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3-08 18:24
ㆍ세르비아 극작가 시모비치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국내 공식 초연
막이 내려간 후에도 대사가 귓가를 맴도는 연극이 가끔 있다. <유랑극단 쇼팔로비치>가 꼭 그렇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다. “우리가 양을 모피로, 곰을 털모자로, 돼지를 부츠로 둔갑시키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있어 모피 코트가 다시 양의 울음소리를 내도록, 털모자가 곰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도록, 부츠가 새끼 돼지를 낳도록 할 것인가?”
이 연극에는 그 밖에도 삶과 예술의 의미를 묘파하는 주옥같은 대사가 허다하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묻는 연극. 세르비아 문단의 이상주의자로 불리는 시인 겸 극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75)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가 지난 5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극장 측은 “그동안 각 대학 연극학과와 극단 워크숍 등으로 간간이 공연한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무대로는 이번이 국내 초연”이라고 밝혔다.
1943년, 찌는 듯한 여름날이다. 나치에 점령당한 세르비아 서쪽의 작은 도시 우지체(Uzice). 작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에 떠돌이 극단 일행이 찾아온다. 배우들은 모두 네 명이다. 거리 벽에는 독일어로 된 공고문과 법령 문구들이 가득하다. 그 황폐하고 살벌한 도시에서 과연 연극이 가능할 것인가. 독일군은 공연허가서를 요구하고,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유랑극단 일행을 연행한다. 마을 사람들도 유랑극단을 거부하기는 마찬가지다. “매일 사람들이 체포되는 마당에 연극을 하겠다고?” “세르비아 절반이 초상집인데, 저것들은 시체더미 옆에서 연극을 하겠단다!”라며 냉소와 비난을 퍼붓는다.
예술과 현실, 예술과 전쟁, 예술과 죽음 간의 복잡한 관계에 맞닥뜨린 네 명의 배우들. 작가 시모비치는 “그것이 바로 이 연극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작가가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은 젊은 배우 필립이다. 얼핏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그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다. 극 속에서 그는 이렇게 묘사된다. “저 애는 삶과 연극을 구분 못해요. 구름과 환상 속에 사니까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연극인지 모른다고요. 필립에게 해골을 줘보세요. 햄릿이 된다고요. 그의 두 손에 지팡이를 쥐어주면 눈이 찔린 오이디푸스왕이 되죠.”
하지만 때때로 저능아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그 엉뚱한 인물이야말로 이 연극의 열쇠를 쥔 메신저다. 캄캄한 무대에 홀로 나타난 필립은 소품으로 쓰이는 나무칼을 높이 쳐든 채 “짓밟히고 부서진 내 몸을 일으켜 철통같은 군대에 맞서리라, 울부짖는 아이들과 눈물 흘리는 어머니들에게 평화를 안겨주리라”고 외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물론 그것도 필립에게는 연극의 일부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떼도적>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벨주락> 등을 현실로 ‘착각’하며 살아온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엘렉트라>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고른다.
마치 광인(狂人)처럼 보이는 필립은 극 속에서 하나의 ‘비유’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는 곧 연극(예술)이며 상상력이다. 작가 시모비치는 그에게 ‘예수의 운명’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마무리한다. 유랑극단은 나치가 점령한 우지체에서 비록 한 편의 연극도 공연하지 못했지만, 필립은 오히려 자신의 삶으로 연극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한국 초연 연출가 이병훈(58)은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 현실에서 가장 유용한 일을 해냈다는 아이러니에 이 작품의 주제가 함축돼 있다”면서 “환상과 상상력이 현실보다 오히려 힘이 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연극이 스스로에게 바치는 오마주와도 같은 작품”이라며 “물질과 자본에 포위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의 힘차고 안정감 있는 연기도 볼 만하다. 28일까지 공연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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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세르비아 극작가 시모비치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국내 공식 초연
막이 내려간 후에도 대사가 귓가를 맴도는 연극이 가끔 있다. <유랑극단 쇼팔로비치>가 꼭 그렇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다. “우리가 양을 모피로, 곰을 털모자로, 돼지를 부츠로 둔갑시키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있어 모피 코트가 다시 양의 울음소리를 내도록, 털모자가 곰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도록, 부츠가 새끼 돼지를 낳도록 할 것인가?”
이 연극에는 그 밖에도 삶과 예술의 의미를 묘파하는 주옥같은 대사가 허다하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묻는 연극. 세르비아 문단의 이상주의자로 불리는 시인 겸 극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75)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가 지난 5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극장 측은 “그동안 각 대학 연극학과와 극단 워크숍 등으로 간간이 공연한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무대로는 이번이 국내 초연”이라고 밝혔다.
1943년, 찌는 듯한 여름날이다. 나치에 점령당한 세르비아 서쪽의 작은 도시 우지체(Uzice). 작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에 떠돌이 극단 일행이 찾아온다. 배우들은 모두 네 명이다. 거리 벽에는 독일어로 된 공고문과 법령 문구들이 가득하다. 그 황폐하고 살벌한 도시에서 과연 연극이 가능할 것인가. 독일군은 공연허가서를 요구하고,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유랑극단 일행을 연행한다. 마을 사람들도 유랑극단을 거부하기는 마찬가지다. “매일 사람들이 체포되는 마당에 연극을 하겠다고?” “세르비아 절반이 초상집인데, 저것들은 시체더미 옆에서 연극을 하겠단다!”라며 냉소와 비난을 퍼붓는다.
연출가 이병훈 |
하지만 때때로 저능아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그 엉뚱한 인물이야말로 이 연극의 열쇠를 쥔 메신저다. 캄캄한 무대에 홀로 나타난 필립은 소품으로 쓰이는 나무칼을 높이 쳐든 채 “짓밟히고 부서진 내 몸을 일으켜 철통같은 군대에 맞서리라, 울부짖는 아이들과 눈물 흘리는 어머니들에게 평화를 안겨주리라”고 외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물론 그것도 필립에게는 연극의 일부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떼도적>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벨주락> 등을 현실로 ‘착각’하며 살아온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엘렉트라>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고른다.
마치 광인(狂人)처럼 보이는 필립은 극 속에서 하나의 ‘비유’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는 곧 연극(예술)이며 상상력이다. 작가 시모비치는 그에게 ‘예수의 운명’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마무리한다. 유랑극단은 나치가 점령한 우지체에서 비록 한 편의 연극도 공연하지 못했지만, 필립은 오히려 자신의 삶으로 연극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한국 초연 연출가 이병훈(58)은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 현실에서 가장 유용한 일을 해냈다는 아이러니에 이 작품의 주제가 함축돼 있다”면서 “환상과 상상력이 현실보다 오히려 힘이 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연극이 스스로에게 바치는 오마주와도 같은 작품”이라며 “물질과 자본에 포위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의 힘차고 안정감 있는 연기도 볼 만하다. 28일까지 공연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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