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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음악가

한국 재즈의 거목(巨木) 이판근

오랫동안 미뤘던 숙제를 해낸 기분이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결국 못하다가, 급기야 까맣게 잊어버렸던 숙제였다. 그렇게 망각 속으로 흘러들어갔던 '이판근'이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시켜준 것은 자라섬의 예술감독 인재진과 재즈비평가 김현준이었다. 그들이 기획한 <이판근 프로젝트> 덕택에, 나는 그 백발의 노신사를 참으로 오랫만에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기자로서, 한때 음악의 전분야를 담당했던 적이 있다. 바하에서 판소리, 힙합까지 땅 위의 모든 음악이 '나와바리'였던 셈이다. 그때 나는 종종 재즈 기사를 쓰곤 했었는데, 공연장에서 가끔 마주쳤던 이판근 선생은 꼭 인터뷰를 하고 싶은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온통 백발에 다소 까다로워 보이는 눈매. 그것이 멀리서 바라본 이판근 선생의 첫인상이었다. 한데 나는 그의 깐깐한 풍모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한 끌림을 느꼈던 것 같다. 왠만해선 자기 얘기를 꺼내놓을 것 같지 않은 그의 입에서, 한국 재즈 반세기를 엿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슬몃슬몃 일었던 것이다. 

물론 주변에는 친절한 증언자들도 적지 않았다.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왕년에 말이야" 하면서 자신의 재즈 경력을 줄줄이 펼쳐놓으시던 어른들도 꽤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이판근 선생이야말로 경청할 만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주인공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를테면 좀더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내용을 그에게서 기대했던 것이다. 특히 기자촌에 있다는 그의 집. 나는 그곳을 꼭 찾아가보고 싶었다. 뒷편으로 삼각산 능선이 바라다보인다는 허름한 2층집. 아랫층에서는 세상을 먼저 떠난 부인이 문방구를 하면서 '뽑기' 같은 아이들 주전부리를 팔았고, 2층 한켠은 살림집, 또 다른 한켠은 이선생과 제자들이 재즈 수업을 했다는 곳. 당시의 나는 그 풍경을 다큐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에 떠올리면서, 그의 집을 찾아가 치러질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음 속으로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으른 기자였다. 악보와 서적, 음반과 각종 악기로 빼곡했다는 그의 기자촌 재즈 학당. 나는 결국 그곳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게다가 어느새 세월이 한 10년쯤 흘러가는 동안, 나는 재즈 뮤지션 이판근과 그의 집을 아예 까맣게 잊었다. 

지난해 여름,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이었다. 미술평론을 하는 선배와 뉴타운 개발로 붕괴된 기자촌을 찾았던 적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참담한 풍경이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무너진 집들의 잔해 사이로, 어린 아이의 운동화, 과자 포장지, 박살난 일가의 밥상, 누군가의 발을 따뜻하게 덥혀주었을 양말짝 같은 것들이 상흔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한데 나는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른 것 같은 기자촌 일대를 망연자실한 눈으로 더듬으면서도, 바로 그곳에 있었던 이판근 선생의 재즈 학당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이판근'이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인터뷰는 세 시간이나 진행됐지만, 이 선생의 얘기를 다 옮기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내년쯤 회고록이 출간된다고 하니, '이판근'이라는 앵글로 한국 재즈 반세기를 세밀하게 조명하고픈 이들에게는 그 회고록이 많은 참고가 되리라 여겨진다. 이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시간을 잡아주고, 이 선생과 딸 민영씨가 함께 살고 있는 고양동 아파트까지 동행해 준 재즈비평가 김현준에게 감사의 마음 말할 수 없이 크다.  



사람들은 그를 ‘재즈의 전설’이라 부른다

기사입력 2010-11-10 20:20 | 최종수정 2010-11-11 11:48



ㆍ재즈 편곡·작곡가로 50년간 3000여명 뮤지션 배출 이판근

“한국 재즈의 뿌리를 추적하다 보면 결국 만나는 인물.”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인재진 예술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재즈비평가 김현준도 비슷한 평가를 내놨다. “그를 빼놓고 한국 재즈를 말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누구인가? 바로 이판근(76·사진)이다. 지난 50여년간 한국 재즈의 중심에 서 있던 연주자이자 편곡자이자 작곡가. 아울러 3000명에 달하는 뮤지션들에게 재즈의 감성과 이론을 전해온 한국 재즈의 교사. 지난해 9월 뉴타운 개발로 철거되기 전까지, 기자촌 산동네에 자리한 그의 누옥((陋屋)은 재즈의 발신지였고 논장(論場)이었다. 그렇게 이 땅에 재즈의 씨를 뿌리고 가꿔온 그에게 후학들의 경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중순 가평에서 열린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서 그의 음악인생을 집약해 보여주는 프로젝트 무대가 펼쳐졌고, 최근에는 그를 향한 ‘음악적 오마주’를 표방하는 음반 ‘A Rhapsody In Cold Age’가 세상에 나왔다. 

30여년간 자신과 가족의 삶터이자 한국 재즈의 ‘공부방’이었던 기자촌 집을 잃은 그는 막내딸 민영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의 작은 아파트. 옛집을 빼곡히 채웠던 온갖 악보와 서적, 음반, 영상물, 악기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철거 풍파에 망실됐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보관 중”이라고 했다. 최근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는 그는 반세기를 넘긴 자신의 재즈 인생을 이렇게 털어놨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자랐죠. 아버지가 군수공장에서 일하셨는데 집에 유성기가 있었어요. 판들이 제법 많았죠. 클래식, 국악, 재즈 다 있었어요. 물론 일본 엔카도 있었고. 아버지 덕택에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음악이 있다는 걸 어릴 때 알았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죠.”

오사카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18일이 걸렸다고 했다. 대한해협을 강타했던 마쿠라자키 태풍 탓이었다. 어린 그는 가족과 경남 마산에 정착한 후에도 계속 재즈를 들을 수 있었다.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 방송을 통해서였다. 당시 6년제였던 마산상업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SP 음반까지 가세해 재즈를 향한 그의 호기심을 북돋았다.

“우리 연배의 재즈맨들은 다 독학이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죠. 그때 들었던 것이 ‘Blue Moon’, ‘Under the Apple Tree’, ‘Blue Sky’ 같은 곡들이죠. 일본 가수 핫토리 료이치의 노래를 포 프레시맨(Four Freshmen)이 재즈로 편곡한 곡도 들었어요. 중학생 시절부터, 판을 들으면서 음악을 악보에 옮기는 일에 완전히 빠졌죠. SP 표면이 하얗게 일어나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으면서 오선지에 옮겼어요. 내가 3학년 때 마산상중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뉘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서 알토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불었죠.”

밴드부 편곡 작업은 이판근의 몫이었다. 그는 마산의 양키시장에서 구한 음반들을 밤새 들으면서 글렌 밀러의 ‘In the Mood’, 토미 도시의 ‘Song of India’,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을 채보·편곡했고, 그것은 곧바로 마산상고 밴드부의 레퍼토리가 됐다. 이판근은 그렇게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에 연주자 겸 편곡자로 첫발을 내디뎠으니, 거기서부터 셈하자면 그의 재즈 인생은 어언 60년이다.
 

서울상대에 진학해서도 학업보다 재즈의 유혹이 컸다. 미군 부대는 대한민국 도처에 있었고 부대마다 클럽이 있었던 까닭이다. 클럽은 당연히 재즈 연주자를 필요로 했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덕분에 당시 개런티는 “하루 연주에 쌀 반가마니 값이었다”는 것이 이판근의 회고다. 한국전쟁 직후의 대학생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호화 아르바이트였던 셈이다.

“복잡한 청춘을 보냈어요. 낮에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을 일본어로 읽고, 저녁과 밤에는 미군부대에서 색소폰을 불었으니 말이죠. 학교에 알려지면 쫓겨날까봐 숨어다녔습니다. 그러다 베트남전이 발발하면서 미군부대의 숫자가 급감했어요. 아마 3분의 1로 줄었을 겁니다. 그 무렵부터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군 전용 클럽들이 생겼죠. 거기가 주무대가 됐어요. 그때 악기를 색소폰에서 베이스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85년에 모든 연주를 접었죠. 그때부터 편곡과 작곡, 레슨에만 전념했습니다.”



ㆍ30여년간 재즈 산실 ‘기자촌 집’ 뉴타운 개발로 철거

처음으로 ‘선생’ 노릇을 한 것은 미군부대 연주자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1959년이었다. 그는 “알토 색소폰 연주자 황천수가 첫 제자”라며 “연습장소는 반도호텔 옥상이었다”고 했다. 은평구 기자촌으로 들어간 것은 1977년. 아래층에 부인이 문방구를 차려 생계를 꾸렸고 위층은 살림집이자 재즈학교였다.

그 옹색한 공간을 거쳐간 연주자들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이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판근은 매우 단호하게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과 김수열”이라고 했다. “재즈의 예술성을 고수하는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찬사도 덧붙였다. 그러자 딸 민영씨가 아버지의 고집을 잠시 탓하더니 그간의 ‘피교육생들’을 줄줄이 소개했다. 물론 지면으로 다 거론하긴 힘들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로부터 중견까지 현재 활동하는 대다수 재즈 뮤지션들이 ‘기자촌 학당’을 거쳤다. 게다가 그 면면들은 재즈로 한정되지 않는다. 록그룹 사랑과평화의 최이철,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과 김종진, 포크 가수 박학기, 영화음악가 조성우를 비롯해 심수봉, 인순이, 윤수일처럼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가수들까지 기자촌을 거쳐갔다.

하지만 이판근의 삶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팍팍하다. 특히 노년의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30여년간 한국 재즈의 산실 역할을 해온 기자촌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의 제자들과 일부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재즈아카데미 보존 청원’ 운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구청과 건설회사는 여전히 ‘노 코멘트’ 상태다. 그는 세시간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마침내 한탄을 쏟아냈다. “그곳은 그냥 제가 살던 집이 아니라, 우리 재즈 뮤지션들의 추억과 땀이 깃든 곳이잖습니까? 그 무너진 잔해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참담해요.”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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