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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첼리스트 양성원, 설치미술가 배정완…음악과 빛의 만남

기사입력 2010-04-08 11:23  위클리경향

빛(Light)은 자신의 존재를 앞세우지 않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스스로를 보여 주면서 음악 그 자체 속으로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지난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대학로의 정미소소극장에서 펼쳐진 특이한 연주회. 첼리스트 양성원과 설치미술가 배정완이 ‘음악과 빛의 만남’을 시도한 이 연주회의 타이틀은 ‘소란’이었다. 첫곡으로 연주한 올리비에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 가운데 일곱 번째 곡 ‘시간의 종말을 알리는 천사를 위한 무지개의 소란’에서 따온 제목인 듯했다. 그러나 연주회는 결코 소란스럽지 않았다.


일단 공연장 로비에 대한 언급부터 해야겠다. 대개 연주회장 로비는 ‘사교장’에 가까운 법이다. 그러나 정미소소극장의 로비는 사교적 언사를 주고받기엔 지나치게 캄캄했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 로비의 어둠 속에서 서너 개의 빛 줄기가 바닥과 벽에 글을 새겼다. ‘세상의 꽃가지들 다 꺾이고 부러졌다/ …세상은 종말의 포연으로 가득 차고/ 눈발들 허공에 휘날리고/ 세상은 오직 핍박하는 자와 핍받당하는 자로 나뉘고/ 괴를리츠, 괴를리츠, 폴란드의 수용소/ … 봄날의 수선화와 나비들, 여름의 보라색 라벤더와 해바라기에 대한 기억들/ …검게 탄 사진첩 속에 남김없이 매장되었던/ 죽음을 연장받던 시간의 벼랑 끝, 그 직전.’ 시인 김경미가 이번 연주회를 위해 쓴 ‘메시앙, 메시아’라는 시다.

청중은 그렇게 어둑한 로비에서 메시앙의 4중주에 담긴 ‘역사성’을 언어로 먼저 만나면서 음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는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젊은 메시앙이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작곡해 함께 갇힌 동료 3명과 초연했던 곡이다. 그토록 엄혹한 현실 속에서 쓰인 이 4중주는 아이러니하게도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설치미술가 배정완은 로비에서 진행한 라이팅 작업에 대해 “일단 음악의 배경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라면서 “분리된 공간으로 인식돼 온 로비와 연주회장의 소통”이라고 답했다.

무대는 독특했다. 인간의 귓속같기도 하고 우주의 블랙홀같기도 한 나선형 구조물이다.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말하자면 그것은 빛의 그림을 펼쳐 보일 일종의 캔버스인 셈이었다. ‘음악을 빛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로비의 어둠과 대조적으로 밝은 색감을 능동적으로 펼쳐 보였다. 그 밝음은 메시앙의 음악에 이미 내재된 것. 빛은 나선형 구조물을 오르내리면서 들어왔다가 나가고 갈라섰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면서 메시앙이 희구한 ‘반복적 순환에서 영원으로’의 메시지를 형상화했다.

첼리스트 양성원, 피아니스트 김영호,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클라리네티스트 채재일로 이뤄진 4중주는 강렬한 음향보다 세밀하고 부드러운 조화를 추구했다. 1960년대 후반에 녹음된 피아니스트 미셸 베로프를 위시로 한 프랑스 연주자들의 음반(EMI)에 익숙한 귀에는 다소 밋밋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제된 앙상블’이야말로 이 연주회의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빛까지 가세해 마치 5중주처럼 구현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는 일체의 과장과 겉치레를 배제하고 진지하게 음악의 심연으로 몰입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 가운데에는 메시앙의 음악을 처음 들어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루해 하는 청중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문학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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