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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연출가 김낙형…연극 ‘토란-극’

김낙형은 내가 좋아하는 연출가 가운데 한 명이다. 일단 그는 말투가 어눌하다.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끙끙대기는 하는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통상적이면서도 정형화된 언어로 깔끔하게 전달하는 데 아주 서툴다. 게다가 잘 웃지도 못한다. 가끔 웃긴 하는데, 그럴 때마다 표정이 아주 난감해보인다. 자연스럽게, 혹은 세련되게 웃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좀 깊이 들어가면 '계급'의 문제와도 연관이 깊다. 내가 20대 때 아르바이트 삼아 아이들을 잠시 가르쳤을 때의 기억인데, 부잣집 애들은 말도 잘 듣고 인사도 잘하고 표정도 환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선배가 운영하던 학원에서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는 영 딴판이었다. 그곳 아이들은 어둡고 반항적이었으며 자기 표현에 서툰 경우들이 많았다. 물론 개개인의 구체적 경험과 집안 분위기에 따라 차이가 없을 수 없겠으나, 빈부의 격차는 인간의 표정에 깊은 계급적 흔적을 새긴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낙형의 얼굴은 영낙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관점이다. 

그를 유난히 주시하는 이유는 또 있다. 남다른 진지함 때문이다. 최근의 연극판을 기웃거리다보면 작품을 대충 만들어놓고 말만 번드르르한 경우들. 이를테면 작가적 진정성보다 마케팅에 먼저 신경을 쓴다거나, 작품의 알맹이보다는 색다른 아이디어만으로 뭔가를 한번 보여주겠다는 '조급한 승부사들'을 적잖이 보게 된다. 하지만 김낙형은 이런 풍조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는 좋은 의미의 '꼴통'이다. 환금성 없는 연극적 고민을 늘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구부정한 어깨의 연극쟁이 김낙형. 언젠가 그가 대학로 한 커피숍에서 "잘 풀리면 소주 한잔 꼭 대접하겠씀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최근 연강예술상을 수상한 걸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아래의 기사는 이달 초에 봤던 김낙형의 새 연극 ‘토란-극’에 대한 리뷰다. 

어쩌면 이 연극은 관객들에게 버거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김낙형이 나름의 연극적 언어를 꾸준히 개척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구부정한 어깨에 얹힌 고민의 힘일 게다. 게다가 극단 죽죽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열정과 헌신성은 기립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토란 극>에 출연한 여덟 배우들은 정말 사랑스럽다. 자기 자신를 성마르게 드러내기보다는 전체적인 발란스와 앙상블을 격조있게 구축하는 연기를 펼쳐보였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배우들이 다들 일정한 수준과 기량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연출가와 다른 동료 배우들에게 깊은 이해와 신뢰를 갖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낙형은 참으로 복이 많은 연출가다.  


기사입력 2010-10-06 21:31 | 최종수정 2010-10-07 19:48

연극 ‘토란-극’…상실된 자아 ‘춤’과 ‘시’로 보여주기


연출가 김낙형은 이번에도 묵직한 주제를 던졌다. 어눌한 말투의 이 ‘문제적 연극쟁이’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신작 <토란-극>의 막을 올렸다. 본인의 입을 빌리자면 이 연극의 주제는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의 삶”에 대한 연극적 보여주기. 좀더 부연하자면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꿰맞추며 살고 있는 뿌리 뽑힌 인간상, 시간조차도 주체적으로 가질 수 없는 인간, 애통해하는 감정마저도 사회적 요구와 관습에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다.


일가족이 국도변을 벗어난 황폐하고 어둑한 장소에 모였다. 아버지와 셋째딸은 이미 죽었고, 어머니와 세 아들, 그리고 넷째딸은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작가 겸 연출가 김낙형은 이 일곱 명의 등장인물에게서 특정한 사건과 에피소드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더 깊숙하게 앵글을 들이댄 피사체는 그들의 몸 속에 갇힌 무의식이다.

그는 그렇게 일가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면서 ‘이야기하기’를 벗어난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관객과 만난다. 일가는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외면하며 겉돈다. 정신은 이미 메마른 낙엽처럼 바스라졌고, 그들의 몸뚱이는 중력에서 벗어난 허깨비처럼 유영하면서 제각기 엇갈린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유대를 상실한 채, 각자의 허공을 바라보며 각자의 이야기를 주절거린다.

전작 <나의 교실>과 <맥베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김낙형의 연극은 어둡고 시적이며 비의적(秘儀的)이다. 일곱 배우의 입에서는 최대한 압축된 대사가 한 줄의 시처럼 흘러나오고, 이들의 몸짓은 하나의 ‘춤’으로 연출되면서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분위기와 상징성을 드러낸다. 아울러 배우들의 몸과 한 덩어리로 어울리는 오브제들. 이를테면 일렁이는 촛불과 천장에 매달린 철봉, 낡은 놋대야 같은 것들. 일체의 불필요한 소품들을 걷어낸 무대에서, 단지 그 몇 개의 사물들이 생명력을 얻어가는 장면은 분명 김낙형 연극의 묘미로 꼽을 만하다. 지난해 이집트 카이로국제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맥베스>에서처럼, 이번에도 긴장감 넘치는 ‘오브제의 미학’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그 덕분에 이 연극은 자칫 난해함이라는 수렁에 빠질 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말과 몸에만 의존하는 연극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시선을 잡아당기는 오브제는 놋대야. 그 불쾌한 금속성의 음향으로 아버지가 겪은 자동차 사고를 상징했던 놋대야가 어머니의 출산 장면에서 아이를 받아내는 둥근 그릇으로 전환되는 장면은 기발하다. 죽은 아버지가 등에 짊어진 커다란 나무판은 죽은 자를 위한 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생전의 아버지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돈을 향한 욕망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처럼 <토란-극>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둘 이상의 중의적 상징성을 띤 채 극 속으로 녹아든다.

연출가의 추상적인 주문을 온 몸으로 받아낸 극단 ‘죽죽’의 일곱 배우는 박수를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들은 주연과 조연의 구분없이 한 덩어리의 앙상블을 이뤄냈다. 작가 겸 연출가 김낙형은 <토란-극>에서 ‘시’와 ‘춤’의 영역으로 성큼 다가섰지만, 관객을 위해 조금만 더 친절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고민없는 통속보다는 고민하는 난해함이 ‘연극쟁이 김낙형’의 천분(天分)일 것. 그는 "<토란-극>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흙 토(土)에 어지러울 난(亂)”이라고 짧게 답했다. 공연은 10일까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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