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출처: 위키피디아]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12살 때 베토벤 앞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베토벤은 어린 소년의 연주에 완전히 감탄했지요. 연주가 끝나자 소년을 꼭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춥니다. 이 유명한 장면은 한 장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그림은 현재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지요. 어린 리스트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 빈을 찾아와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1791~1857)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제자의 청을 받아 신동의 연주회에 참석했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어린 연주자들이 거장 앞에서 오디션을 보기 위해 줄을 서는 광경들은 흔하디흔합니다.
리스트의 스승이었던 체르니는 제자에 대한 첫인상을 “창백하고 병약하다”거나 “피아노를 술 취한 듯 두들겨대던, 손 모양에도 문제가 있는 아이”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천부적인 재능, 그중에서도 특히 “엄청난 즉흥연주”에 대해서는 스승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나 봅니다. 체르니는 리스트를 2년 동안 가르친 다음, 1822년 12월에 빈에서 데뷔 연주회를 치르게 합니다. 자신의 스승인 베토벤에게 “선생님, 이 아이를 한번 봐 주세요”라는 부탁도 잊지 않지요. 그 이듬해에 리스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갑니다. 이른바 리스트의 ‘파리 시절’이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자, 이번에는 시계바늘을 훨씬 앞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리스트는 헝가리의 도보리얀 태생이지요. 오늘날에는 지명이 라이딩(Raiding)으로 바뀌었고, 오스트리아 영토로 편입돼 있습니다.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 리스트는 아마추어 첼리스트였습니다. 하지만 연주자로서 자리를 잡을 만한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생업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집사였지요. 그러니까 하이든이 30년 가까이 음악 하인으로 봉직했던 바로 그 에스테르하지 가문입니다. 헝가리에서 세력이 등등했던 아주 유명한 귀족 집안이지요. 리스트의 아버지는 그 집안의 일을 돌보던 하인들 중에서 비교적 ‘고위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자면 지주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덕분에 어린 리스트는 꽤 풍족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도보리얀 지역에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부농’의 아들이었던 셈이지요.
아담 리스트는 아들을 유명한 음악가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첼리스트의 꿈이 좌절된 아버지, 사는 것은 제법 풍족했지만 신분은 그저 하인에 머물렀던 그는 아들의 음악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집안에서조차 헝가리어를 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아마 독일-오스트리아를 향한 문화적 지향이 유난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독일계 여성 안나 라거(리스트의 모친)와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일설에는 리스트 집안이 집시의 혈통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설(定說)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는 리스트를 데리고 훌륭한 선생들(체르니, 살리에리 등)을 찾아다녔고, 마차를 달려 곳곳에서 순회연주를 펼쳤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리스트가 열여섯 살이던 1827년에 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자, 리스트의 음악 교육에서부터 일상생활에 대한 점검까지 도맡았던, 연주와 관련해서는 매니저 역할까지 담당했던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리스트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그렇습니다. 아직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거의 ‘파파 보이’로 살다시피 했던 그는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방황의 시기를 보냅니다. 물론, 연주자로서의 인기는 점점 높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신들린 비르투오소’의 소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리스트는 파리의 사교계에서도 점점 유명 인사가 되지요. 스무 살 무렵에는 베를리오즈, 쇼팽, 파가니니 등과 만나 교유를 시작하면서 일급 음악가의 반열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말하자면 리스트의 ‘파리 시절’을 상징하는 연애 사건이 터졌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아들이 여자들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그 우려가 현실이 된 셈입니다. 리스트는 스물세 살 때 7년 연상의 유부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을 만납니다.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쥬 상드와 쌍벽을 이루던 여인이었습니다.
파리의 살롱에서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요제프 단하우저 作) [출처: 위키피디아]
화가 요제프 단하우저가 그린 ‘파리의 살롱에서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라는 그림을 혹시 아시나요?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파리 예술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빅토르 위고, 조르쥬 상드, 니콜로 파가니니,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 그리고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이 그림 속에 등장합니다. 물론 사진(실사)이 아니라 상상이 가미된 회화입니다. 마리 다구 부인은 피아노 치는 리스트의 바로 옆에, 등을 살짝 드러낸 섹시한 뒷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리스트는 그 여인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며 사랑의 도피행각을 펼칩니다. 둘은 세 명의 아이까지 낳지요. 그 중 두 아이는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지만, 둘째딸 코지마는 리스트를 열렬한 존경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1830~1894)의 아내가 됩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코지마는 훗날 남편 뷜로의 곁을 떠나 자신의 아버지보다 두 살 많은 바그너와 함께 삽니다. 이렇듯 상궤를 벗어난 예술가들의 열애는 당대 유럽 사회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근대와 계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자유를 향한 희구와 낭만적 방랑,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표출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불꽃은 유한한 것일까요?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은 1844년에 결별합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세 아이를 낳은 다음부터 점점 사랑이 식어갔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파리 예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두 사람의 열애는 그렇게 끝납니다. 10년을 채 넘기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후 리스트는 많은 여자들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정확히 말해 1847년에 리스트는 두 번째 운명의 여인과 조우합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귀족이었던 카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리스트의 두 번째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는 키예프를 찾아온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한눈에 반해 버렸던 모양입니다. 남편과 별거 중이던 그녀는 리스트가 있는 독일 바이마르까지, 그 머나먼 길을 딸까지 데리고 달려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막강한 낭만’이 존재했던 시절이지요. 그 용감한 여인은 ‘파리 사교계의 꽃’이었던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백작 부인은 장미처럼 화려했지만,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지성과 교양이 넘치는 차분한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자, 그렇게 새로운 사랑을 만났던 바로 그 무렵에 리스트는 3곡의 가곡을 씁니다. <테너 또는 소프라노를 위한 3개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1곡 ‘고귀한 사랑’(Hohe Liebe), 2곡 ‘가장 행복한 죽음’(Seliger Tod), 3곡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O lieb, so lang lieben du kannst)를 작곡한 것이지요. 시인 프라일리히라트(F. Frailigrath)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입니다. 그리고 리스트는 3년 뒤인 1850년에 이 세 곡의 가곡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해 ‘3개의 녹턴’이란 제목을 붙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세번째 곡인 ‘녹턴 3번 A플랫장조 op.64-3’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리스트의 작품 가운데 ‘헝가리안 랩소디 2번’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사랑의 꿈’(Liebestraum)이라고 불리지요. 하지만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원래의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입니다. 리스트가 두 번째 사랑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가사를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사랑할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시간이 오리라, 시간이 오리라 /그대가 무덤 옆에서 슬퍼할 시간이 찾아오리라”
p.s.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명연을 국내 매장에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인 듯합니다. 추천음반 목록에 올릴 수 없어 아쉽습니다.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조르쥬 치프라의 1956년 녹음은 강렬한 개성이 넘치는 압도적인 명연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지나치게 과도해지는 강렬함 때문에 추천음반 목록에서는 배제했습니다. 이번 주의 추천음반은 2종을 올려놓겠습니다.
글/문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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