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만난 음악가

백건우... 청춘의 선율 슈베르트

젊은 연주자들과의 인터뷰는 좀 힘들다. 답변이 짧고 추상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인터뷰 기사의 재미는 디테일에서 나온다. 깨알같은 팩트가 살아 있어야 독자에게 흥미를 줄 수 있는 기사가 만들어진다. 장강노도처럼 보이는 굵직한 스토리도 결국은 작은 사실들이 하나 둘씩 모여 이뤄진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이 지긋한 연주자들을 인터뷰 하는 편이 훨씬 낫다. 예컨대 백건우와의 인터뷰가 그렇다. 나는 이미 백선생을 너댓번쯤 인터뷰했는데, 이제 우리의 인터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통해 어떤 최종적 결론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즐거운 대화에 가깝다. 남들이 보기엔 시시덕거리며 노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난 9월 초에 이뤄진 인터뷰도 그랬다.    

 

 

 

‘청춘의 선율’ 슈베르트로 무대 오르는 백건우

31세에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의 음악은 ‘영원한 청춘의 선율’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피아니스트 백건우(67)는 왜 슈베르트를 꺼내 들었을까.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수박 겉 핥는 연주가 싫어서” 일정 기간 한 작곡가의 음악만을 깊숙이 파고드는 스타일이다. 2007년 베토벤 소나타 전곡, 2011년 리스트 시리즈 등은 백건우의 그런 기질을 보여주는 최근의 작업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슈베르트를 향한 몰입은 없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지난 40여년간 궤적을 웬만큼 알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궁금하다.

지난 3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백건우는 “사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은 내 20대를 완전히 매혹시켰던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6일부터 펼쳐지는 백건우의 슈베르트 연주회는 “추억의 사진을 다시 들춰보는 일”에 가깝다. 슈베르트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쓰인 음악들, ‘4개의 즉흥곡’과 ‘악흥의 순간’, ‘3개의 피아노 소곡’ 등을 연주한다.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같은 곡들을 수록한 음반도 함께 내놨다. 음반 겉면에 실린 ‘청년 백건우’의 흑백사진이 왠지 아련하다. “몇 살 때 사진이냐?”고 묻자 그는 옆에 앉은 아내(윤정희)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 사람이 찍은 사진입니다. 결혼 직후죠.” 아내가 부연했다. “결혼하고 1년 뒤에요. 1977년!”

 

배우 윤정희가 찍은 백건우. 1977년.

 

 

▲ 슈베르트 음악의 매력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선율

6일부터 추억 깃든 연주회… 같은 곡 수록한 음반도 내놔


- 20대 시절에 슈베르트 음악에 그토록 매혹됐는데도, 그동안의 연주 프로그램에서 슈베르트를 찾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음반도 없지 않았나요.

“음… 사실 음반이 딱 하나 있었어요. 스물다섯 살쯤에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인 ‘B플랫장조 D.960’을 녹음했죠. 긴 곡이잖아요? 저는 1악장 반복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21분 동안 연주했어요. 그렇게 딱 한 곡만 음반에 담았죠. 다른 곡은 함께 수록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음반은 독일에서만 유통됐어요. 말하자면 희귀음반이 됐죠. 사실 슈베르트는 제가 20대 시절에 가장 즐겨 연주했던 레퍼토리 중 하나였습니다.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가 ‘슈베르티아데’라는 음악회를 열었는데, 슈베르트 곡만 연주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음악회 1부에서 제가 헤르만 프라이를 반주했고 2부에서는 ‘B플랫장조 D.960’을 연주했죠.”

- 슈베르트 음악의 매력은 뭘까요.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이겠죠. 훌륭한 멜로디가 수없이 흘러나와요. 베토벤은 한두 음을 변형시켜가면서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위대한 대작을 만들었지만, 슈베르트는 멜로디 자체가 거침없이, 마치 물 흐르듯이 흘러나오죠. 머리보다는 가슴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입니다. 사람이 써낸 음악이 아닌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열다섯 살에 미국 줄리아드 음대로 건너가 로지나 레빈을 사사한 이후 여러 명의 피아노 스승을 거쳤다. 그중에는 독일 출신의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1895~1991)도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로 20세기 피아노 음악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긴 거장이다. 물론 켐프의 레퍼토리 중에서 슈베르트의 소나타도 빠질 수 없다. 백건우는 자신이 20대 시절에 슈베르트에 매혹됐던 이유로, 바로 스승의 집에서 직접 들었던 ‘그 연주’를 꼽았다.

“저한테 정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죠. 이탈리아 포시타노에 그분의 집이 있었어요. 제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선생의 집에서 베토벤을 배우던 시기가 있었죠. 물론 저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선생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가르침을 받았죠. 그런데 어느날 저녁이었어요. 켐프 선생께서 제자들 앞에서 짧은 독주회를 펼치셨는데, 그때 연주한 곡이 아까 얘기했던 슈베르트의 소나타 ‘B플랫장조 D.960’이었어요. 해가 지고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는데 불도 켜지 않고 연주하셨죠. 저는 테라스에 앉아 그 연주를 들었어요.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지요. 나중에 켐프 선생께서 그 곡을 음반으로 녹음하시기도 했는데, 제가 그날 저녁에 들었던 연주만 못했어요.”

 

사진작가 신창섭

 


백건우는 몇해 전 스승의 집을 찾았을 때, 집안의 물건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찡했다고 했다. 그때도 역시 아내가 동행했다. “여보 그게 언제였지?”라고 묻자 “4년이 조금 넘었어요”라고 아내가 답했다. “피아노도 그대로 놓여 있고 선생께서 쓰시던 가방까지 그 자리에 그냥 놓여 있었어요.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를 기리는 ‘포시타노 음악제’에 초청받아서 그곳에 갔었는데, 저는 선생의 그 집에서, 생전에 쓰셨던 베크슈타인 피아노로 연습을 했어요.”

- 켐프 선생의 성품은 어땠나요.

“정말 인자한 분이죠. 사실 제가 큰 사고를 칠 뻔한 적이 있어요.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바다가 있는데, 켐프 선생과 저희는 머리를 식히러 종종 그 바다에 나가곤 했죠. 그날도 바다에서 선생은 수영을 하셨고, 저하고 친구 몇 명은 모터 보트를 탔어요. 그런데 핸들을 잡은 제가 조종이 미숙해서 선생을 거의 칠 뻔한 적이 있어요. 정말 아찔했죠.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그런데도 선생께서는 그냥 웃으셨어요.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손을 흔드셨죠. 그런 분이었어요. 딱 한번 화를 내신 적이 있죠. 제가 손목시계를 차고 연주하다가 된통 혼났습니다. 그런 걸 싫어하셨어요. 피아노 칠 때는 손이나 손목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거죠.”

음악은 경험과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어느날 저녁 빌헬름 켐프의 집에서 젊은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매료시켰던 슈베르트. 40년 만에 아름다운 청춘의 선율로 되돌아온 백건우는 6일 강동아트센터, 7일 여수 예울마루, 10일 대구 아양아트센터, 그리고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한다. 1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연주하면서 ‘나’를 내세우는 건 참 초라한 짓입니다. 켐프 선생한테 배운 것 가운데 하나죠. 나이가 들수록 그런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