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례를 무릅쓰고 방문을 열었다. 애초에는 음반에 사인을 받으려던 것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짧막한 인터뷰로 이어졌다. 지난 28일 정오, 서울시향 음악감독실. 그러니까 원래는 정명훈 감독의 방인데 그는 북한 평양에 간 상태였고, 그날 이 방에서는 서울시향과 리허설을 막 끝낸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Gennady Rozhdestvensky, 1931~)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왠 놈이냐'는 듯이 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날 LP들을 보더니 금새 표정이 밝아졌다. 피차 초면의 긴장이 그렇게 풀렸다. 그는 편안하게 농담을 던져가며 내가 가져간 8장의 LP에 공들여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휙휙 날아가는 서명이 아니었다. 그는 사인 하나하나에 아주 꼼꼼하게 정성을 다했다. 맨 위에 'Mr. Moon'이라고 불청객의 이름을 먼저 쓴 다음,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써내려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그것이 이날의 인터뷰였다. 2년 전 돌아가신 내 부친보다 두 살 아래인 노장 지휘자. 그는 앞으로 얼마나 더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유럽, 미국, 일본, 이번에는 한국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지휘봉을 들고 있는 그에게 "육체적으로 좀 힘드시진 않은가?"라고 묻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10년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렇게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처럼 편하고 따뜻했다. 생면부지의 노년과 중년을 이어준 것은 물론 음악이었다. 그는 60년 넘게 지휘를 했고, 나는 소련 '멜로디아'의 음반이 국내에 수입되기 전이었던 80년대 초반부터 그의 음악을 들어온 애청자였던 것이다.
사진은 서울시향의 진영이가 찍었다. 아래 사진들도 다 마찬가지다.
로제스트벤스키가 1972년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해 녹음했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Winter Dreams' 뒷표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때 그는 약간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 연주는 정말 최고랍니다"하면서 노장에게 덕담을 건넸다. 그는 매우 흐뭇해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자신의 젊은 시절 얼굴이 표지에 담긴 음반을 들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그는 사인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유머와 위트를 구사해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다. 이 음반은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한 60년대의 연주다. 역시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이다. 앞서 언급한 차이코프스키 1번과 더불어 그의 수작(秀作)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교향곡의 광포한 야생성과 날카로운 해학을 로제스트벤스키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지휘자는 별로 없다. 그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수장을 맡아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키웠다. 당시 그는 지휘자로서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소련의 국력은 막강했다. 그 시절의 얼굴은 약간 날카로워 보인다.
나중에 사진들을 보다가 아주 코믹한 컷을 두 장 찾았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자신의 건강은 아직도 끄떡없다고 과시했을 때,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그의 부인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가 러시아어로 뭔가 타박을 줬던 것이다. 짐작컨대, '건강은 무슨, 맨날 골골하면서~'였던 것 같다. 그러자 로제스트벤스키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두 컷 연속이다.
부부는 이번에 함께 한국에 왔다.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는 로제스트벤스키의 아내이기 이전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여류 피아니스트였다. 이번에 사인을 받은 음반 중에는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 브람스의 피아노 연탄곡 '왈츠 op.39'도 있었다. 1975년 녹음이다. 빼어난 연주로 손꼽히진 않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음반을 좋아한다. 표지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매우 다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한때 청순한 외모를 자랑했던 포스트니코바도 이제는 많이 늙었다. 세월이 가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에는 사실 나도 함께 끼여 있었는데, 블로그에 올리면서 지웠다. 공연히 촛점을 흐리는 것 같아서.
포스트니코바의 요즘 모습을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이곳에 올려 놓는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피아노 위에는 모차르트의 악보가 놓여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로제스트벤스키 선생이 눈을 감아서 좀 아쉬운 사진이다. 아래 박스는 연주회 당일이었던 2월 29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로제스트벤스키와의 인터뷰 기사다.
그의 지휘 동작은 간결하고 소박했다. 가장 중요한 지휘봉은 ‘눈빛’이었다. 때로는 피에로처럼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단원들의 집중력을 이끌어냈다. 28일 오전, 서울 세종로에 자리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습실. 옛소련 출신의 거장 겐나지 로제스트벤스키(81·사진)는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을 한창 연습 중이었다.
막간의 휴식을 취하려고 자리를 잡은 그에게 “지휘자로서 어느덧 60년을 넘겼군요?”라고 운을 떼자, “너무 오래 했다는 말이죠?”라는 익살맞은 답이 돌아왔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위트가 넘쳤다.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과 처음 만난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이 여든 고개를 넘은 그에게 결코 쉽지 않으련만, 그는 화사하게 웃으며 유머 넘치는 답변을 툭툭 던졌다. 옆자리에는 아내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한때 옛소련을 대표했던 피아니스트였던 그녀가 앉아 있었다.
“어리석지 않게 지휘하는 것이 언제나 내 숙제였죠.” 로제스트벤스키는 자신이 지휘자로 살아온 60여년을 그렇게 회고했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거장이었던 므라빈스키의 뒤를 이어 옛소련을 상징했던 지휘자로 꼽힌다. 당연히 서구로부터 숱한 망명 제의를 받았다. 미국과 서유럽은 소비에트 음악가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주기도 했다. 결국 많은 음악가들이 국적을 바꿨다.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 등이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났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 피아니스트 리히테르 등은 끝까지 남았다. 로제스트벤스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이유를 묻자 “모국을 사랑해서”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그는 “나의 진심”이라고 말했다. “고국이 내게 해준 게 너무 많아 떠날 수 없다”고 했던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맥락의 답이다.
“나는 오랫동안 러시아 음악을 해석하고 전파해왔어요. 당신이 나한테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바흐’라고 답하겠어요.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작곡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어요.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 모든 러시아 음악가를 나는 사랑하죠. 모국인 러시아가 내게 준 유산들이죠.”
그는 자신이 사랑한다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숱한 ‘명반’으로 남겼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1번, 프로코피예프 1·6·7번 등이 꼽힌다. 모두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연주다. 또 1980년대에는 소련 정부가 아예 그를 위해 창단한 ‘소련 문화성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수작으로 남겼다. 특히 5·10·15번이 지금까지 애청된다.
많은 단원을 이끄는 지휘자가 포디엄에서 느끼는 긴장은 크다. 어떤 지휘자들은 연주 도중에, 또는 연주 직후에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이탈리아 태생의 주세페 시노폴리는 무대에서 쓰러졌고, 서구로 망명했던 옛소련 출신의 키릴 콘드라신은 연주를 마친 직후 호텔에서 세상을 떴다. 하지만 여든을 넘긴 로제스트벤스키는 “아냐 아냐, 지휘는 쉬운 거야”라며 또 익살을 부렸다. 그는 자신의 건재를 피력하면서 “10년이 흐른 뒤, 지휘자와 기자로 또 만나자”고 했다.
그의 첫 내한 연주회는 오늘(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을 지휘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처음에는 '왠 놈이냐'는 듯이 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날 LP들을 보더니 금새 표정이 밝아졌다. 피차 초면의 긴장이 그렇게 풀렸다. 그는 편안하게 농담을 던져가며 내가 가져간 8장의 LP에 공들여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휙휙 날아가는 서명이 아니었다. 그는 사인 하나하나에 아주 꼼꼼하게 정성을 다했다. 맨 위에 'Mr. Moon'이라고 불청객의 이름을 먼저 쓴 다음,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써내려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그것이 이날의 인터뷰였다. 2년 전 돌아가신 내 부친보다 두 살 아래인 노장 지휘자. 그는 앞으로 얼마나 더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유럽, 미국, 일본, 이번에는 한국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지휘봉을 들고 있는 그에게 "육체적으로 좀 힘드시진 않은가?"라고 묻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10년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렇게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처럼 편하고 따뜻했다. 생면부지의 노년과 중년을 이어준 것은 물론 음악이었다. 그는 60년 넘게 지휘를 했고, 나는 소련 '멜로디아'의 음반이 국내에 수입되기 전이었던 80년대 초반부터 그의 음악을 들어온 애청자였던 것이다.
사진은 서울시향의 진영이가 찍었다. 아래 사진들도 다 마찬가지다.
로제스트벤스키가 1972년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해 녹음했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Winter Dreams' 뒷표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때 그는 약간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 연주는 정말 최고랍니다"하면서 노장에게 덕담을 건넸다. 그는 매우 흐뭇해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자신의 젊은 시절 얼굴이 표지에 담긴 음반을 들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그는 사인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유머와 위트를 구사해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다. 이 음반은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한 60년대의 연주다. 역시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이다. 앞서 언급한 차이코프스키 1번과 더불어 그의 수작(秀作)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교향곡의 광포한 야생성과 날카로운 해학을 로제스트벤스키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지휘자는 별로 없다. 그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수장을 맡아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키웠다. 당시 그는 지휘자로서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소련의 국력은 막강했다. 그 시절의 얼굴은 약간 날카로워 보인다.
나중에 사진들을 보다가 아주 코믹한 컷을 두 장 찾았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자신의 건강은 아직도 끄떡없다고 과시했을 때,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그의 부인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가 러시아어로 뭔가 타박을 줬던 것이다. 짐작컨대, '건강은 무슨, 맨날 골골하면서~'였던 것 같다. 그러자 로제스트벤스키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두 컷 연속이다.
부부는 이번에 함께 한국에 왔다.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는 로제스트벤스키의 아내이기 이전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여류 피아니스트였다. 이번에 사인을 받은 음반 중에는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 브람스의 피아노 연탄곡 '왈츠 op.39'도 있었다. 1975년 녹음이다. 빼어난 연주로 손꼽히진 않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음반을 좋아한다. 표지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매우 다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한때 청순한 외모를 자랑했던 포스트니코바도 이제는 많이 늙었다. 세월이 가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에는 사실 나도 함께 끼여 있었는데, 블로그에 올리면서 지웠다. 공연히 촛점을 흐리는 것 같아서.
포스트니코바의 요즘 모습을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이곳에 올려 놓는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피아노 위에는 모차르트의 악보가 놓여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로제스트벤스키 선생이 눈을 감아서 좀 아쉬운 사진이다. 아래 박스는 연주회 당일이었던 2월 29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로제스트벤스키와의 인터뷰 기사다.
거장 로제스트벤스키 내한 “러시아 음악은 모국이 내게 준 유산”
그의 지휘 동작은 간결하고 소박했다. 가장 중요한 지휘봉은 ‘눈빛’이었다. 때로는 피에로처럼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단원들의 집중력을 이끌어냈다. 28일 오전, 서울 세종로에 자리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습실. 옛소련 출신의 거장 겐나지 로제스트벤스키(81·사진)는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을 한창 연습 중이었다.
막간의 휴식을 취하려고 자리를 잡은 그에게 “지휘자로서 어느덧 60년을 넘겼군요?”라고 운을 떼자, “너무 오래 했다는 말이죠?”라는 익살맞은 답이 돌아왔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위트가 넘쳤다.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과 처음 만난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이 여든 고개를 넘은 그에게 결코 쉽지 않으련만, 그는 화사하게 웃으며 유머 넘치는 답변을 툭툭 던졌다. 옆자리에는 아내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한때 옛소련을 대표했던 피아니스트였던 그녀가 앉아 있었다.
“어리석지 않게 지휘하는 것이 언제나 내 숙제였죠.” 로제스트벤스키는 자신이 지휘자로 살아온 60여년을 그렇게 회고했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거장이었던 므라빈스키의 뒤를 이어 옛소련을 상징했던 지휘자로 꼽힌다. 당연히 서구로부터 숱한 망명 제의를 받았다. 미국과 서유럽은 소비에트 음악가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주기도 했다. 결국 많은 음악가들이 국적을 바꿨다.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 등이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났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 피아니스트 리히테르 등은 끝까지 남았다. 로제스트벤스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이유를 묻자 “모국을 사랑해서”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그는 “나의 진심”이라고 말했다. “고국이 내게 해준 게 너무 많아 떠날 수 없다”고 했던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맥락의 답이다.
“나는 오랫동안 러시아 음악을 해석하고 전파해왔어요. 당신이 나한테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바흐’라고 답하겠어요.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작곡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어요.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 모든 러시아 음악가를 나는 사랑하죠. 모국인 러시아가 내게 준 유산들이죠.”
그는 자신이 사랑한다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숱한 ‘명반’으로 남겼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1번, 프로코피예프 1·6·7번 등이 꼽힌다. 모두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연주다. 또 1980년대에는 소련 정부가 아예 그를 위해 창단한 ‘소련 문화성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수작으로 남겼다. 특히 5·10·15번이 지금까지 애청된다.
많은 단원을 이끄는 지휘자가 포디엄에서 느끼는 긴장은 크다. 어떤 지휘자들은 연주 도중에, 또는 연주 직후에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이탈리아 태생의 주세페 시노폴리는 무대에서 쓰러졌고, 서구로 망명했던 옛소련 출신의 키릴 콘드라신은 연주를 마친 직후 호텔에서 세상을 떴다. 하지만 여든을 넘긴 로제스트벤스키는 “아냐 아냐, 지휘는 쉬운 거야”라며 또 익살을 부렸다. 그는 자신의 건재를 피력하면서 “10년이 흐른 뒤, 지휘자와 기자로 또 만나자”고 했다.
그의 첫 내한 연주회는 오늘(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을 지휘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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