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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들이 음악회에서 연주할 곡을 결정하는 것을 ‘선곡’이라고 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대로 음반을 고르게 되는데, 이것 역시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선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상자가 처해 있는 당시의 상황이나 감정 상태겠지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계절인 것 같습니다. 예컨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1악장 도입부에서부터 감미롭고 따사로운 선율을 들려줍니다. 그래서 ‘봄’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겁니다. 반면에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은 리듬에 활기가 넘치는 데다 관악기들이 시원한 팡파레를 들려주지요. 그런 까닭에 여름에 들으면 금상첨화입니다.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출처: 위키피디아] >
이제 가을도 막바지입니다. 설악산 단풍은 거의 떨어졌고 내장산 나뭇잎들이 절정의 붉은 색을 뽐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역시 러시아 음악이 제격입니다. 지난 회에서 들었던 라흐마니노프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소개할 표트르 일리히 차이코프스키(1840~1893)도 겨울에 듣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악을 많이 남겼습니다.
‘교향곡 4번’은 차이코프스키가 37세였던 1877년에 작곡해 이듬해 초연한 곡입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모두 6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중에서도 후반부에 놓이는 4번부터 6번까지가 오늘날 자주 연주됩니다. 특히 맨 앞에 놓이는 4번은 이전까지 차이코프스키가 보여줬던 교향곡 작법(作法)의 미숙함을 단번에 씻어내면서, 러시아풍 교향곡의 전형을 선보이고 있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본인이 곡에 대해 매우 세세한 해설을 남겨놓고 있어서, 별도로 곡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음에도 ‘표제음악’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표제음악’이란 작곡가가 곡의 제목을 별도로 붙이고 해설까지 달아 출판하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예컨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이라든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같은 곡이 대표적입니다.
< 폰 메크 백작부인 [출처: 위키피디아] >
어떻게 해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곡에 대해 그토록 자세한 설명을 남겼던 걸까요? 그것은 바로 한 여인과 주고받은 편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교향곡 4번’의 작곡에 착수하기 직전이었던 1876년,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여인을 알게 됩니다. 익히 알려져 있는 얘기입니다만, 그 여인은 러시아 철도 부호의 미망인이었던 폰 메크 부인이었습니다. 모스크바음악원 설립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그녀와 차이코프스키의 관계를 주선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카페에서 소개팅을 시켜준 건 아니었구요,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 말하자면 일종의 ‘스폰서십’을 주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와 그녀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14년간 그들이 주고받은 1200여통의 편지들은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로만 보기에는 애매한 내용들이 적잖게 섞여 있습니다. 남녀 사이에 오간 서신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14년간, 어느 사교 파티에서 딱 한번 스치듯이 얼굴을 본 것 외에는 서로 만난 적이 없으니, 상대에 대해 얼마나 커다란 환상을 품었겠습니까?
‘교향곡 4번’은 바로 그 든든한 후원자이자 연모의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첫번째 곡입니다. 차이코프스키는 곡에 대해 세세한 해설을 써서 폰 메크 부인에게 첫번째 악보를 선사했지요. 그렇지만 곡의 정서는 매우 암울합니다. 러시아적 애상감은 물론이거니와 때때로 폭발하는 광기마저 느껴집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의 어두운 천성이 음악에 작용했을 겁니다. 우랄 산맥 서쪽의 잿빛 광산촌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난 차이코프스키는 태생적으로 어두운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곡을 듣기 위해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당시 상황을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 ‘스폰서십’을 맺은 이듬해에 모스크바음악원 학생이었던, 그러니까 자신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하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그 결혼은 밀류코바 측의 열렬한 구애 탓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품을 지닌 데다가, 마음속으로는 이미 폰 메크 부인에게 사모의 정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까요. 아울러 그는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래저래 결혼을 흔쾌히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렇게 복잡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 결혼은 두 달도 안 돼 파경을 맞는데,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이 깨지기 직전에 모스크바강에 뛰어들어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한데 이 ‘자살 시도’라는 것도 영 석연치가 않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졌던 것과는 달리,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점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얼어 죽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물론 10월 초였기 때문에 강물은 제법 차가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 동사(凍死) 기도라는 것도 본인의 말일 뿐, 실제로 그가 자살을 결행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차이코프스키는 구조됐고 동생에 의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아마 그는 강물 속에서 덜덜 떨면서 마음속으로 폰 메크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1악장 >
< 2악장 >
< 3악장 >
< 4악장 >
‘교향곡 4번’은 그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밀류코바를 피해 이탈리아로 도망친 차이코프스키가 산레모 바닷가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한 교향곡이지요. 앞서 작곡한 1~3번과 확연히 구별되는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1악장은 호른과 파곳이 격렬한 팡파레를 연주하면서 시작하는데, 차이코프스키는 그것을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이며 정수”라면서 “운명”이라는 말로 폰 메크 부인에게 설명했습니다. 2악장에서는 오보에가 비애감 가득한 선율을 노래하다가 현악기들이 화답합니다. 듣는 이를 단박에 매혹시킬 만큼 아름다운 악장이지요. 3악장에서는 현악기들의 피치카토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4악장은 변화가 상당히 심한 악장인데, 서주에서 관현악 총주가 격렬한 기세로 터져 나오다가, 이어서 목관악기들이 러시아 민요 ‘들에 선 자작나무’를 모티브로 삼은 소박한 선율을 두번째 주제로 연주합니다. 직후에 다시 첫번째 주제로 돌아왔다가 차이코프스키 스스로 “민중의 축제일에 대한 묘사”라고 설명한 어지러운 춤곡이 세번째 주제로 펼쳐집니다.
글/문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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