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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를 아시지요?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대개 들어봤을 겁니다. 러시아식 발음으로 하자면 ‘리히쩨르’가 맞겠지요. 한국에서는 리히터, 혹은 리히테르로 표기합니다. 그는 서른 살이었던 1945년에 소비에트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전후 소련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떠오릅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굉장히 늦은 데뷔였지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아주 정상적인 데뷔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서른 살은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요. 피아노라는 악기의 몸체가 유난히 큰데다가, 음악적으로도 매우 ‘종합적’인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음악 전체를 조감하는 능력, 아울러 연륜이 묻어나는 해석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일반적인 논리로 확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도 상당한 수준의 연주를 들려주는 피아니스트들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재능’과 ‘노력’에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더욱 연륜이 쌓인다면 한층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어쨌든 서른 살에 데뷔한 리히테르는 1950년대까지 옛소련과 동구권에서 활약하다가 1960년에 드디어 미국땅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에리히 라인스도르프(1912~1993)가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했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것이 이른바 서방에서 녹음한 첫 앨범이었지요. 그는 녹음을 마친 직후 뉴욕 카네기홀에서 모두 다섯 차례의 연주회를 펼칩니다. 리히테르는 그렇게 서방에 진출합니다. 그래서 1960년에 라인스도르프와 녹음했던 음반의 표지 사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흔다섯 살의 리히테르가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지요. 저런! 그때부터 벌써 머리카락이 드문드문했군요.
브람스(Johannes Brahms) [출처: 위키피디아]
눈치채셨겠지만 오늘의 본론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입니다. 지난 회에 협주곡 1번을 들었으니 오늘은 2번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알려져 있듯이 브람스는 1번을 작곡하고 20년이 넘어서야 2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브람스는 1번을 완성한 직후에 2번을 쓸 의사를 이미 표명했었지요. 하지만 1번이 라이프치히 연주회에서 엄청난 혹평(물론 지난 회에서도 말했듯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돼 있었습니다)을 받자 곧바로 작곡에 착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브람스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두번째 협주곡은 더 좋은 곡을 쓰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라이프치히에서 겪었던 모욕은 자존심 강한 브람스의 마음에 상처를 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브람스가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한참 뒤에야 작곡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정황상 유추가 가능할 뿐이지요. 하지만 오랜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두번째 협주곡은 다른 울림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은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를 쓸 무렵, 브람스는 음악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878년부터 작곡을 시작해 1881년에 마무리했으니, 말하자면 브람스가 쉰살을 눈앞에 두고 완성한 곡이지요. 이 때쯤이면 생활도 많이 안정되고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명성도 상당히 얻었을 때였습니다. <독일 레퀴엠> 같은 걸작을 비롯해 교향곡 1번과 2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이미 완성해 초연한 뒤였지요. 그리고 브람스는 이 무렵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브람스의 덥수룩한 모습은 이때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아주 말쑥하고 단정했지요. 꽃미남 청년이었던 브람스는 수염이 북실북실한 중년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갔고 체중도 많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술과 담배, 커피를 무척이나 즐겼다고 하지요. 그래서 점점 더, 배가 불뚝 나온 털북숭이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브람스의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결국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중년의 브람스가 20년의 장고 끝에 날린 회심의 강펀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풍노도처럼 격정적인 곡은 아닙니다. 오히려 청년기에 작곡했던 1번이 더 격렬하지요. 쉰살을 바라보는 브람스는 매우 신중해져 있었고, 그의 관현악법은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1번에 비해 음악적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완성한 직후에 엘리자베스 폰 헤르초겐베르크에게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를 가진 정말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는 편지를 보내지요. 참, 이 여성은 누굴까요? 그녀는 브람스의 피아노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여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빼어난 외모의 그녀에게 마음이 끌릴까봐 두려워 제자로 받아들이길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마음에 품은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간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실제로 브람스는 여러 여성과 교제를 했지요. 하지만 결혼 직전에 번번이 관계를 단절하곤 했다고 합니다. 한데 그것이 꼭 클라라 때문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브람스라는 남자의 기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헤르초겐베르크는 브람스와 ‘우정’을 나눈 여자 친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가 협주곡 2번의 특징을 “사랑스럽고 연약한” “정말 작은” 등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대체로 ‘브람스적 역설’이라고 해석합니다. 브람스 본인의 표현과는 달리, 이 협주곡이 중후장대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지요. 1번보다 곡의 길이도 긴데다 당시의 협주곡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4악장의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도의 피아노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어서 피아니스트들에게 이래저래 부담이 되는 곡입니다. 하지만 피아노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키는 1번과 달리, 중년의 브람스는 이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등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음악을 듣다보면 브람스가 여친에게 완전 거짓부렁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1악장의 문을 여는 호른 솔로는 부드럽기 그지없습니다. 따뜻하고 목가적인 주제를 호른이 제시하고 피아노가 그것을 이어받습니다. 이에 반해 관현악 총주는 매우 남성적이고 당당한 분위기를 드러내지요.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연주되는 명확하고 리드미컬한 두번째 주제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악장은 브람스 자신이 스케르초 악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피아노가 아주 단호한 서주를 힘차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현악기들이 펼쳐내는 우아한 선율, 그리고 잠시 후 피아노가 서주에서 보여줬던 열정적인 타건을 다시금 터뜨립니다. 그 반복과 대비에 귀를 기울이면서 2악장을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클라이막스가 그야말로 열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고 무겁고 화끈하게 2악장을 마무리한 직후, 3악장의 입구에서 꿈결처럼 아름다운 첼로의 서주가 펼쳐지지요. 현악기군의 물결이 한 차례 흘러가고 피아노가 잔잔하게, 아주 여리게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잠시 음악이 급박하게 상승하는 분위기를 보여주다가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템포가 확연히 느려집니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잔잔한 선율에 클라리넷이 아득한 느낌으로 얹히지요. 이어서 현악기들이 클라리넷의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첼로가 등장하면서 피아노와 어울립니다. 마치 맑은 밤하늘의 달빛처럼, 그윽하고 고즈넉한 느낌으로 충만한 악장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지막 4악장은 활달합니다. 생기 넘치는 리듬이 시종일관 펼쳐집니다. 특히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집시풍의 선율이 인상적이지요. 아마 브람스의 헝가리무곡, 특히 그중에서도 1번을 연상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현악기들은 집시풍의 물결을 그려내고, 피아노는 주로 발랄하고 경쾌한 표정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한 느낌으로 연주됩니다.
글/문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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