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별로 듣지 않는 축에 속한다. 현악기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피아노 음악은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이 연주해야 제 맛이 난다고 믿는 편이다. 6~7년 전쯤, 피아니스트 백혜선과도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당시 40줄에 막 들어선 백혜선의 생각도 거의 비슷했던 것 같다. 그때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피아노의 진경(眞境)을 보여주는 몇몇 피아니스트들을 거론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프랑스에 사는 백건우 선생"이었다.
지난 2일, 광화문의 한 레스토랑에서 백선생과 만났다. 아내인 배우 윤정희씨도 함께였는데, 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인도 뭄바이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꾸당 넘어져 팔을 다쳤다"는 것. "다행히도 뼈가 부러지진 않고 금만 갔다"고 했다. 윤선생은 남편이 기자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곤 하는데, 이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아유, 괜찮아요"를 연발하면서 한사코 사양하기만 했다. 아마도 남편의 인터뷰에 자신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가는 것이 불편해서인 듯하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나서야 부부는 나란히 앉았고, 백선생은 오른팔이 불편한 아내의 접시로 연신 음식을 날랐다. 윤선생은 잡채를, 백선생은 시원한 동치미를 좋아했다. "팔이 불편하지 않았을 때도 이렇게 자상하게 음식을 날라 주시던가요?"라고 묻자, 윤선생이 깔깔 웃으며 "진희 아빠는요, 직접 요리를 해서 저한테 갖다 바쳐요"라고 자랑했다. 알고 보니 요리는 백선생의 취미이자 장기였다. "(나한테 요리는) 연습을 하다가 잠시 취하는 휴식과 같다"는 것이 백선생의 설명이었다. 두사람의 딸 백진희양은 이제 서른세살의 바이올리니스트. 딸의 근황을 묻자 백선생은 "파리에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해요. 기질적으로 솔리스트 쪽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연주자들과 앙상블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내 귀에 가장 선명하게 꽂힌 멘트는 "(젊은 시절의 나는) 섬세하지 못했다"는 고백이었다. 그 고백은 백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여러 개의 구문(口文) 속에 별다른 액센트 없이 조용히 곁들여져 나왔다. 그래서 다른 말들에 묻힌 채 흘려 들을 수도 있는 짧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마치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아무리 '백건우'라 할지라도, 그건 참으로 어려운 고백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직업 연주자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할 사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멘트는 기사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시아 출신으로 최고의 지휘자는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와 일본의 세이지 오자와”라는 것. 이것은 공개된 블로그에서 더 이상 설명하기 어려운 행간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아무쪼록 읽는 분들께서 그 숨은 갈피를 잘 유추해보시길 바란다.
ㆍ은관문화훈장 받고 13~14일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
피아니스트 백건우(64·사진)의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생존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한 소감에 대해서는 “기쁘고, 고맙고, 책임감이 커진다”고만 답했다. 지난 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백건우는 이번에도 역시 음악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달 13~14일 주빈 메타(74)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에 대한 기억과 견해를 털어놨고, “나이 들수록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음악은 연주자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연주의 핵심은 무엇보다 진정성”이라고 강조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은 대표적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데?
“그의 협주곡 중에서도 3번을 가장 많이 연주했죠. 그 곡은 제게 좀 특별합니다. 15세에 처음 미국에 가서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 출전했었는데, 제가 3번을 연습하는 소리를 지휘자 번스타인이 들었어요. 그때 번스타인이 ‘저 젊은이를 도와줘야 한다’고 추천했다는 얘기를 콩쿠르가 끝난 다음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미국 줄리아드에서 공부하게 됐죠. 협주곡 3번은 D단조입니다. D단조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적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조성이죠.”
말을 마친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피아니스트 지용의 팸플릿을 이리저리 펼쳐봤다. 28일 연주회를 갖는 신예다. “몇해 전부터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것 같다”고 하자 백건우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함께 연주하는 거죠. 그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옛날부터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어요. 음악을 한다는 건 스스로 찾아낸 개성적인 언어로 청중에게 믿음을 주는 작업이죠. 레슨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한 작곡가의 음악을 몇년씩 집중 탐구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요즘에는 그런 방식에서 많이 벗어난 듯 보입니다.
“호기심 때문이었죠. 스크리아빈은 음악에 담긴 심리적 표현들, 그가 그려낸 선과 악의 색채 같은 것에 끌렸죠. 리스트에 집중했던 건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영역에 대한 탐구 같은 것이었죠. 라벨은 프랑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빠져들었고, 베토벤의 경우는 음악을 통해 한 음악가의 일생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매달렸죠. 이젠 어느 한 작곡가에 몰입하기보다 전체적으로 음악을 조망하려는 편이죠. 몇해 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 다음부터 그런 변화가 저한테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과 지금, 연주에 임하는 태도나 곡 해석에서 차이가 있다면?
“젊을 때는 감정적으로 음악을 해석했어요. 섬세하지 못했죠. 나이가 들수록 조심스러워집니다. 음악이 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게 돼죠. 내 느낌을 앞세우기보다는. (제 은사였던) 빌헬름 켐프 선생이 한음 한음 신중하게,거의 종교적인 태도로 음을 다뤘던 것이 기억나요. 물론 그런 방식이 모든 음악에 맞지는 않겠지만, 제가 같은 곡을 반복해 연습하는 것은 그 음이 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작업인 셈이죠.”
백건우는 “위대한 협주곡는 언제나 무궁무진한 느낌을 전해준다”고 했다.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이를테면 “라흐마니노프의 3번, 프로코피예프의 2번, 브람스의 1번”을 그런 협주곡으로 예시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곡을 써낼 수 있는지 놀랍다”면서 “어쩌면 그건 인간 혼자서 해내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얼핏 종교적으로 들렸다. 재차 설명을 부탁하자, “갈구하다 보면 영감이 찾아오고, 작곡가는 그것을 오선지 위에 받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은 최근의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평가와 조언이었는데, 그는 즉답을 피하고 이렇게 에둘렀다. “좋은 음악을 만들려면 갖춰야 할 게 참 많겠죠. 한데 가장 중요한 건 인간성인 것 같아요. 음악은 명백한 거울이니까. 거기엔 거짓이 있을 수 없거든요. 저도 가끔 청중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는데, 참과 거짓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요. 그것이 정말 자신이 찾아낸 음악인지, 아니면 청중을 의식하며 만들어내는 것인지, 혹시 명예를 얻기 위해서 연주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진정성이에요.”
그는 서울에서 13~14일 협연할 이스라엘 필하모닉에 대해서는 “현악기가 좋은 오케스트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지휘자 주빈 메타에 대해서는 “아시아 출신으로 그만한 성과를 이뤄낸 지휘자는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와 일본의 세이지 오자와뿐”이라고 말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금까지 백선생의 연주를 여러번 지켜봤지만,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연주회는 2년 전이었다. 당시 백선생이 연주했던 곡은 올리비에 메시앙의 대곡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이었고 장소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그 연주회는 나로 하여금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 계기였다. 좀더 솔직히 말한다면, 사실 나는 그 이전까지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해 좀 심드렁한 편이었고, 그의 연주에 완벽하게 설득당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그의 연주를 여러차례 보고 들었지만, 설득과 감동의 후유증에서 며칠씩 벗어나지 못할 만큼의 강렬한 느낌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른 애호가들은 나하고 또 다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백선생이 메시앙을 연주하던 그날, 수차례의 커튼콜이 끝나고 청중이 콘서트홀에서 거의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객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거의 탈진 상태였다. 마치 온몸을 강펀치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물론 그것은 일차적으로 메시앙의 음악이 가진 거대한 우주성 때문일 것이고, 아울러 그 음악과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어떤 심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끌어안는 장관을 연출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일개 청중이었던 나를 꼼짝못하게 붙들어맸던 그 압도적 장관을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잊을 수 없거니와, 아울러 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곡을 음반으로나마 듣고자 하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나는 그날 연주회에 피아니스트 김순배씨와 동행했었는데, 그는 '메시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를테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여성 피아니스트다. 나는 연주회 며칠 후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내 증상을 털어놨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가 워낙 방대해요. 인간성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오가잖아요. 음역도 위·아래를 극단적으로 오가면서, 그야말로 극한적인 ‘대비’를 보여주잖아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가 소리로 표현됐을 때, 인간의 육체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온몸이 얼얼한 겁니다.” 그는 그렇게 진단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당시 경향신문에 연재하던 음악컬럼 '주제와 변주'에 썼던 적이 있다.
2년만에 다시 만난 백선생에게 그 얘기를 하자, 그는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메시앙 선생의 그 곡은 워낙 거대한 세계를 그려놓고 있죠. 그토록 방대한 세계를 저와 함께 여행했으니... 몸이 아프고 힘든 게 당연하죠. 그래서 저도 그 곡을 10년에 한번씩 연주해요. 더 이상 못하겠더라구요." 그 얘기를 할 때 백선생은 인터뷰가 주는 긴장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저 한 사람의 연주자와, 한 사람의 애호가로서의 격의없는 대화였다. 사실 이런 식의 대화야말로 그 연주자를 더 깊이 알게 해주는 법인데,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간에 약간의 긴장감이 조성되곤 한다. 아랫글은 백선생이 메시앙을 연주하기 직전의 기사. 파리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진행했던 인터뷰였다.
ㆍ내달 30일 탄생 100주년 기념 연주회
“그분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어요. 생 트리니테 성당에서 오르간을 즉흥 연주하던 모습을 봤지요. 굉장히 강렬한 음악이 들려왔어요.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죠. 그런데 더 인상적인 모습은 연주가 끝난 다음이었어요. 계단 아래로 내려온 메시앙 선생이 평범한 신자들과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때 그분의 겸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 18일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전화를 받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씨(62)는 “음악은 강렬하지만 인품은 한없이 겸손했던 사람”이라고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을 회상했다.
‘생 트리니테’는 파리 오페라거리 북쪽에 있는 140년이 넘은 성당. 1992년 타계 이후 ‘현대음악의 성자(聖者)’로까지 불리고 있는 메시앙은 1931년부터 이 성당의 오르간을 연주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잡혀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거의 매주 연주대로 가는 계단을 오르내렸다. 백씨는 “그날 나도 메시앙 선생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미사에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메시앙이 태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 그의 음악에 유독 애착을 갖고 있는 백씨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을 한국에서 연주한다. 다음달 30일, 예술의 전당. 96년 명동성당에서 한국 초연했던 이후 12년 만이다. 백씨는 메시앙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영상’을 또 한 편 소개했다.
“돌아가시기 3년 전쯤에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시 낭송회가 있었어요. 메시앙 선생이 마지막에 무대에 올라 시를 낭송했어요. 그분의 어머니가 시인이었잖습니까? 여든살 넘은 노작곡가가 목이 메어 자기 어머니 시를 읽어 내려가던 모습도 잊을 수 없지요. 하지만 저한테는 트리니테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내려왔을 때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음악이 강렬했으니까요.”
백씨가 메시앙의 음악, 특히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80년대 중반부터다. 이것은 당시 백씨의 종교적 선택과도 무관치 않다.
“어렸을 때 종교는 기독교였는데, 솔직히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15살 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서, 청년시절에는 오히려 불교의 매력에 빠져들었죠. 그러다가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15년 전에 정식으로 신자가 됐습니다. 우리 진희 엄마가 오래 전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영향이 컸지요. 또 유럽에는 성당이 아주 많잖아요. 장인·장모가 프랑스에 오시면 여러 성당에 안내해 드리곤 했어요.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 터키까지 함께 다녀왔지요.”
백씨는 아내 윤정희씨를 ‘진희 엄마’로 호칭했다. 딸의 이름이 ‘진희’다.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유럽 문화의 골간을 이루는 가톨릭에 점점 빠져들었다는 뜻. 아울러 그는 리스트, 부조니, 메시앙 등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들은 대개 복합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메시앙 선생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서양뿐 아니라 동양을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했던 작곡가였지요.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여러 나라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죠. 거기에 자연과 종교(가톨릭)까지 포괄하는, 굉장히 ‘그릇’이 큰 작곡가입니다. 동시에 그는 교육자로서 슈토크하우젠, 크세나키스, 불레즈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냈지요. 그분의 음악에 담긴 ‘힘’은 거대합니다. 저는 그 힘이 ‘진정성이 깃든 신앙’에서 온 것이라고 믿어요. 신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연주회를 마치고 어제 막 돌아왔다”는 백씨는, “그곳에서도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을 연주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달 30일 한국 연주를 끝낸 직후, 이탈리아 로마와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같은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지난 2일, 광화문의 한 레스토랑에서 백선생과 만났다. 아내인 배우 윤정희씨도 함께였는데, 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인도 뭄바이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꾸당 넘어져 팔을 다쳤다"는 것. "다행히도 뼈가 부러지진 않고 금만 갔다"고 했다. 윤선생은 남편이 기자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곤 하는데, 이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아유, 괜찮아요"를 연발하면서 한사코 사양하기만 했다. 아마도 남편의 인터뷰에 자신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가는 것이 불편해서인 듯하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나서야 부부는 나란히 앉았고, 백선생은 오른팔이 불편한 아내의 접시로 연신 음식을 날랐다. 윤선생은 잡채를, 백선생은 시원한 동치미를 좋아했다. "팔이 불편하지 않았을 때도 이렇게 자상하게 음식을 날라 주시던가요?"라고 묻자, 윤선생이 깔깔 웃으며 "진희 아빠는요, 직접 요리를 해서 저한테 갖다 바쳐요"라고 자랑했다. 알고 보니 요리는 백선생의 취미이자 장기였다. "(나한테 요리는) 연습을 하다가 잠시 취하는 휴식과 같다"는 것이 백선생의 설명이었다. 두사람의 딸 백진희양은 이제 서른세살의 바이올리니스트. 딸의 근황을 묻자 백선생은 "파리에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해요. 기질적으로 솔리스트 쪽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연주자들과 앙상블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내 귀에 가장 선명하게 꽂힌 멘트는 "(젊은 시절의 나는) 섬세하지 못했다"는 고백이었다. 그 고백은 백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여러 개의 구문(口文) 속에 별다른 액센트 없이 조용히 곁들여져 나왔다. 그래서 다른 말들에 묻힌 채 흘려 들을 수도 있는 짧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마치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아무리 '백건우'라 할지라도, 그건 참으로 어려운 고백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직업 연주자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할 사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멘트는 기사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시아 출신으로 최고의 지휘자는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와 일본의 세이지 오자와”라는 것. 이것은 공개된 블로그에서 더 이상 설명하기 어려운 행간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아무쪼록 읽는 분들께서 그 숨은 갈피를 잘 유추해보시길 바란다.
백건우 “연주의 핵심은 한마디로 진정성”
기사입력 2010-11-03 21:34 최종수정 2010-11-04 15:16ㆍ은관문화훈장 받고 13~14일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
피아니스트 백건우(64·사진)의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생존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한 소감에 대해서는 “기쁘고, 고맙고, 책임감이 커진다”고만 답했다. 지난 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백건우는 이번에도 역시 음악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달 13~14일 주빈 메타(74)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에 대한 기억과 견해를 털어놨고, “나이 들수록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음악은 연주자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연주의 핵심은 무엇보다 진정성”이라고 강조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은 대표적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데?
“그의 협주곡 중에서도 3번을 가장 많이 연주했죠. 그 곡은 제게 좀 특별합니다. 15세에 처음 미국에 가서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 출전했었는데, 제가 3번을 연습하는 소리를 지휘자 번스타인이 들었어요. 그때 번스타인이 ‘저 젊은이를 도와줘야 한다’고 추천했다는 얘기를 콩쿠르가 끝난 다음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미국 줄리아드에서 공부하게 됐죠. 협주곡 3번은 D단조입니다. D단조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적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조성이죠.”
말을 마친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피아니스트 지용의 팸플릿을 이리저리 펼쳐봤다. 28일 연주회를 갖는 신예다. “몇해 전부터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것 같다”고 하자 백건우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함께 연주하는 거죠. 그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옛날부터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어요. 음악을 한다는 건 스스로 찾아낸 개성적인 언어로 청중에게 믿음을 주는 작업이죠. 레슨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한 작곡가의 음악을 몇년씩 집중 탐구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요즘에는 그런 방식에서 많이 벗어난 듯 보입니다.
“호기심 때문이었죠. 스크리아빈은 음악에 담긴 심리적 표현들, 그가 그려낸 선과 악의 색채 같은 것에 끌렸죠. 리스트에 집중했던 건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영역에 대한 탐구 같은 것이었죠. 라벨은 프랑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빠져들었고, 베토벤의 경우는 음악을 통해 한 음악가의 일생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매달렸죠. 이젠 어느 한 작곡가에 몰입하기보다 전체적으로 음악을 조망하려는 편이죠. 몇해 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 다음부터 그런 변화가 저한테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과 지금, 연주에 임하는 태도나 곡 해석에서 차이가 있다면?
“젊을 때는 감정적으로 음악을 해석했어요. 섬세하지 못했죠. 나이가 들수록 조심스러워집니다. 음악이 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게 돼죠. 내 느낌을 앞세우기보다는. (제 은사였던) 빌헬름 켐프 선생이 한음 한음 신중하게,거의 종교적인 태도로 음을 다뤘던 것이 기억나요. 물론 그런 방식이 모든 음악에 맞지는 않겠지만, 제가 같은 곡을 반복해 연습하는 것은 그 음이 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작업인 셈이죠.”
백건우는 “위대한 협주곡는 언제나 무궁무진한 느낌을 전해준다”고 했다.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이를테면 “라흐마니노프의 3번, 프로코피예프의 2번, 브람스의 1번”을 그런 협주곡으로 예시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곡을 써낼 수 있는지 놀랍다”면서 “어쩌면 그건 인간 혼자서 해내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얼핏 종교적으로 들렸다. 재차 설명을 부탁하자, “갈구하다 보면 영감이 찾아오고, 작곡가는 그것을 오선지 위에 받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은 최근의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평가와 조언이었는데, 그는 즉답을 피하고 이렇게 에둘렀다. “좋은 음악을 만들려면 갖춰야 할 게 참 많겠죠. 한데 가장 중요한 건 인간성인 것 같아요. 음악은 명백한 거울이니까. 거기엔 거짓이 있을 수 없거든요. 저도 가끔 청중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는데, 참과 거짓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요. 그것이 정말 자신이 찾아낸 음악인지, 아니면 청중을 의식하며 만들어내는 것인지, 혹시 명예를 얻기 위해서 연주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진정성이에요.”
그는 서울에서 13~14일 협연할 이스라엘 필하모닉에 대해서는 “현악기가 좋은 오케스트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지휘자 주빈 메타에 대해서는 “아시아 출신으로 그만한 성과를 이뤄낸 지휘자는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와 일본의 세이지 오자와뿐”이라고 말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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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백선생의 연주를 여러번 지켜봤지만,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연주회는 2년 전이었다. 당시 백선생이 연주했던 곡은 올리비에 메시앙의 대곡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이었고 장소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그 연주회는 나로 하여금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 계기였다. 좀더 솔직히 말한다면, 사실 나는 그 이전까지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해 좀 심드렁한 편이었고, 그의 연주에 완벽하게 설득당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그의 연주를 여러차례 보고 들었지만, 설득과 감동의 후유증에서 며칠씩 벗어나지 못할 만큼의 강렬한 느낌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른 애호가들은 나하고 또 다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백선생이 메시앙을 연주하던 그날, 수차례의 커튼콜이 끝나고 청중이 콘서트홀에서 거의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객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거의 탈진 상태였다. 마치 온몸을 강펀치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물론 그것은 일차적으로 메시앙의 음악이 가진 거대한 우주성 때문일 것이고, 아울러 그 음악과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어떤 심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끌어안는 장관을 연출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일개 청중이었던 나를 꼼짝못하게 붙들어맸던 그 압도적 장관을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잊을 수 없거니와, 아울러 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곡을 음반으로나마 듣고자 하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나는 그날 연주회에 피아니스트 김순배씨와 동행했었는데, 그는 '메시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를테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여성 피아니스트다. 나는 연주회 며칠 후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내 증상을 털어놨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가 워낙 방대해요. 인간성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오가잖아요. 음역도 위·아래를 극단적으로 오가면서, 그야말로 극한적인 ‘대비’를 보여주잖아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가 소리로 표현됐을 때, 인간의 육체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온몸이 얼얼한 겁니다.” 그는 그렇게 진단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당시 경향신문에 연재하던 음악컬럼 '주제와 변주'에 썼던 적이 있다.
2년만에 다시 만난 백선생에게 그 얘기를 하자, 그는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메시앙 선생의 그 곡은 워낙 거대한 세계를 그려놓고 있죠. 그토록 방대한 세계를 저와 함께 여행했으니... 몸이 아프고 힘든 게 당연하죠. 그래서 저도 그 곡을 10년에 한번씩 연주해요. 더 이상 못하겠더라구요." 그 얘기를 할 때 백선생은 인터뷰가 주는 긴장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저 한 사람의 연주자와, 한 사람의 애호가로서의 격의없는 대화였다. 사실 이런 식의 대화야말로 그 연주자를 더 깊이 알게 해주는 법인데,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간에 약간의 긴장감이 조성되곤 한다. 아랫글은 백선생이 메시앙을 연주하기 직전의 기사. 파리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진행했던 인터뷰였다.
백건우, 현대음악의 성자 메시앙을 회상하다
기사입력 2008-10-20 17:46ㆍ내달 30일 탄생 100주년 기념 연주회
“그분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어요. 생 트리니테 성당에서 오르간을 즉흥 연주하던 모습을 봤지요. 굉장히 강렬한 음악이 들려왔어요.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죠. 그런데 더 인상적인 모습은 연주가 끝난 다음이었어요. 계단 아래로 내려온 메시앙 선생이 평범한 신자들과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때 그분의 겸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 18일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전화를 받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씨(62)는 “음악은 강렬하지만 인품은 한없이 겸손했던 사람”이라고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을 회상했다.
‘생 트리니테’는 파리 오페라거리 북쪽에 있는 140년이 넘은 성당. 1992년 타계 이후 ‘현대음악의 성자(聖者)’로까지 불리고 있는 메시앙은 1931년부터 이 성당의 오르간을 연주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잡혀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거의 매주 연주대로 가는 계단을 오르내렸다. 백씨는 “그날 나도 메시앙 선생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미사에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메시앙이 태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 그의 음악에 유독 애착을 갖고 있는 백씨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을 한국에서 연주한다. 다음달 30일, 예술의 전당. 96년 명동성당에서 한국 초연했던 이후 12년 만이다. 백씨는 메시앙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영상’을 또 한 편 소개했다.
“돌아가시기 3년 전쯤에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시 낭송회가 있었어요. 메시앙 선생이 마지막에 무대에 올라 시를 낭송했어요. 그분의 어머니가 시인이었잖습니까? 여든살 넘은 노작곡가가 목이 메어 자기 어머니 시를 읽어 내려가던 모습도 잊을 수 없지요. 하지만 저한테는 트리니테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내려왔을 때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음악이 강렬했으니까요.”
백씨가 메시앙의 음악, 특히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80년대 중반부터다. 이것은 당시 백씨의 종교적 선택과도 무관치 않다.
“어렸을 때 종교는 기독교였는데, 솔직히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15살 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서, 청년시절에는 오히려 불교의 매력에 빠져들었죠. 그러다가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15년 전에 정식으로 신자가 됐습니다. 우리 진희 엄마가 오래 전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영향이 컸지요. 또 유럽에는 성당이 아주 많잖아요. 장인·장모가 프랑스에 오시면 여러 성당에 안내해 드리곤 했어요.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 터키까지 함께 다녀왔지요.”
백씨는 아내 윤정희씨를 ‘진희 엄마’로 호칭했다. 딸의 이름이 ‘진희’다.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유럽 문화의 골간을 이루는 가톨릭에 점점 빠져들었다는 뜻. 아울러 그는 리스트, 부조니, 메시앙 등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들은 대개 복합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메시앙 선생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서양뿐 아니라 동양을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했던 작곡가였지요.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여러 나라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죠. 거기에 자연과 종교(가톨릭)까지 포괄하는, 굉장히 ‘그릇’이 큰 작곡가입니다. 동시에 그는 교육자로서 슈토크하우젠, 크세나키스, 불레즈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냈지요. 그분의 음악에 담긴 ‘힘’은 거대합니다. 저는 그 힘이 ‘진정성이 깃든 신앙’에서 온 것이라고 믿어요. 신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연주회를 마치고 어제 막 돌아왔다”는 백씨는, “그곳에서도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개의 시선’을 연주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달 30일 한국 연주를 끝낸 직후, 이탈리아 로마와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같은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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