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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풍성한 풍자, 아쉬운 촌철살인…연극 '비언소'

기사입력 2010-02-17 17:30 | 최종수정 2010-02-18 11:05



비언(蜚言)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은 ‘이리저리 퍼뜨려 세상을 현혹하게 만들거나 아무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언소(蜚言所)’라는 만화적 조어를 굳이 해석하자면, 비언이 횡행하는 장소를 일컫는 것일 테다. 빨리 발음하면 모음 축약이 일어나 ‘변소’가 된다. 연극 <비언소>는 그렇게, ‘마려운’ 인간들이 너나없이 드나드는 공중변소를 무대로 삼았다. 무대 오른쪽에 출입구, 뒤쪽에 이른바 ‘똥칸’이 네 개 놓여 있다. 남자용 소변기는 객석을 향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지난 5일 막올린 <비언소>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연극이다. 공중변소를 배경으로 27개의 장면이 숨가쁘게 교차하면서, 온갖 말들이 메뚜기처럼 튀어오르고 날개 달린 바퀴벌레처럼 붕붕거린다. 게다가 그 말들은 이미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말들이다. 이를테면 첫 장면은 ‘내복 예찬’이다. 핸드 마이크를 든 ‘남배우1’이 “아, 아, 행정안전부에서 국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내복을 착용하면 저탄소 녹색성장 사회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또 공중변소에서는 난장판 같은 문화 포럼도 벌어진다. ‘권력’이라는 이름의 참석자가 자신에게 항의하는 ‘감독’을 향해 “당신은 세뇌당한 거야”라고 소리치면서 “나는 뮤지컬 돈키호테 주제가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사는 현실 속의 문화관광부 장관이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를 차용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을 잡고…. 나는 돈키호테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나는 꿈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비언소>는 그렇게 횡설수설의 비언을 굴비처럼 엮어가면서 욕망과 허위가 판치는 세상, 정치 권력의 자화자찬과 우격다짐을 향해 ‘똥침’을 날린다. 하지만 작가 겸 연출가 이상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끝없이 펼쳐내는 에피소드의 프레임이 너무 넓은 탓에, 촌철살인의 풍자보다 한바탕 소동극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천주교 사제쯤으로 짐작되는 배우가 무대에 올라 “157개 대학 총학생회장은 다 빨갱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주사파”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약처럼 보인다. 박정희 시절의 10월 유신이 오버랩되고, 배우들이 랩을 선보이는 장면도 신랄한 풍자에 오히려 균열을 새긴다.

요란한 말의 홍수와 빠른 장면 전환 속에서,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를 암시하는 이는 다름 아닌 청소부 아줌마다. ‘비언소의 여왕’으로 명명된 그녀는 연극이 막판으로 돌입하자 “변소에서 떠드는 놈들”에게 무지하게 화를 내면서 쓰레기통 두 개를 양발차기로 엎어버린다. 찌그러진 깡통들, 오물 묻은 휴지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결국 무대는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쓰레기장. 도처에 널린 저 쓰레기들을 어떻게 치운단 말인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 대책 없는 막막함 속에서 반짝이 드레스를 섹시하게 입은 배우가 ‘부용산’을 부른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도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그것이 바로 황당하면서도 처연한 <비언소>의 마지막 장면이다. 얼핏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광란의 사랑>의 마지막을 연상시킨다. 마녀적 광기와 이유 없는 폭력이 피를 튀기며 난무했던 그 영화에서, 린치가 마지막에 들려준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였다. 5월2일까지, 아트원 차이무소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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