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졸라, <아디오스 노니노> <오블리비온>
마지막 곡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조지 거쉬인의 <랩소디 인 블루>를 소개한 적이 있어서, 비슷한 시기의 미국 음악가인 아론 코플랜드(1900~1990)로 마침표를 찍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데 곰곰 생각하니, 그의 음악은 한국에서 그닥 연주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음반을 찾아 듣는 이들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 글의 취지에 맞지 않는 듯해서,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습니다. 좀더 고민하다가 선택한 음악가가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입니다. 앞서 만났던 조지 거쉬인이 재즈에서 출발해 클래식으로 영역을 확장한, 다시 말해 재즈와 클래식을 결합해낸 음악가였다면,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의 서민들이 즐기던 탱고를 댄스홀에서 콘서트홀로 옮겨놓은 음악가였습니다. 한정된 지역의 민속음악을 세계적 보편성이라는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지요. 춤추는 탱고가 아니라 귀로 듣는 탱고, 이른바 ‘누에보 땅고’(Nuevo Tango, 새로운 탱고)는 그의 머리와 손끝에서 태어났습니다. 생전의 피아졸라는 “내게 탱고는 언제나 발보다 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게다가 그의 음악들은 한국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김연아 선수가 마지막 경기를 치르면서 사용했던 음악이 바로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였지요. ‘잘가요 할아버지’로 번역되는 이 곡은 ‘김연아의 굳바이’로 해석되면서 한때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인기는 별로 오래가지 않지만 그래도 피아졸라의 음악을 대중이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던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곡은 생전의 피아졸라가 가장 사랑했던 곡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음악입니다. 피아졸라의 음악들은 <아디오스 노니노>가 그렇듯이 연주 시간이 비교적 짧은데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대중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지요. 듣는 순간에 바로 귀에 꽂히는 음악입니다. 아울러 탱고와 클래식의 결합을 시도했던 그의 유니크한 음악들은 좀더 본격적인 성향의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도 환영을 받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혹은 첼리스트 요요마 같은 이들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자, 이번 글에서는 피아졸라를 만나보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에 앞서, 어느 위대한 음악교사에 대해 먼저 언급해야 할 성싶습니다. 클래식에 대한 어떤 목마름, 혹은 열등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감정을 지니고 있던 젊은 시절의 피아졸라에게 “너의 음악을 하라!”며 정체성과 자신감을 심어줬던 스승이 한 명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의 이름은 바로 나디아 불랑제(1887~1979)입니다. 20세기 음악사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 음악가, 가브리엘 포레의 제자였고 애초에는 작곡가로 음악인생의 발을 내디뎠던 사람이지만 1910년 무렵부터는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는 영국 런던의 로얄필하모닉, 미국의 보스톤 심포니와 뉴욕필하모닉, 필라델리아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던 ‘최초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조명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육자로서의 삶이 훨씬 더 중요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불랑제는 파리 발뤼가(街) 36번지 아파트에서 1904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면서 수많은 음악가들을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20세기를 수놓은 거장들이 즐비합니다. 얼핏 생각나는 음악가들로는 지휘자 이고르 마르케비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과 헨릭 쉐링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또 1920년대에는 미국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온 제자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앞서 언급했던 아론 코플랜드는 애제자 중의 애제자였고,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도 그에게서 배웠습니다. 코플랜드는 세상을 떠난 스승을 추모하면서 훗날 이런 말을 했지요.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포노)에서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1920년대 중반, 불랑제 선생님의 응접실은 파리 음악의 중심지였습니다. 수요일 오후, 그분의 집은 일종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무명의 작곡가, 음악도, 진취적인 언론인 등 누구에게나 개방되었고, 누구나 마르무아젤 옆의 의자가 어서 비기를 기다렸습니다.”
불랑제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마드무아젤’이라고 부르곤 했지요. 한데 우리는 이 위대한 교사가 지녔던 교육철학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는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다큐 감독인 브뤼노 몽생종이 80대 중반이 넘어선 말년의 불랑제를 인터뷰하고 있는 대담집인데요, 대가의 연륜이 묻어나는 육성들이 곳곳에 등장해 밑줄 긋는 재미가 쏠쏠한 책입니다. 저는 여기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노르웨이 사람인 모차르트를 상상할 수 있나요? 그리고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 사람이라는 건 저절로 느껴지지 않나요? (중략) 저는 일본에서 온 학생들에게 말하곤 해요. ‘부디 일본 사람으로 그대로 있어요.’ 나는 그들이 자신의 뿌리를 되찾게 하려고 애를 쓰고, 그들이 파리 유학생이라고 해서, 그들을 얼치기 파리지앵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보편성이란 뿌리뽑힘이 아니예요. 브람스는 나폴리 사람이 아니고, 몬테베르디는 스웨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아주 잘 느낄 수가 있어요.”
피아졸라가 그녀를 찾아간 시기는 30대 초반이었던 1954년이었습니다. 첫번째 아내였던 ‘데데’(오데트 마리아 울프)와 함께였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 덕택에 파리에 갈 수는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피아졸라는 아직 무명이었기 때문에 밤이면 쥐들이 소란스러운, 작고 허름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고 합니다. 불랑제는 이미 60대 후반의 노년에 접어들고 있었지요.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을유문화사)라는 책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랑제는 피아졸라가 건넨 악보를 살펴보고는 “작곡은 괜찮은데 감정이 없구나”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피아졸라는 이 말에 낙담해서 거리를 쏘다니고 친구들한테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직설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말하자면 매우 라틴적인 성품의 남자였던 피아졸라가 얼마나 속이 안좋았을 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그런 마음을 당연히 눈치챘겠지요. 어느날 “지금까지 주로 어떤 음악을 했냐”고 물었고, 피아졸라는 마지못해 “탱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에 따르면 스승은 이렇게 반응했다고 하지요. “그 음악은 끝내주지! 한 곡 연주해 보겠나?” 스승이 거실의 피아노를 가르키자 피아졸라는 쭈뼛거리며 그 앞에 앉았습니다. 어땠을까요? 그 다음 장면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연주를 마치기도 전에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외쳤지요. “이거야말로 피아졸라야! 절대로 멈추지 말게!”
살다보면 마법같은 순간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피아졸라에게는 바로 그 장면이 어느 순간 찾아온 마법이었겠지요.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남쪽으로 400Km쯤 떨어진 마르델플라타 태생입니다. 네 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지요.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복싱과 야구를 좋아하고 폭력배들과도 어울렸던 과격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여덟 살 때 아버지가 18달러에 사준 중고 반도네온을 손에 들고, 그 아버지한테서 탱고를 배웠던 피아졸라는 열 살이 조금 넘어서부터 남들 앞에서 탱고를 연주할 정도가 됩니다. 아버지 바셴테 피아졸라는 어린 아들이 탱고를 멋지게 연주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아들 바보’였지요. 나중에는 자신의 오토바이에 ‘아스토르 피아졸라’라고 큰 글씨로 써붙이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또 그밖의 몇몇 선생으로부터도 반도네온과 탱고를 배운 어린 피아졸라는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습니다. 하지만 열서너 살 무렵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클래식에 대한 흠모가 슬슬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는 뉴욕에서 옆집에 살던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 벨라 윌다(Bela Wilda), 또 훗날 피아졸라가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블랑제만큼 중요한 스승으로 손꼽았던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1916~1983)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지요.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귀환했는데, 히나스테라는 바로 그 무렵에 만났던, 나이는 고작 다섯 살 위였지만 피아졸라의 음악인생에서 결정적인 스승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피아졸라는 그에게서 작곡과 편곡, 화성학 등을 5~6년간 배웠습니다. 그렇게 탱고와 클래식을 하나로 융합할 수 있는 토대를 하나씩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피아졸라는 기본적으로 탱고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일종의 열등감이 또아리를 틉니다. 밴드와 함께 탱고를 연주하면서도 그것을 다만 ‘지겨운 밥벌이’로 치부했습니다. 그렇게 밥벌이를 하는 틈틈히 바흐와 쇼팽, 라흐마니노프를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곤 했던 그는 “빌어먹을 탱고! 난 스트라빈스키가 될 거다”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부정적인 음악가였던 그에게 새로운 자신감, 아울러 탱고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불어넣어줬던 이가 바로 불랑제였습니다. 아마도 선생의 한마디는 피아졸라에게 막강한 음악적 추동력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피아졸라는 훗날 자신의 딸에게 “불랑제 선생은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불랑제가 간파했듯이 누가 보더라도 피아졸라의 음악적 뿌리는 탱고입니다. 한데 재즈가 그렇듯이 탱고의 출생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합니다. 아르헨티나 빈민가의 유곽(遊廓)에서 태어난, 슬프고도 열정적인 ‘뒷골목 음악’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출생 신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930년대 인구가 250만명에 달했던, 스스로 ‘남미의 파리’가 되기를 원했던 화려한 도시였지요. 탱고는 이 도시의 포구(浦口), 이민자들과 뱃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빈민가 ‘보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술집의 붉은 등불이 하나 둘 켜질 무렵이면 반도네온과 바이올린이 뜨거운 템포의 음악을 연주했고, 가난한 남자들과 술집의 여자들은 그 리듬에 맞춰 한데 어울렸습니다.
피아졸라는 본국에서조차 그저 그런 음악, 우리로 치자면 ‘뽕짝’의 대접을 받았던 춤곡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격상시킨 ‘새로운 탱고’(Noevo Tango)의 아버지였지요. 국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곡은 아마도 1984년 작인 <오블리비온>(Oblivion)이 아닐까 싶습니다. ‘망각’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연주자들도 이 곡을 자주 연주합니다. 애초에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실내악인데, 반도네온과 바이올린을 중심에 놓은 4중주, 또 그밖에 다양한 관악기들을 포함한 4중주로도 많이 연주되는 곡입니다. 약간 몽환적인 느낌의 화음,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탱고풍 선율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곡입니다. 앞서 언급한 <아디오스 노니노>는 이보다 훨씬 먼저 작곡한 곡이지요. 1959년 10월, 피아졸라가 자신의 밴드와 함께 푸에르토리코 연주여행을 떠난 사이에 아버지 비셴테가 사망합니다. 당시 피아졸라는 무대에서 울면서 연주했다고 하지요. 당시 무대의 동료들은 "그가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봤다"고 전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이 통한의 심정으로 작곡한 곡이 바로 <아디오스 노니노>입니다. 노니노는 ‘할아버지’라는 뜻인데, ‘아들 바보’였던 호탕한 아르헨티나 남자 비셴테는 생애 마지막 무렵에는 아들대신 ‘손주 바보’로 살았다고 하지요. 당시 피아졸라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김연아 이후에 많이 알려졌지만, 생전의 피아졸라는 이 곡을 스무번 이상 편곡해 수천번 이상 연주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대표곡 중에서도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밖에도 그의 대표곡으로 손꼽히는 음악들은 허다합니다. <리베르 탕고>(1973)도 누구나 금세 알 수 있는 곡입니다. 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1965~1970), <탱고의 역사>(1985),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한 <르 그랑 탕고>도 유명합니다. <르 그랑 탕고>는 첼리스트 요요마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탱고”로 손꼽는 곡이기도 하지요. ‘귀’를 위한 음악일지라도 탱고의 뜨거운 감성이 여전히 살아 있는 음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곡의 길이도 약 3분에서 10여분으로 비교적 짧기 때문에 듣기에 어려운 곡은 별로 없습니다.
열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남자였던 피아졸라는 중년 이후부터 고혈압을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다고 하지요. 온몸으로 부딪히며 ‘누에보 탕고’의 창세기를 썼던 그는 1990년 뇌출혈로 쓰러져 거의 2년간 병석에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1992년 7월 4일, 평생에 걸쳐 세 번 결혼했던 그는 마지막 아내 라우라의 손을 잡고 눈을 감습니다. 향년 71세였습니다. 아디오스 피아졸라!
글/문학수
▶기돈 크레머, <피아졸라 예찬>(Hommage a Piazzolla)/1995년/Warner Music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반이다. 기돈 크레머(바이올린), 페르 안느 그로비겐(반도네온), 바딤 샤카로프(피아노), 알로이스 포쉬(더블베이스)의 4중주 편성이다. 이제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는 피아졸라의 탱고를 또 한번 격상시킨 연주자다. 바흐에서 피아졸라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함 없이 구사하는 기돈 크레머가 보다 실내악적인 분위기로 해석해낸 피아졸라의 탱고를 만날 수 있다. ‘오블리비옹’을 포함해 11곡을 담았다. 마지막 곡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2중주로 펼쳐지는 ‘르 그랑 탕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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