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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연극 ‘춘향’...에로티시즘의 앵글로 바라본 <춘향전>

영욱이형의 친구인 진성이형이 연극에 출연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배우가 되겠다는 그의 늦깎이 결심이 참으로 리얼하고 절절하다. 10년, 20년 후배들과 한데 어울려 지금까지 서너편쯤 연극을 한 모양이다. 이번에는 연극 <춘향>에 성참판 역할로 나왔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을 보게 됐다. '배우 이진성'에게 가장 돋보이는 건 어린 배우들보다 훨씬 노련하고 강렬한 눈빛이었다. (나는 눈빛이야말로 연기의 절반이라고 여긴다.) 게다가 능청스러움과 유연함도 느껴졌다. 그가 무대에서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역시 배우의 상상력에는 인생 짬밥이 요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 저런 눈빛을 발산하겠는가? 그건 아마도 절실함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비록 많이 늦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겠다는 50대 아저씨의 절실한 열정. 그러니 어찌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사입력 2010-09-29 21:07 | 최종수정 2010-09-30 11:27



이 연극은 질펀하다. 무대는 룸살롱이다. 월매와 춘향이와 향단이는 룸살롱 아가씨다. 성참판과 변학도와 이몽룡과 방자는 그 룸살롱을 찾아든 손님들이다. 말하자면 <춘향전>(사진)의 등장인물들이 한날한시에 룸살롱에 모두 모였다. 이렇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부여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고전 춘향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대학로에서 한참 벗어난 성북동 100-1번지에 새로 문을 연 지하 소극장 ‘일상지하’. 지난 24일 개관작 < Sing Ring sprING and P 춘향 >이 막을 올렸다. 제목이 좀 부담스러워 보인다. 편의상 ‘춘향’으로 표기하자.

연극 <춘향>은 <춘향전>이 가진 기존의 드라마와 기승전결을 일단 부정한다. 이 연극의 작가 겸 연출가인 김현탁이 가장 관심을 둔 것은 <춘향전>이 가진 ‘질펀한 로맨스’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연극 <춘향>은 변학도로 상징되는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 몽룡과 춘향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그 사랑을 영원히 지켜내려는 의지 따위의 고리타분한 해석에서 멀찌감치 벗어났다. 다만 남자와 여자의 몸속에 꿈틀대는 ‘원초적 본능’이야말로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춘향전>의 진정한 생명력일 수 있다는 관점. 이 연극은 거기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몽룡과 춘향이 서로를 희롱하는 에로티시즘이야말로 ‘어사출도’를 능가하는 <춘향전>의 하이라이트일 것. 이 연극은 바로 그 장면을 재해석의 가장 중요한 앵글로 삼았다. 그 에로틱한 앵글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춘향전> 자체를 다시 들여다본다.

룸살롱은 취기와 음담패설로 가득하다. 여자들은 섹시 댄스를 추고 비음 섞어 유행가를 부른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전신을 눈으로 훑고 손으로 더듬는다. 성참판과 월매가 가장 질펀하게 논다. 연기도 능청스럽다. 그렇지만 연극적으로 가장 힘이 실린 건 역시 몽룡과 춘향과 변학도 사이의 삼각관계. 연출가 김현탁은 그 삼각의 에로티시즘을 배우들의 빠른 몸짓과 애크러배틱을 연상케 하는 동작들로 표출한다. 특히 10여분간 이어지는 춘향과 몽룡의 정사 장면은 “솔직히 말해, 우리는 이것 때문에 <춘향전>을 그토록 좋아해온 것 아닌가?”라는 도발적 질문처럼 보인다. 물론 그 도발은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지하 소극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게 한다. 연출가 김현탁은 공연이 끝난 후 이에 대해 “그것이 바로 작품의 의도”라면서 “마음이 불편했다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쉬운 점은 몇몇 배우들의 몸이 아직 덜 풀렸다는 것. 판소리 사설투의 대사들이 관객에게 명료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연극에서 대사보다 오히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몸짓 연기도 아직 경직돼 있다. 그러다보니 일곱 배우들의 찰진 앙상블은 갈 길이 좀 더 남은 것처럼 보인다. 과도한 음향의 사용도 거슬린다.

연출가 김현탁이 대표를 맡은 씨어터그룹 ‘성북동 비둘기’가 새롭게 둥지를 튼 ‘일상지하’는 소극장이라기보다 ‘그냥 지하실’에 가깝다. 무대와 객석은 구분 없이 트였고, 조명 시설이나 객석의 의자도 변변치 않다. 한국 연극의 메카로 불려왔던 대학로가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잇따라 발생한 젊은 연극인들의 유민화. 그것이 성북동 초입을 거쳐 마침내 끝자락까지 이르렀다. 연출가 김현탁은 “이 외곽에서 익히 알려진 고전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 작품으로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재해석할 예정. <춘향> 공연은 10월17일까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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