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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덧없는 만남과 이별… 그저 바라보며 느껴라

기사입력 2009-12-17 17:53 | 최종수정 2009-12-18 10:51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연극이 가끔 있다. <바람의 정거장>이 딱 그렇다. ‘침묵극’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연극의 무대는 전후좌우로 툭 트였다. 바닥에는 흰 모래가 가득 뿌려졌고, 둥글고 커다란 관들이 이리저리 엇갈려 놓여 있다. 그 ‘둥근 모양’은 얼핏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지만, 배우가 그 위를 걷는다는 것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 단순하고 넓은 무대는 버려진 놀이터 같기도 하고 황량한 사막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모래들이 일시에 몸부림치며 날아오를 것 같다. 어쨌든 그것은 ‘너’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과거로부터의 시간과 기억을 온전히 끌어안은 ‘지금 이곳’이다.

그 속에 갖가지 오브제들이 펼쳐져 있다. 이를테면 고장난 냉장고와 재봉틀, 낡은 세숫대야와 플라스틱 양동이 같은 것들이 약간은 흉물스러운 자태로 벌판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우리와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하다가 어느날 기억의 밑바닥으로 폐선처럼 가라앉은 사물들. 그것들이 다시 ‘아련한 풍경’으로 떠올라 침묵 속에서 어떤 신호를 보낸다. 어린 시절 변두리 구멍가게에서 볼 수 있었던 뱀피리는 동심과 축제의 기억을 일깨운다.

그리고 배우들의 손에 너나 없이 들려 있는 크고 작은 가방과 보따리들. 이 무겁거나 가벼운 ‘짐’들이야말로 <바람의 정거장>에서 가장 힘있고 지속적인 오브제로 보인다. 돌이켜보자면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짐들은 공연 내내 배우들의 몸과 하나가 돼 움직이면서, 버릴 수 없는 ‘어떤 숙명’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짐진 자들은 모두 익명의 존재다. ‘바람의 정거장’에 모여든 18명은 그저 a, b, c, d로 명명된 채 황량한 무대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걷고, 섹스하고, 먹는다. 어떤 이는 공연 내내 모래바닥 위에 그저 누워 있고, 또 다른 이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먼 곳을 응시한다. 움직임은 한없이 느리고 대사는 한마디도 없다. 몽환적 느낌의 미니멀 음악이 반복될 뿐. 피아노 한 대에 가끔 바이올린이 ‘뜻밖의 에피소드’처럼 끼어든다.

목적지 없이 유영하는 삶. 어떤 이들은 만나서 갈등하다 헤어지고, 어딘가에서 왔다가 어디론가 금세 떠난다. ‘관계’는 지속적이지 않으며 한 장의 사진처럼 그저 기억 속에 저장될 뿐이다. 이에 대해 연출가 김아라는 “삶은 거대하기보다 오히려 소소하고 유한하며, 관계 속에 놓여 있어도 각자는 소외된 개인일 뿐”이라고 했다.

연극의 마지막 무렵, 모래 위에 영상으로 투사되는 물고기들의 유영은 아름답고 신비하며, 무거운 짐을 진 부부는 한없이 느리게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어간다. 삶은 그렇게 계속되고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느리디 느린 침묵극 <바람의 정거장>은 결국 한 편의 시와 같은 비의(秘儀)와 암시로 막을 내린다. 연출가는 이 어려우면서도 쉽고,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연극에 대해 “의미와 논리로 해석하기보다 그저 바라보면서 느껴달라”고 주문했다. 20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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