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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연극 '악당의 조건'...웃기고 슬픈 하류인생의 초상

경향신문 문화면에 '객석에서'라는 간판을 달고 처음 게재했던 리뷰다. 하지만 나는 이 코너에 고작 다섯 편의 리뷰밖에 쓸 수 없었다. 회사의 명(?)을 받아 문화부장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자라기보다 관리직에 가까운 자리였고,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일을 하는 내내 좀 괴로웠던 같다. 물론 그걸 원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아무리 봐도 난 데스크보다는 기자가 더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 코너는 김희연 등의 후배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잘 이어줬으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2008년 6월 취재현장으로 되돌아왔고, 지난해 10월부터 기존에 맡아왔던 음악에 더해 연극까지 담당하게 됐다. 오랫만에 연극판으로 돌아와 '객석에서' 코너로 처음 출고했던 기사는 김낙형이 연출한 '멕베스'였다. 


기사입력 2006-06-25 19:21 | 최종수정 2006-06-25 19:21


철없던 시절엔 누구나 ‘꿈’을 꾼다. 하지만 돈 없고 ‘빽’ 없는 하류인생에게 꿈의 유효기간은 너무 짧다. 대학로 소극장 축제에서 공연중인 ‘악당의 조건’(장우재 극본·김광보 연출)은 어느 하류인생의 짓밟힌 꿈, 이렇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악당이 돼 폼나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마지막 몸부림을 그린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소망하는 ‘처절한 꿈’마저 그의 차지는 아니다. 이 연극은 그렇게, ‘없는’ 놈은 악당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프면서도 웃기게’ 보여준다.

어느날 주인공 태식은 아내에게 툭 내뱉는다. “나 오늘부터 킬러 할란다.” 그러자 아내의 입에선 거침없이 “××놈” 소리가 튀어나온다. 거친 악다구니. 하류인생들의 삶이란 늘 그렇다.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더 눈물겹다. 술집 여자 영희와 서울로 ‘튄’ 태식은 전화기 수리를 하면서 알콩달콩 살 꿈에 부풀고, 영희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에게 먹갈치를 구워주기 위해 낮이나 밤이나 인형을 꿰맨다. 그래서 관객은 두 사람의 거친 설전(舌戰)에 오히려 마음이 젖는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삶의 ‘극단’에 서 있다. 주인공 태식의 오랜 친구이자 비열한 사채업자에 조폭 두목인 길남,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다하는 영감, 뒷골목 하수인이지만 검정고시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종길, 그밖에 건달과 삐끼 등이 연극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인물들은 각자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를 걸죽하게 구사하며 톡톡 튀는 연기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자칫 오락프로처럼 산만해질 수 있는 개인기 경연장. 하지만 연출가 김광보는 ‘진실한 연기’를 강조하며 오버 액션과 가짜 연기를 걸러냈다. 그래서 이 연극은 ‘품위있게’ 재미있다.

‘악당의 조건’을 관람한 대학로의 또 다른 연출가 김정숙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뛰어나다”고 평했다. 특히 주인공 태식을 연기하는 윤영걸은 과장과 절제의 아슬한 접점에서 외줄을 타고 논다. 덕분에 관객은 그에게서 눈을 떼기 어렵다. 여주인공 영희를 맡은 김지성도 ‘악다구니’와 ‘순애보’ 사이를 잰 걸음으로 오가며 여운있는 감동을 이끌어낸다. 너나없는 하류인생, 그 속에서 피어나는 ‘술집년’과 ‘백수건달’의 사랑. 연극의 본령이랄 수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김광보 연출이 창출한 ‘리듬’은 단순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그 리듬은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에도 끊기지 않는다. 무대를 80%만 암전시키고 배우들이 직접 세트를 이동시키는 짧은 순간, 어슴푸레 보이는 움직임과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도 이 작품의 맛깔스러운 조미료다.

하지만 작가 장우재는 이 작품을 좀더 손봐야 할성싶다. 1960~70년대에서 빌려온 듯한 ‘사랑’은 21세기에 왠지 생경하고, 극의 초반에 주역급으로 등장했던 ‘길남’은 중반 이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또 너무 잘게 쪼개놓은 숱한 장면들은 시나리오를 연극으로 옮긴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7월9일까지.

〈문학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