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11-05 17:53 최종수정 2009-11-05 19:45
무대는 텅 비었다. 단지 의자 몇 개가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무대 바닥에 놓여 있다. 그리고 스무개 남짓한 촛불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가볍게 일렁인다. 그게 전부다. 연출가 김낙형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듯이, 의자는 ‘권력’의 상징이며 촛불은 ‘흔들리는 내면’의 암시. 하지만 이런 식의 오브제 설정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이 진부한 설정이 과연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인가. 그것이 연극 <맥베드>의 숙제 가운데 하나일 터다.
다행스럽게도 여덟명의 배우들이 “멕베드, 맥베드, 맥베드…”를 의미없는 구음(口音)처럼 되뇌이면서 무대 위로 등장하는 순간, 70%를 암전시킨 어두운 무대는 묘한 빛을 튕기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몸짓과 소리·대사가 느릿하게 섞이면서,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오브제가 점점 더 선명하게 힘을 얻는다. 배우들은 의자를 쌓아올렸다가 허물고, 손으로 돌리다가 무대 바닥을 마찰시키면서 멀찌감치 밀어낸다. 때로는 손으로 무대 바닥을 거칠게 긁기도 한다. 그 몸짓과 소리가 일렁이는 촛불과 한데 어울리면서 만들어지는 풍경은, 일종의 제의(祭儀)처럼 어둡고 신비하다.
물론 그 ‘제의적 긴장감’은 약간 불편하다. ‘나’는 어느 밀교집단의 비밀스러운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앞으로 90분가량 펼쳐질 이 연극이 어쩌면 스스로를 고문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객석으로 번진다.
그리고 예감은 별로 빗나가지 않는다. 어느 날 ‘괴상한 환영들’로부터 “왕이 되실 분”이라는 계시를 받은 맥베드는 자신의 가슴에 점점 또아리를 트는 권력에의 욕망으로 괴로워한다. 그 시커멓게 꿈틀대는 탐심을 아내인 레이디 멕베드가 젖가슴을 드러낸 채 부채질하고, 결국 멕베드는 손에 피를 묻혀가며 왕위를 찬탈한다. 하지만 선인도 악인도 아닌 그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떤다. 죽은 왕의 환영을 보거나 환청에 시달리면서 “제발 잠을 자고 싶다”고 외친다. 그 일련의 과정은 조금의 쉼표도 허락하지 않은 채 긴박하고 탱탱하다. 그리고 동시에 터져나오는 여러 층위의 언어. 무대 위의 배우들은 주술적이고 잠언적인 대사를 토해내다가 일상적이고 산문적인 언어를 뒤섞는다. 덕분에 관객은 머리가 때때로 띵하지만, 이 역시 “쉽게 가지 않겠다”는 연출가 김낙형의 고집일 터.
만일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찢어발긴 그의 해체가 단지 ‘새롭게 보여주기’에만 머물렀다면 이 연극은 크게 언급할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낙형의 <맥베드>는 후반으로 갈수록 원전과 거리를 드러내면서 ‘의미의 재구성’으로 나아간다. 두 눈을 뽑힌 채 광야로 홀로 쫓겨난 맥베드. 그는 “너는 누구냐”고 외치며 드디어 ‘괴상한 환영들’과 대결한다. 맥베드를 유혹해 왕을 살해하게 만들고 “여자의 몸에서 난 자로 맥베드를 해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면서 욕망을 부추겼던 그 환영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새로운 <맥베드>의 비밀스러운 코드는 바로 그 마지막에서 드러난다.
저예산 수공업의 한계 속에서 이뤄낸 눈물겨운 성취와도 같은 연극. 지난달 20일 폐막한 제21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의 대상 수상작이다. 이달 29일까지 대학로 76스튜디오. (070)7664-8648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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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텅 비었다. 단지 의자 몇 개가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무대 바닥에 놓여 있다. 그리고 스무개 남짓한 촛불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가볍게 일렁인다. 그게 전부다. 연출가 김낙형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듯이, 의자는 ‘권력’의 상징이며 촛불은 ‘흔들리는 내면’의 암시. 하지만 이런 식의 오브제 설정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이 진부한 설정이 과연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인가. 그것이 연극 <맥베드>의 숙제 가운데 하나일 터다.
다행스럽게도 여덟명의 배우들이 “멕베드, 맥베드, 맥베드…”를 의미없는 구음(口音)처럼 되뇌이면서 무대 위로 등장하는 순간, 70%를 암전시킨 어두운 무대는 묘한 빛을 튕기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몸짓과 소리·대사가 느릿하게 섞이면서,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오브제가 점점 더 선명하게 힘을 얻는다. 배우들은 의자를 쌓아올렸다가 허물고, 손으로 돌리다가 무대 바닥을 마찰시키면서 멀찌감치 밀어낸다. 때로는 손으로 무대 바닥을 거칠게 긁기도 한다. 그 몸짓과 소리가 일렁이는 촛불과 한데 어울리면서 만들어지는 풍경은, 일종의 제의(祭儀)처럼 어둡고 신비하다.
물론 그 ‘제의적 긴장감’은 약간 불편하다. ‘나’는 어느 밀교집단의 비밀스러운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앞으로 90분가량 펼쳐질 이 연극이 어쩌면 스스로를 고문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객석으로 번진다.
그리고 예감은 별로 빗나가지 않는다. 어느 날 ‘괴상한 환영들’로부터 “왕이 되실 분”이라는 계시를 받은 맥베드는 자신의 가슴에 점점 또아리를 트는 권력에의 욕망으로 괴로워한다. 그 시커멓게 꿈틀대는 탐심을 아내인 레이디 멕베드가 젖가슴을 드러낸 채 부채질하고, 결국 멕베드는 손에 피를 묻혀가며 왕위를 찬탈한다. 하지만 선인도 악인도 아닌 그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떤다. 죽은 왕의 환영을 보거나 환청에 시달리면서 “제발 잠을 자고 싶다”고 외친다. 그 일련의 과정은 조금의 쉼표도 허락하지 않은 채 긴박하고 탱탱하다. 그리고 동시에 터져나오는 여러 층위의 언어. 무대 위의 배우들은 주술적이고 잠언적인 대사를 토해내다가 일상적이고 산문적인 언어를 뒤섞는다. 덕분에 관객은 머리가 때때로 띵하지만, 이 역시 “쉽게 가지 않겠다”는 연출가 김낙형의 고집일 터.
만일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찢어발긴 그의 해체가 단지 ‘새롭게 보여주기’에만 머물렀다면 이 연극은 크게 언급할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낙형의 <맥베드>는 후반으로 갈수록 원전과 거리를 드러내면서 ‘의미의 재구성’으로 나아간다. 두 눈을 뽑힌 채 광야로 홀로 쫓겨난 맥베드. 그는 “너는 누구냐”고 외치며 드디어 ‘괴상한 환영들’과 대결한다. 맥베드를 유혹해 왕을 살해하게 만들고 “여자의 몸에서 난 자로 맥베드를 해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면서 욕망을 부추겼던 그 환영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새로운 <맥베드>의 비밀스러운 코드는 바로 그 마지막에서 드러난다.
저예산 수공업의 한계 속에서 이뤄낸 눈물겨운 성취와도 같은 연극. 지난달 20일 폐막한 제21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의 대상 수상작이다. 이달 29일까지 대학로 76스튜디오. (070)7664-8648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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