(Gymnopedies)는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소년들’이라는 뜻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축제에서 소년들이 벌거벗고 추는 춤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제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벌거벗었다’라는 표현은 사티의 음악에 매우 적절한 제목이기도 하지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린, 말하자면 불필요한 장식이나 감정의 과다 노출이 없는 단순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티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는 이 곡을 듣고 “벌거벗은 음악”이라고 평하기도 했지요. 사티의 음악이 대개 그렇듯이 연주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가령 이 곡을 가장 느리게 연주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 라인베르트 데 레우(1938~)은 15분 52초에 걸쳐 연주합니다. 하지만 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10분 안팎으로 연주하지요. 1곡에는 ‘느리고 고통스럽게’(Lent et Douloureux), 2곡에는 ‘느리고 슬프게’(Lent et Triste), 3곡에는 ‘느리고 엄숙하게’(Lent et Grave)라는 지시가 달려 있습니다.
글/문학수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1966년/Warner Classics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도 치콜리니(1925~)는 1960년대와 1980년대, 두차례에 걸쳐 사티의 피아노곡을 레코딩했다. 첫번째는 아날로그, 두번째는 디지털 녹음이다. 연주 스타일은 밝고 청명한 편이다. 사티 음악의 명상성보다는 풍자성에 좀 더 방점을 찍는 연주로 들린다. 아울러 무뚝뚝할 수도 있는 사티의 음악에 생동감 있는 표정을 부여한 연주라고도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한 라인베르트 드 레우의 연주로 이 곡에 익숙한 이들이 들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드 레우의 연주가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녹음은 5장의 CD 전집으로, 아날로그 녹음은 CD 2장짜리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대중적인 곡들을 주로 수록한 후자를 권한다.
▶파스칼 로제(Pascal Roge)/1983년/Decca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음반이다. 파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로제(1951~)는 드뷔시와 라벨을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녹음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사티의 ‘짐노페디’를 연주한 음반도 호평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치콜리니와 달리 약간 드라이한, 좀 더 절제돼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메마른 연주는 아니다. 섬세한 뉘앙스가 살아 있는 시정 넘치는 연주라고 평할 만하다. 음반 표지에 후안 미로의 그림 ‘어릿광대의 사육제’가 인쇄돼 있다. <3개의 짐노페디>를 첫 곡으로 사티의 주요 곡들을 선곡했다. 사티의 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샹송풍의 ‘Je te veux’는 두번째 곡으로 담겼다. 사티의 음반을 처음 구입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0) | 2015.02.02 |
---|---|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 (6 Gnossiennes) (0) | 2015.01.19 |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0) | 2014.12.22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 2014.12.08 |
말러, 교향곡 5번 (0) | 2014.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