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해선 인터뷰했던 인물과 사진을 찍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차그로섹 선생에겐 인터뷰가 끝난 후 내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같이 히히 웃었다. 그는 멋진 70대였다. 실력을 갖췄으되 잘난 척하지 않았고, 자기 주장만 들이대는 완고함도 없었다. 그렇다고 뼈 없는 호인도 아니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상호 신뢰의 분위기에서 즐겁게 이뤄졌다. 물론 국립오페라단의 승미와 혜진이의 공이 컸다.
한국 초연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 지휘자 로타 차그로섹 인터뷰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한국 초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10월 1·3·5일이다. 어찌 보면 ‘역사적 초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공연을 앞두고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구르네만츠 역을 맡은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베이스 연광철(49)이다. 당연한 일이다. 또 한 명의 뉴스메이커는 한국땅을 처음 밟은 프랑스 태생의 연출가 필립 아흘로(65)다. 한국 초연 무대가 과연 어떤 스타일로 펼쳐질지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당연지사다.
한데 지휘자 로타 차그로섹(71)은 관심권을 벗어나 있다. 사실 그는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를 17차례나 지휘한 ‘바그너 전문가’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의 음악감독(1997~2006)과 베를린 심포니(2006~2011)의 상임지휘자를 지내며 쌓아올린 현지에서의 지명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게다가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작고한 윤이상(1917~1995)의 벗이었던 그는 윤이상의 구명 탄원에 앞장섰던 독일 예술가였으며, 윤이상으로부터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이라고 불리는 <무악>(1978)을 헌정받은 주인공이다. 추석 연휴 직전이었던 지난 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일흔을 넘긴 그는 장시간 리허설로 완전히 탈진한 모습이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셔츠가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하이든이나 슈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소년합창단원 출신이다. 1954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공연됐을 때, 열한 살의 당신은 극 중의 어린이 역할로 출연했다. 어떤 계기로 지휘자가 됐는가.
“아, 정말 옛날이다. 벌써 60년 전 이야기로군. 그 오페라 배역을 캐스팅한 인물은 다름 아닌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였다. 어린 나를 그가 직접 캐스팅했지(웃음). 그런데 알다시피 1954년은 그가 돌아가신 해 아닌가? 그렇게 오페라 프로덕션을 꾸려놓은 상태에서 건강 상태가 악화돼 지휘봉을 들 수 없었다. 그래서 푸르트뱅글러가 게오르그 솔티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어린 나는 솔티의 지휘로 <마술피리>를 마흔 번쯤 공연했다. 가장 많이 했던 곳은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솔티의 지휘는 정말 에너지가 넘쳤다. 어린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다.”
-한국에는 푸르트뱅글러를 좋아하는 음악애호가들이 여전히 많다.
“애석하게도 잘츠부르크 공연을 여섯 달쯤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지휘자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넘버 원이다. 카라얀은 아니다.”
-솔티에게 영향을 받아 지휘자의 꿈을 꿨다고 했는데, 당신의 음악적 입장이나 해석, 지휘 스타일은 솔티와 많이 다른 듯하다.
“그렇다. 내가 솔티에게 받았던 영향은 지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다. 그 이상은 아니다.”
-나치 시절에 이른바 ‘퇴폐음악’(Entartete Musik)이라는 게 있었다. 말하자면 나치가 정치적으로 금지했던 음악들인데, 당신은 상당히 오랜 세월 그 시절의 퇴폐음악을 다시 발굴해 레코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 시절에 사라졌던 음악을 되살리는 것은 나의 의무였다. 음악인 이전에 독일인으로서 의무! 나는 그 곡들을 찾아내기 위해 악보출판사의 먼지 가득한 창고를 오래 뒤져야 했다. 그렇게 발굴해 레코딩을 한 다음부터, 독일 곳곳에서 그 음악들이 실제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신은 바그너 음악을 오래 지휘해왔는데, 바그너는 실제로 인종차별적 관점을 가졌던 사람 아닌가? 그래서 호불호가 엇갈리는 논쟁이 있어 왔다.
“음…, 바그너는 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저술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인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사람 자체만 보자면 분명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해한다. 인간 바그너는 어리석은 사람, 참으로 용납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자체는 세계가 누릴 수 있는 ‘예술적 팩트’ 아닌가? 당신이 내게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도 확실하게 대답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저술뿐 아니라 오페라 자체에는 인종차별적 태도가 없다고 보는가?
“음…, 연출가가 바그너 오페라에서 그 지점을 찾으려 한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인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요소 말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연출가들은 바그너 오페라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은 단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단어는 어떤 지시적 의미를 분명하게 도출하지만 음악은 그렇지 않다.”
-이번이 두번째 내한이다. 첫 내한연주회는 공교롭게도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잊을 수 없다. 한국 대통령이 죽은 날이었으니까. 나는 8시에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회장이 어디였는지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오래 됐다. 다만 호텔방에 사흘간 갇혀 있었던 것은 기억이 선명하다. 통신도 두절된 상태였다. 왜 나를 그렇게 감금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윤이상의 친구였기 때문일까? 사흘 뒤에야 비행기를 탔는데, 자카르타와 방콕, 타이페이를 거쳐서 간신히 프랑크푸르트로 귀환했다. 이곳에 와서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놀라운 일이다. 아버지 같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이상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독일 북부의 키일(kiel)이라는 도시에서 나는 합창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때 상임지휘자가 윤이상에게 오페라 작곡을 부탁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유령의 사랑>이었다. 키일에서 초연했다. <파르지팔>처럼 합창이 많이 들어가는 작품이어서 나는 윤이상과 자주 얘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좋은 친구였다. 몇년 후에 <무악>을 나에게 헌정했다. 악보 머리에 정성이 깃든 편지를 써서. 나는 지금도 그 악보와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그의 음악이 많이 연주되지 않아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에서 처음 공연되는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대해 지휘자로서 언급한다면?
“모든 유작은 걸작이다. 바흐도 베토벤도 그랬다. <파르지팔>도 위대한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거기에는 한 예술가의 삶과 생각이 함축돼 있다. 게다가 <파르지팔>은 음악 자체가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말하고 있다. 극적인 상황이든 인물의 성격이든! 오케스트라에게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하모니가 많이 등장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마음을 맡기고 들으면 되는 음악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으면 바그너를 듣기 힘들어진다(웃음).”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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