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를 네번 만났다. 첫번은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였다. 당시 현수의 성적은 2위 없는 1위였으니, 압도적인 우승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때 현수가 결선에서 프로코피에프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면서 감탄을 했었다. 나뿐 아니라 판장사 경력 30년의 내 친구 세환도 "정말 멋지다"는 평가를 내렸었다. 우리는 클림트의 비좁은 난쟁이 의자에 앉아 프로코피에프를 신들린 듯 연주하던 현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참을 노닥거렸다.
며칠 후 신문사 근처의 카페에서 마주앉는 현수는 뜻밖에도 수줍음을 탔다. 아마 현수를 돌봐주는 소연이가 겁을 줬던 모양이다. 성격이 굉장히 안 좋은 아저씨라던가, 수 틀리면 인터뷰 하다가 그냥 가버린다든가, 뭐 그런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현수는 "콩쿠르보다 인터뷰가 더 떨린다"며 엄청 얌전 모드였는데, 나는 그날 현수가 입고 있던 노란 바지와 초록색 운동화에 유난히 눈길이 갔던 기억이 난다. 아주 과감한 색채 배합이었다. 알고보니 현수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비싸지 않으면서 멋진 물건을 골라내는 재주, 또 그것을 자신에게 잘 어울리게 입어내는 감각이 탁월한 아이였다. 어쨌든 그날 인터뷰 내용은 주로 콩쿠르에 대한 것. 또 부잣집 자식이 아니었던,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째지게 가난한 집 자식도 아니었던, 현수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 진행됐다. 그때 나눴던 이야기들은 밑에 올려놓은 기사에 대부분 들어 있다. '콩쿠르 소녀, 비상이 시작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열흘쯤 지나 나는 고양아람누리를 찾았다. 현수의 연주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의 협연. 연주할 곡은 멘델스존의 협주곡이었다. 나는 현수가 좀더 현대적인 곡을 연주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건 그저 나의 바람이었을 뿐이다. 현수는 주최측과 미리 조율한 낭만주의 협주곡을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연주해야 했다. 물론 연주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고, 객석의 박수는 뜨거웠다. 하지만 나는 그날 현수의 연주를 실연으로 처음 접한 후, 약간의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블로그는 사적 공간이면서도 공적 공간일 수 있기 때문에, 당시 내가 느꼈던 우려를 날것으로 토해놓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이런 저런 단어들을 끌어와 표현해보자면, 나는 그날 현수의 연주를 마음 졸이며 지켜보면서, 겉은 뜨겁지만 속이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노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나는 그날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현수야, 더 공부해야겠구나. 올해는 네게 아주 기쁜 해임에 틀림없지만, 빨리 그걸 잊고 음악에 더 집중해야겠구나.'
그리고 1년 반이 흘렀다. 이번에 현수를 만난 곳은 신문로 성곡미술관 앞에 있는 카페였다. 사위가 어둑해지는 늦은 시간이었다. 강남 삼성동에서 연습을 마치고 강북까지 달려온 현수는 그 사이에 훌쩍 자라 있었다. 콩쿠르 직후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 소녀의 분위기를 풍겼었는데, 다시 만난 현수에게서는 아가씨의 느낌이 완연했다. 그날 나는 현수에게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일본에서의 근황을 자세히 물었고, 현수는 "떨었던" 첫번째 인터뷰와 달리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일일히 묻지 않아도 기사에 필요한 내용을 먼저 정리해주는 세심한 여유까지 선보이면서 말이다. 그 기사가 바로 밑에 있는 최근 기사다.
기사가 나가기 하루 전날이었던 화요일,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의 리사이틀이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다. 마침 현수가 다음달 연주할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가 1부의 두번째 곡으로 포함된 연주회였다. 게다가 현수는 며칠 전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차크 펄만을 좋아하는 연주자로 꼽기까지 했으니, 이래저래 놓칠 수 없는 연주회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날 연주회에 동행했다.
2층 객석의 맨 앞자리. 음악 소리는 왠만큼 들렸지만, 펄만 선생의 표정과 땀방울이 보이지 않는 게 영 불편하고 아쉬웠다. 나야 소리만 들려도 괜찮지만, 현수에게는 근거리에서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는 게 분명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현수는 음악이 한 곡씩 끝날 때마다 아주 커다랗게 박수를 쳤다. 나는 그렇게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현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며칠 전 내가 현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수야, 연주회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에 감동을 받거나 설득당하고 싶어서 오는 거야. 무대 위의 연주자가 몇개나 틀리는지 헤아려보려는 찌질이들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라고." 그것은 청중을 '내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대상화하지 말고, 청중과 함께 음악을 즐기라는 뜻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화요일 이차크 펄만의 연주회에서, 현수야말로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연 채 음악을 받아들이는 '멋진 청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나는 현수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음달 11일 있을 그의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이 뭉클하게 커지는 걸 느꼈다.
ㆍ콩쿠르 소녀, 비상이 시작되다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는 말수 적고 싱거워 보이는 외모 속에 묘한 불꽃을 품었다. 그렇다고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건 아니다. 순식간에 얼음처럼 싸늘해지면서 음악의 상승과 하강을 멋들어지게 오간다. 이제 겨우 스물두 살. 하지만 음악을 조절하는 능력은 ‘나이’를 훌쩍 웃돈다. 지난해 11월 프랑스의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살바토레 아카르도(68)는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비행기가 땅을 떠나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비상한다”고 극찬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젊은 시절의 정경화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싱겁게 웃으면서 “그저 음악에 몰입할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신현수가 19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 협연한다. 롱 티보 콩쿠르 우승으로 언론의 조명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프로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는 셈이다. 신현수는 “이반 피셔는 열정과 카리스마가 대단한 지휘자. 그래서 연주회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정동 경향신문사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앉은 신현수는 “오히려 인터뷰가 더 긴장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았고,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생각을 요리조리 정리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이 거리에 두번째예요. 초등학교 다닐 때 이화경향콩쿠르에서 우승했거든요. 그때 처음 왔고, 이번이 두번째예요.” 마침 커피숍 아래로 일군의 중학생들이 지나갔다. 정동길에 자리한 명문 학교 학생들. 현재 한국의 젊은 연주자 대다수를 배출해내고 있는 유명한 학교다. 하지만 신현수는 그 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선욱과 더불어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거둔 최고의 음악적 성과임에 틀림없지만, 전북 전주의 ‘동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던 ‘비주류’ 학생이었다. 그 때문에 롱 티보 우승은 더욱 화제가 됐고, ‘어린 현수’의 마음을 “불편하게까지 만들”면서 ‘불우한 환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묘사됐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좀 힘들었어요. 물론 아빠가 안 계신 탓에 엄마가 많이 고생하시긴 했지만, 저희가 그렇게까지 가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거든요. 저희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도 저희 엄마는 언니(바이올리니스트 신아라)와 제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처음엔 유치원에서, 조금 재능을 보이니까 동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갔어요. 언니 덕을 많이 봤죠. 예비학교에 먼저 들어간 언니가 바이올린 연습하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공부가 됐거든요.”
신현수는 “처음 갖고 놀았던 바이올린은 ‘과자 상자’였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금새 알아 듣기 어려웠다. 그러자 “진짜 바이올린이 아니고요, 그냥 과자 상자예요. 모양은 바이올린처럼 생겼지만 종이로 만든 거죠. 그 속에 사탕이랑 과자가 들어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어 그는 “엄마랑 네 살 위의 언니가 방문을 아예 닫아놓고 바이올린을 연습했어요. 그러면 저는 그 방문 앞에서 잠들곤 했대요”라고 말했다. 이 ‘아련한’ 기억은 그의 잠재의식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신현수는 오랫동안 ‘콩쿠르의 소녀’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돌이켰다.
“그게 저한테 중요한 발판이 돼줄 거라고 믿었어요. 엄마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1년에 하나씩 출전했죠. 국내 콩쿠르에선 모두 1등을 차지했어요. 그러다가 영국 메뉴힌 콩쿠르에서 2등을 했어요. 2등은 처음이었죠. 좀 충격이었어요. 역시 세계무대는 만만치 않구나 라는 것도 느꼈죠. 그래서 더 열심히 했나 봐요. 다음해에 미국 요한슨 콩쿠르에서 1등을 했죠.”
하지만 그것은 모두 ‘주니어 부문’에서의 영광이었을 뿐. 이후 그는 2004년 파가니니 콩쿠르 3위, 2005년 티보 바가 콩쿠르 3위, 시벨리우스 콩쿠르 3위, 하노버 콩쿠르 2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5위 등을 차지하면서 ‘1등’의 영광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약이었을까. 그는 ‘연습 벌레’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롱 티보 콩쿠르에서 2위없는 우승을 마침내 거머쥐었고, 그것은 결국 그의 기대처럼 ‘발판’의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콩쿠르 때는 귀도 잘 안 들리고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어요.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죠. 롱 티보 때는 더 심했어요. 6등부터 호명을 하는데 끝까지 저를 안 부르는 거예요. 프랑스어를 못 알아 들은 거죠. 옆에 있던 친구가 ‘네가 1등이래’라고 알려줬어요. 마치 꿈꾸는 것 같았어요. 1시간 후에 엄마한테 전화했죠. 엄마는 계속 울기만 했어요.”
신현수는 롱 티보 콩쿠르 직전에 실제로 꿈을 꿨다고 했다. 꿈속에서 여러마리 뱀에게 물렸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길몽이었다. 그는 “요즘 끌리는 음악은 프로코피에프, 바르토크, 쇼스타코비치처럼 근육질의 음악들”이라면서 “롱 티보에서 프로코피에프를 연주할 때는, 장갑차가 돌진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의 이미지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오늘 저녁 워싱턴 심포니와 협연할 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워싱턴 심포니는 이밖에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도 연주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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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신문사 근처의 카페에서 마주앉는 현수는 뜻밖에도 수줍음을 탔다. 아마 현수를 돌봐주는 소연이가 겁을 줬던 모양이다. 성격이 굉장히 안 좋은 아저씨라던가, 수 틀리면 인터뷰 하다가 그냥 가버린다든가, 뭐 그런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현수는 "콩쿠르보다 인터뷰가 더 떨린다"며 엄청 얌전 모드였는데, 나는 그날 현수가 입고 있던 노란 바지와 초록색 운동화에 유난히 눈길이 갔던 기억이 난다. 아주 과감한 색채 배합이었다. 알고보니 현수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비싸지 않으면서 멋진 물건을 골라내는 재주, 또 그것을 자신에게 잘 어울리게 입어내는 감각이 탁월한 아이였다. 어쨌든 그날 인터뷰 내용은 주로 콩쿠르에 대한 것. 또 부잣집 자식이 아니었던,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째지게 가난한 집 자식도 아니었던, 현수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 진행됐다. 그때 나눴던 이야기들은 밑에 올려놓은 기사에 대부분 들어 있다. '콩쿠르 소녀, 비상이 시작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열흘쯤 지나 나는 고양아람누리를 찾았다. 현수의 연주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의 협연. 연주할 곡은 멘델스존의 협주곡이었다. 나는 현수가 좀더 현대적인 곡을 연주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건 그저 나의 바람이었을 뿐이다. 현수는 주최측과 미리 조율한 낭만주의 협주곡을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연주해야 했다. 물론 연주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고, 객석의 박수는 뜨거웠다. 하지만 나는 그날 현수의 연주를 실연으로 처음 접한 후, 약간의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블로그는 사적 공간이면서도 공적 공간일 수 있기 때문에, 당시 내가 느꼈던 우려를 날것으로 토해놓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이런 저런 단어들을 끌어와 표현해보자면, 나는 그날 현수의 연주를 마음 졸이며 지켜보면서, 겉은 뜨겁지만 속이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노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나는 그날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현수야, 더 공부해야겠구나. 올해는 네게 아주 기쁜 해임에 틀림없지만, 빨리 그걸 잊고 음악에 더 집중해야겠구나.'
그리고 1년 반이 흘렀다. 이번에 현수를 만난 곳은 신문로 성곡미술관 앞에 있는 카페였다. 사위가 어둑해지는 늦은 시간이었다. 강남 삼성동에서 연습을 마치고 강북까지 달려온 현수는 그 사이에 훌쩍 자라 있었다. 콩쿠르 직후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 소녀의 분위기를 풍겼었는데, 다시 만난 현수에게서는 아가씨의 느낌이 완연했다. 그날 나는 현수에게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일본에서의 근황을 자세히 물었고, 현수는 "떨었던" 첫번째 인터뷰와 달리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일일히 묻지 않아도 기사에 필요한 내용을 먼저 정리해주는 세심한 여유까지 선보이면서 말이다. 그 기사가 바로 밑에 있는 최근 기사다.
기사가 나가기 하루 전날이었던 화요일,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의 리사이틀이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다. 마침 현수가 다음달 연주할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가 1부의 두번째 곡으로 포함된 연주회였다. 게다가 현수는 며칠 전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차크 펄만을 좋아하는 연주자로 꼽기까지 했으니, 이래저래 놓칠 수 없는 연주회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날 연주회에 동행했다.
2층 객석의 맨 앞자리. 음악 소리는 왠만큼 들렸지만, 펄만 선생의 표정과 땀방울이 보이지 않는 게 영 불편하고 아쉬웠다. 나야 소리만 들려도 괜찮지만, 현수에게는 근거리에서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는 게 분명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현수는 음악이 한 곡씩 끝날 때마다 아주 커다랗게 박수를 쳤다. 나는 그렇게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현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며칠 전 내가 현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수야, 연주회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에 감동을 받거나 설득당하고 싶어서 오는 거야. 무대 위의 연주자가 몇개나 틀리는지 헤아려보려는 찌질이들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라고." 그것은 청중을 '내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대상화하지 말고, 청중과 함께 음악을 즐기라는 뜻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화요일 이차크 펄만의 연주회에서, 현수야말로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연 채 음악을 받아들이는 '멋진 청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나는 현수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음달 11일 있을 그의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이 뭉클하게 커지는 걸 느꼈다.
[문화 프런티어](5)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
기사입력 2010-10-26 21:57 최종수정 2010-10-26 22:03
ㆍ열정적 ‘눈빛’에 ‘열도’가 빠졌다
일본에서 소화해야 하는 연주회가 연간 100회에 이른다. 2008년 11월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다. 이 콩쿠르에 대한 열광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한층 더하다. 당시 결선 장면을 TV 클래식채널로 생중계하고 뉴스에서도 보도할 정도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는 “우승 발표 직후에도 일본 기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롱 티보 콩쿠르 전에도 일본 연주를 하긴 했죠. 1년에 열번 정도의 횟수였어요. 한데 지난해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NHK 심포니, 도쿄필하모닉 등 일본의 중요한 오케스트라와는 거의 다 협연했죠. 도쿄, 나고야, 요코하마, 벳푸 등 아주 많은 도시를 다녔어요. 특히 지난 7월에는 일주일에 세차례씩 연주회를 소화해야 할 만큼 바빴어요.”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의 한 찻집에서 마주앉은 신현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일본에서의 근황을 전했다. 어떤 일에도 쉽게 흥분할 것 같지 않은 태도.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어떤 좌절의 상황에서도 크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물 세살. 하지만 아마도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수많은 콩쿠르에 출전하며 평상심을 터득했을 것이다. 1999년 이화경향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예후디 메뉴인, 요한슨, 파가니니, 티보 바가, 시벨리우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 수많은 국제대회 경험이 그에게 ‘쉽게 흥분하거나 좌절하는 것’과 거리를 두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어린 소녀의 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평상심만으로 일본에서 현재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연주자들은 일본에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뭔가? 왜 일본인들은 한국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에게 열광하는가? 혹자는 패션모델 뺨칠 만한 신현수의 외모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물론 그것도 인기의 한 요인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나이든 애호가들이 대부분인 일본 클래식 시장에서 외모만으로 어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그것을 최근 일본에서 신현수의 음반을 내놓은 ‘에이벡스’의 홈페이지에서 유추해볼 수 있겠다. 거기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의 강한 눈빛”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에도 좋은 솔리스트들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는 대개 음악의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연주자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한테서 일본 연주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기질을 발견하게 된대요. 일본에서 만나는 분들이 가끔 그런 얘기를 해주세요. 뜨겁고 열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다른 일본 연주자들과 느낌이 아주 다르다고 해요. 에이벡스 홈페이지를 봐도 그래요. 다른 연주자들 사진은 다들 단아한 모습인데, 저만 유독 묘한 분위기의 사진을 올려놨더라고요.”
신현수는 꽤나 쑥스러워하며 그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본 연주자들에게서 찾기 힘든 ‘열정’이 느껴진다는 것. 그의 스승인 김남윤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의 말마따나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특유의 카리스마”야말로 일본 클래식 애호가들이 신현수에게 몰입하는 이유인 셈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열정을 이미 눈으로 확인한 적도 있다. 롱 티보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던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인터넷 동영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연주 모습은 그야말로 뜨겁다. 신현수는 “장갑차가 돌진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를 상상하면서 그 곡을 연주했었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 태생. 알려져 있다시피 네 살 위의 언니 신아라도 바이올리니스트다. 둘의 기질은 사뭇 다르다. “언니는 다른 연주자들과의 앙상블에 강하고, 나는 솔리스트가 체질에 맞는 것 같다”는 게 신현수의 설명이다. 바이올린을 처음 들었던 게 바로 그 언니 덕택. 언니가 엄마와 함께 작은 방에 틀어박혀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네살짜리 꼬마는 문 밖에서 종종 잠들곤 했다. 그러다 엄마한테 “나도 바이올린을 하겠다”고 칭얼댔고, 덕분에 ‘장난감 바이올린’을 최초의 악기로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신현수와 그의 언니 아라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교수의 레슨도 없이, 그렇게 전주의 ‘동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남윤 교수를 사사했다.
하지만 이제 신현수의 손에 들려있는 애기(愛器)는 스트라디바리우스 1710년산(産)이다. 일본의 대표적 음악재단인 닛폰 뮤직 파운데이션(Nippon Music Foundation)이 대여해준 악기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것들이 바로 1710년에서 172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 이 또한 일본에서 신현수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는 바로 그 악기로 2주 전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콘서트홀에서 연주했다. 그리고 다음달 11일, 드디어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그동안 국내에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몇차례 있었지만 리사이틀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이올린도 금호문화재단에서 내어준 과다니니를 사용할 예정. 요즘 한창 리사이틀을 준비 중인 신현수는 “두 악기의 소리가 너무 다르다”며 이렇게 말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맑고 높은 음색을 가졌어요. 여러 악기 속에서 연주할 때도 자신의 모습을 금세 드러낼 줄 아는 바이올린이죠. 어떻게 보면 다른 악기들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튀는 소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과다니니는 완전 달라요. 아주 깊고 굵직한 소리를 내요. 두 악기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적응하는 게 쉽진 않죠. 하지만 정말 행복한 고민이죠.”
신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유독 관심 많은 스물 세살의 바이올리니스트. 연주자가 안 됐으면 “패션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는 그는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중성적인 느낌, 그러면서도 그 속에 담긴 여성성이 좋다”고 했다. 또 “뱃속에서 울려나오는 비욘세의 목소리도 매력적”이라고 했다. 다음달 1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에서는 바흐의 ‘샤콘느’, 모차르트의 소나타 21번, 비에냐프스키의 ‘화려한 폴로네이즈 1번’, 베토벤의 소나타 9번 ‘크로이처’ 등을 연주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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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0-26 21:57 최종수정 2010-10-26 22:03
ㆍ열정적 ‘눈빛’에 ‘열도’가 빠졌다
일본에서 소화해야 하는 연주회가 연간 100회에 이른다. 2008년 11월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다. 이 콩쿠르에 대한 열광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한층 더하다. 당시 결선 장면을 TV 클래식채널로 생중계하고 뉴스에서도 보도할 정도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는 “우승 발표 직후에도 일본 기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롱 티보 콩쿠르 전에도 일본 연주를 하긴 했죠. 1년에 열번 정도의 횟수였어요. 한데 지난해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NHK 심포니, 도쿄필하모닉 등 일본의 중요한 오케스트라와는 거의 다 협연했죠. 도쿄, 나고야, 요코하마, 벳푸 등 아주 많은 도시를 다녔어요. 특히 지난 7월에는 일주일에 세차례씩 연주회를 소화해야 할 만큼 바빴어요.”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의 한 찻집에서 마주앉은 신현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일본에서의 근황을 전했다. 어떤 일에도 쉽게 흥분할 것 같지 않은 태도.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어떤 좌절의 상황에서도 크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물 세살. 하지만 아마도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수많은 콩쿠르에 출전하며 평상심을 터득했을 것이다. 1999년 이화경향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예후디 메뉴인, 요한슨, 파가니니, 티보 바가, 시벨리우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 수많은 국제대회 경험이 그에게 ‘쉽게 흥분하거나 좌절하는 것’과 거리를 두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어린 소녀의 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평상심만으로 일본에서 현재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연주자들은 일본에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뭔가? 왜 일본인들은 한국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에게 열광하는가? 혹자는 패션모델 뺨칠 만한 신현수의 외모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물론 그것도 인기의 한 요인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나이든 애호가들이 대부분인 일본 클래식 시장에서 외모만으로 어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그것을 최근 일본에서 신현수의 음반을 내놓은 ‘에이벡스’의 홈페이지에서 유추해볼 수 있겠다. 거기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의 강한 눈빛”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에도 좋은 솔리스트들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는 대개 음악의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연주자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한테서 일본 연주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기질을 발견하게 된대요. 일본에서 만나는 분들이 가끔 그런 얘기를 해주세요. 뜨겁고 열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다른 일본 연주자들과 느낌이 아주 다르다고 해요. 에이벡스 홈페이지를 봐도 그래요. 다른 연주자들 사진은 다들 단아한 모습인데, 저만 유독 묘한 분위기의 사진을 올려놨더라고요.”
신현수는 꽤나 쑥스러워하며 그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본 연주자들에게서 찾기 힘든 ‘열정’이 느껴진다는 것. 그의 스승인 김남윤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의 말마따나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특유의 카리스마”야말로 일본 클래식 애호가들이 신현수에게 몰입하는 이유인 셈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열정을 이미 눈으로 확인한 적도 있다. 롱 티보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던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인터넷 동영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연주 모습은 그야말로 뜨겁다. 신현수는 “장갑차가 돌진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를 상상하면서 그 곡을 연주했었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 태생. 알려져 있다시피 네 살 위의 언니 신아라도 바이올리니스트다. 둘의 기질은 사뭇 다르다. “언니는 다른 연주자들과의 앙상블에 강하고, 나는 솔리스트가 체질에 맞는 것 같다”는 게 신현수의 설명이다. 바이올린을 처음 들었던 게 바로 그 언니 덕택. 언니가 엄마와 함께 작은 방에 틀어박혀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네살짜리 꼬마는 문 밖에서 종종 잠들곤 했다. 그러다 엄마한테 “나도 바이올린을 하겠다”고 칭얼댔고, 덕분에 ‘장난감 바이올린’을 최초의 악기로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신현수와 그의 언니 아라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교수의 레슨도 없이, 그렇게 전주의 ‘동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남윤 교수를 사사했다.
하지만 이제 신현수의 손에 들려있는 애기(愛器)는 스트라디바리우스 1710년산(産)이다. 일본의 대표적 음악재단인 닛폰 뮤직 파운데이션(Nippon Music Foundation)이 대여해준 악기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것들이 바로 1710년에서 172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 이 또한 일본에서 신현수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는 바로 그 악기로 2주 전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콘서트홀에서 연주했다. 그리고 다음달 11일, 드디어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그동안 국내에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몇차례 있었지만 리사이틀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이올린도 금호문화재단에서 내어준 과다니니를 사용할 예정. 요즘 한창 리사이틀을 준비 중인 신현수는 “두 악기의 소리가 너무 다르다”며 이렇게 말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맑고 높은 음색을 가졌어요. 여러 악기 속에서 연주할 때도 자신의 모습을 금세 드러낼 줄 아는 바이올린이죠. 어떻게 보면 다른 악기들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튀는 소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과다니니는 완전 달라요. 아주 깊고 굵직한 소리를 내요. 두 악기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적응하는 게 쉽진 않죠. 하지만 정말 행복한 고민이죠.”
신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유독 관심 많은 스물 세살의 바이올리니스트. 연주자가 안 됐으면 “패션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는 그는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중성적인 느낌, 그러면서도 그 속에 담긴 여성성이 좋다”고 했다. 또 “뱃속에서 울려나오는 비욘세의 목소리도 매력적”이라고 했다. 다음달 1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에서는 바흐의 ‘샤콘느’, 모차르트의 소나타 21번, 비에냐프스키의 ‘화려한 폴로네이즈 1번’, 베토벤의 소나타 9번 ‘크로이처’ 등을 연주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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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만난 사람]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
기사입력 2009-06-18 17:52ㆍ콩쿠르 소녀, 비상이 시작되다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는 말수 적고 싱거워 보이는 외모 속에 묘한 불꽃을 품었다. 그렇다고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건 아니다. 순식간에 얼음처럼 싸늘해지면서 음악의 상승과 하강을 멋들어지게 오간다. 이제 겨우 스물두 살. 하지만 음악을 조절하는 능력은 ‘나이’를 훌쩍 웃돈다. 지난해 11월 프랑스의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살바토레 아카르도(68)는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비행기가 땅을 떠나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비상한다”고 극찬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젊은 시절의 정경화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싱겁게 웃으면서 “그저 음악에 몰입할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신현수가 19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 협연한다. 롱 티보 콩쿠르 우승으로 언론의 조명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프로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는 셈이다. 신현수는 “이반 피셔는 열정과 카리스마가 대단한 지휘자. 그래서 연주회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정동 경향신문사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앉은 신현수는 “오히려 인터뷰가 더 긴장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았고,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생각을 요리조리 정리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이 거리에 두번째예요. 초등학교 다닐 때 이화경향콩쿠르에서 우승했거든요. 그때 처음 왔고, 이번이 두번째예요.” 마침 커피숍 아래로 일군의 중학생들이 지나갔다. 정동길에 자리한 명문 학교 학생들. 현재 한국의 젊은 연주자 대다수를 배출해내고 있는 유명한 학교다. 하지만 신현수는 그 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선욱과 더불어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거둔 최고의 음악적 성과임에 틀림없지만, 전북 전주의 ‘동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던 ‘비주류’ 학생이었다. 그 때문에 롱 티보 우승은 더욱 화제가 됐고, ‘어린 현수’의 마음을 “불편하게까지 만들”면서 ‘불우한 환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묘사됐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좀 힘들었어요. 물론 아빠가 안 계신 탓에 엄마가 많이 고생하시긴 했지만, 저희가 그렇게까지 가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거든요. 저희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도 저희 엄마는 언니(바이올리니스트 신아라)와 제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처음엔 유치원에서, 조금 재능을 보이니까 동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갔어요. 언니 덕을 많이 봤죠. 예비학교에 먼저 들어간 언니가 바이올린 연습하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공부가 됐거든요.”
신현수는 “처음 갖고 놀았던 바이올린은 ‘과자 상자’였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금새 알아 듣기 어려웠다. 그러자 “진짜 바이올린이 아니고요, 그냥 과자 상자예요. 모양은 바이올린처럼 생겼지만 종이로 만든 거죠. 그 속에 사탕이랑 과자가 들어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어 그는 “엄마랑 네 살 위의 언니가 방문을 아예 닫아놓고 바이올린을 연습했어요. 그러면 저는 그 방문 앞에서 잠들곤 했대요”라고 말했다. 이 ‘아련한’ 기억은 그의 잠재의식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신현수는 오랫동안 ‘콩쿠르의 소녀’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돌이켰다.
“그게 저한테 중요한 발판이 돼줄 거라고 믿었어요. 엄마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1년에 하나씩 출전했죠. 국내 콩쿠르에선 모두 1등을 차지했어요. 그러다가 영국 메뉴힌 콩쿠르에서 2등을 했어요. 2등은 처음이었죠. 좀 충격이었어요. 역시 세계무대는 만만치 않구나 라는 것도 느꼈죠. 그래서 더 열심히 했나 봐요. 다음해에 미국 요한슨 콩쿠르에서 1등을 했죠.”
하지만 그것은 모두 ‘주니어 부문’에서의 영광이었을 뿐. 이후 그는 2004년 파가니니 콩쿠르 3위, 2005년 티보 바가 콩쿠르 3위, 시벨리우스 콩쿠르 3위, 하노버 콩쿠르 2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5위 등을 차지하면서 ‘1등’의 영광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약이었을까. 그는 ‘연습 벌레’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롱 티보 콩쿠르에서 2위없는 우승을 마침내 거머쥐었고, 그것은 결국 그의 기대처럼 ‘발판’의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콩쿠르 때는 귀도 잘 안 들리고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어요.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죠. 롱 티보 때는 더 심했어요. 6등부터 호명을 하는데 끝까지 저를 안 부르는 거예요. 프랑스어를 못 알아 들은 거죠. 옆에 있던 친구가 ‘네가 1등이래’라고 알려줬어요. 마치 꿈꾸는 것 같았어요. 1시간 후에 엄마한테 전화했죠. 엄마는 계속 울기만 했어요.”
신현수는 롱 티보 콩쿠르 직전에 실제로 꿈을 꿨다고 했다. 꿈속에서 여러마리 뱀에게 물렸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길몽이었다. 그는 “요즘 끌리는 음악은 프로코피에프, 바르토크, 쇼스타코비치처럼 근육질의 음악들”이라면서 “롱 티보에서 프로코피에프를 연주할 때는, 장갑차가 돌진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의 이미지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오늘 저녁 워싱턴 심포니와 협연할 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워싱턴 심포니는 이밖에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도 연주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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