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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구자범과 경기필하모닉의 '젊은 사운드'

경기필하모닉 '젊은 사운드’ 바그너 음악 제대로 해냈다

기사입력 2012-05-09 21:19 | 최종수정 2012-05-10 21:18

 

ㆍ지휘자 구자범, 절묘한 선곡으로 청중 사로잡아

 

경기필하모닉의 ‘젊은 사운드’가 청중을 매료시켰다. 지난 8일 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열기가 넘쳤다. 구자범(42·사진)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은 바그너의 음악극 <로엔그린>의 1막 3장에 등장하는 ‘결투에서 승리한 로엔그린’으로 이날 연주회를 비등점으로 몰고가 마침내 폭발시켰다. 객석은 뜨거운 환호와 기립박수로 호응했다. 계속되는 커튼콜에 답하는 지휘자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표정은 밝았다. 지휘자뿐 아니라 단원들의 표정에서도 ‘제대로 해냈다’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경기필하모닉이 달라졌다. 이날 관객에게 선보인 ‘바그너 갈라 콘서트’는 그 변화를 실감케 해준 연주회였다. 40대 초반의 지휘자 구자범이 경기필하모닉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것은 지난해 3월. 고양아람누리에서 말러의 ‘교향곡 1번’으로 첫 연주회를 치른 것이 그 두 달 뒤였으니, 새로운 체제로 출범한 지 꼭 1년을 맞은 셈이다. 그들이 이번에 꺼낸 카드는 바그너다. 바그너의 음악극 중에서도 합창이 삽입된 곡들을 중심으로 ‘바그너 갈라 콘서트’를 마련했다. 나치와의 친연성 탓에 정치적으로는 불편하지만 감각적으로는 매우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곡들이다. 1부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탄호이저>로, 2부는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으로 짜여졌다.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선곡이다.

첫곡이었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전주곡을 연주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는 크고 단단했지만 미묘한 출렁거림은 느껴지지 않았으며 악기 간의 조화도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젊은 단원들이 각자의 악기에만 몰입해 다른 소리를 별로 듣지 않는 것 같다는 노파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하지만 연주가 진행될수록 음악은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탄호이저>의 3막 전주곡에 이르렀을 때, 현악기군은 드디어 섬세하고 찰진 소리로 듣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바그너 음악의 황홀함이 빛을 튕기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순간에도 관악기들은 가끔 불편했다. 포효하고 분출하는 에너지는 충만했지만 섬세하게 수렴해야 할 장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2부에서 경기필하모닉은 비상했다. 구자범의 선곡은 절묘했다. 그는 고통스럽고 비장한 <파르지팔>의 1막 전주곡으로 2부의 문을 열면서 앞서 느껴졌던 일말의 회의를 말끔하게 걷어냈다. 느린 템포의 약음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은 현악기군의 단단한 팀워크는 물론이거니와, 관악기들도 마침내 탄탄한 앙상블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간주곡을 거쳐 3막 피날레 연주를 끝냈을 때,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음악의 가장 고귀한 정점인 침묵과 여백의 순간을 드디어 연출했고 객석의 청중은 숨 죽였다. 사람에 따라 달리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이날 연주회의 질적인 하이라이트였다.

마지막 곡 <로엔그린>은 객석을 다시 도취와 열광으로 몰아넣었다. 구자범은 3막 전주곡과 결혼식 합창으로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3막 간주곡의 서열식 나팔 소리로 파워풀하게 음악을 몰아갔다. 전진하는 템포감으로 콘서트홀은 순식간에 출렁거렸고 오케스트라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곡은 1막 3장에 등장하는 ‘결투에서 승리한 로엔그린’. 이날 공연은 그렇게 폭발하면서 끝났다. 120명으로 이뤄진 오케스트라와 200명이 넘는 합창단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장관’이었다.

청중이 연주회 후반부에 반응하는 방식은 대개 두가지일 터. 하나는 연주회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더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8일 경기필하모닉의 ‘바그너 갈라 콘서트’는 분명 후자였다. 물론 저절로 얻어낸 성과는 아니다. 신임 지휘자 취임과 더불어 진행된 4차례의 강도 높은 오디션, 젊은 단원들을 대거 영입한 이후의 부단한 연습을 통해 얻어낸 결과다. 관계자 전언에 따르자면, 현재 경기필하모닉 단원들의 평균 연령은 약 28세다. 게다가 지휘자 구자범의 기획력과 선곡 능력도 관객과의 소통에서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필하모닉은 그렇게 진보하고 있다. 이처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드디어 ‘숙성된 소리’를 들려주는 오케스트라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