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객석에서

탄탄한 대본·배우의 열연…연극 ‘에이미’

기사입력 2010-02-10 17:43 | 최종수정 2010-02-11 00:47



<에이미>는 한마디로 ‘연극의 정석(定石)’이다. 부드럽고 깔끔하다. 연출가 최용훈은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해어(David Hare·63)의 대본을 성실하고 겸손하게 무대 위에서 펼쳐놓았다. 그래서 이 연극의 미덕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해졌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두 가지, 바로 탄탄한 대본과 배우들의 열연이다.

극작가 해어는 <철도> <유다의 키스> 같은 연극으로 한국에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눈매가 선량해 보이는 이 극작가는 현재 영국 국립극단의 부예술감독. 그는 1960년대부터 연극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는 ‘사회적 논평’으로서의 연극을 주로 써왔다. 언론과 종교에 대한 풍자, 정치권력과 결탁한 금융자본의 부도덕성 등을 치밀하고 밀도 있는 언어로 비판해왔다. 2년 전 한국에서도 선보였던 <철도>는 공공 서비스 분야의 민영화와 이로 인한 사회적 폐해를 지적하는 연극. 그는 형식적으로는 전통적 극작술을 고수하는 보수성을 보여주지만, 극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해어의 연극은, 부드러움 속에 숨은 메스와 같다.

<에이미>에서도 마찬가지다. 연극의 기본적 구조는 ‘가족’이며, 갈등을 극명하게 증폭시키는 인물은 장모와 사위다. 장모 에스메는 연극배우. 그녀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등을 돌려버린다.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들이 점점 짓밟히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위 도미닉은 다르다. 그에게 연극은 “죽은 것”이다. “옛날엔 흥미진진했지만 그런 시절은 가버렸다”고 굳게 믿는다. 그는 장모에게 “(이제 연극은) 그저 자위행위”라며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강변한다.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부터 서로의 이질성을 직감한다. 그 예민한 대립각은 79년부터 95년까지, 그러니까 16년 동안이나 해소되지 않고 이어진다. 장모와 사위로 대표되는 신·구 세대의 갈등은 이 연극의 가장 굵은 기둥이다. 

해어의 독설은 3막에서 두드러진다. 점점 늙어가는 에스메는 로이드 증권에 전재산을 투자했다가 알거지가 된다. 남은 것은 날마다 날아오는 빚 독촉장뿐이다. 에이미는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엄마에게 “(그 인간들은) 매너 있는 척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기꾼, 깡패랑 다를 게 없다”며 격분해 외친다. 결코 엄마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가득찬 에이미는 3막에서 불안하고 과격한 모습을 보인다. 그 불안한 광기 속에는 엄마가 반대했던 결혼, 하지만 결국 이혼에 이르고 만 자신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리고 머잖아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전조(前兆)가 묻어난다.

마지막 4막에서 에스메와 도미닉은 재회한다. 사위는 이제 성공한 영화감독이다. 늙은 장모는 웨스트엔드의 허름한 소극장에서 연극을 준비 중이다. 그들의 재회는 16년 전의 첫만남처럼 여전히 팽팽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결국 화해에 이르는 장모와 사위. 그것은 자칫 극 전체를 지탱해온 긴장감이 일시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결말이었지만, 연출가 최용훈은 일체의 설명적 무대를 걷어내고 검은 천과 몇 개의 조명만으로 ‘이심전심의 화해’를 긴장감 있게 이끌어낸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 마지막 장면을 연극의 클라이막스로 기억하게 만든다. 에스메 역을 맡은 윤소정의 흔들림 없는 열연, 시어머니 이블린 역의 백수련과 프랭크 역의 이호재가 보여주는 노련한 능청스러움, 도미닉 역을 맡은 김영민의 정직하고 투명한 연기도 볼 만하다. 에이미 역의 서은경은 폭발적인 열연을 선보였지만, 3막에서 다소의 뺄셈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2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