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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나는 정말 나일까…연극 ‘꿈속의 꿈’

극작가 장성희는 참 사려깊은 후배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극작가 장성희, 연극평론가 장성희에게도 나는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종종 그에게 연극을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할 때가 있다. 공연 뒤 그와 나누는 뒷풀이 대화는 내 생각을 정리해나가는 데 늘 도움이 돼주곤 한다. 그런데도 정작 나는 극작가 장성희의 작품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심했던 모양이다. 정말 미안하게도, <꿈속의 꿈은>은 내가 처음으로 본 그의 작품이다. 

감상평? 아무리 냉정하게 보더라도 최근 연극판에서 이만한 작품을 만나긴 쉽지 않다. 인간적으로든 연극적으로든, 장성희에게서 늘 풍기는 은근한 향기가 연극 속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진중한 주제와 탄탄한 극적 구성, 게다가 의미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의 결합을 깔끔하게 성취해낸 의고체 대사들은 한마디로 나를 감탄케했다. 장성희는 그 숱한 '말'들을 다듬고 또 다듬어내느라고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그래서 나는 연극 <꿈속의 꿈>에 관한 리뷰를 고작 두시간의 노동으로 휘갈기면서, 그의 연극에 누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없었다. 


기사입력 2010-02-24 17:44 | 최종수정 2010-02-24 18:08 


 
망국 가야의 후손 김유신은 말한다. “가야의 못다한 국운을 신라를 통해 이루리라. 기생충이 뱃구레에 들어앉아 숙주를 조종하듯 내가 신라의 뱃속 깊이 들어앉아 신라를 내 뜻대로 몰고 가리라. 나 자신이 신라가 되리라.” 그리하여 그는 김춘추를 향해 운명의 시위를 당긴다. “성골이 아닌 진골 품계, 술이나 마시고 축국에 미쳐 있지만 곧 춘추의 시간이 온다”는 것을 훤하게 궤뚫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 <꿈속의 꿈>은 김유신의 야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때때로 광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야 권력을 향한 오라비의 사다리로 이용되는 두 동생의 희생과 갈등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유신의 카드는 언니 보희였다. 하지만 보희는 저항한다. “네 꿈을 이뤄주마”라며 속삭이는 오라비에게 “고만 두세요. 제 꿈은 제가 꾸겠습니다”라고 쏘아붙인다. 보희는 춘추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도 거기에 ‘정략’의 때가 묻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기회는 문희의 것이 된다. “서악에 올랐어.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어. 바람을 들이마셨더니 아랫배가 꽉 차올랐어.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었어. 오줌이 콸콸 저 아래 서라벌을 온통 잠기게 했어.” 문희는 언니에게 치마를 벗어주고 그 ‘이상한 꿈’을 산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른바 매몽설화(買夢說話). 그것이 연극의 모티브다. 작가 장성희는 그 설화 속에 숨은 진실, 오라비의 야망에 이용되는 두 여인의 어긋난 삶을 일단 연극의 전면에 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구조일 뿐이다. <꿈속의 꿈>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연극의 웅숭깊은 매력은 껍질 속에 숨었다. 보희의 ‘숨은 꿈’은 영원히 춘추였다. 춘추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보희가 “내 마음 묶어두었던” 춘추를 향해 작별을 고하는 순간, 춘추는 “그대는 내 꿈”이라며 절규한다. 오라비가 입혀준 날개옷을 입고 왕비 자리에 오른 문희도 마찬가지였다. 여인으로 최고의 자리를 꿈꿨던 그의 ‘숨은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름 없는 화랑 ‘미곤’이었다. 문희는 전장에 나갔다 주검으로 돌아온 미곤의 상여에 자신의 쪽빛 치마를 덮어주며 “당신은 내 꿈이었습니다”라고 오열한다.

욕망은 과연 ‘내 것’인가? 작가 장성희가 1500년 전의 인물들을 무대로 끌어올려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그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니다. 내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욕망은 결국 타자에 의해 강제되고 주입된 것일 뿐. 그래서 나의 정체성과 욕망 사이에는 어쩌지 못할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은 가면을 쓰고 그 위에 또 다른 가면을 쓰기도 한다. 이 연극이 묘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그렇다. 그래서 연극을 꼼꼼히 지켜본 관객은 ‘욕망하는 나여, 너는 정말 나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늙은’ 문희는 준엄하게 외친다. “사관은 적으라. 나 태종무열왕의 아내 문명왕후는 이른다. 나 상대등 김유신의 동생 문희는 이른다. 나 서현 각한의 딸 아지는 이른다. (내 아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법민이고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그것이 연극의 마지막이다. 모든 욕망을 다 이뤄낸 듯한, 마치 인생의 승자처럼 보이는 여인. 그가 마지막으로 교태를 부린다. 그러나 그것은 문희의 가면(假面)일 뿐. 2008년 서울연극제에서 대상, 희곡상, 연기상을 휩쓸었던 수작이다. 작가 장성희가 갈고 다듬은 의고체(擬古體) 대사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신동인 연출. 길해연, 홍성경, 장용철, 송현서 등 출연. 28일까지,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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