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정명훈을 몇차례 만났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5년 10월 일본 도쿄의 오페라시티 빌딩에 자리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의 만남이었다. 당시 그는 도쿄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연주회를 막 끝낸 후였고, 그 자리는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 자리였다. 정마에는 그날 일행 중에서 가장 술을 잘 마셨다. "음식을 내가 알아서 시켜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한 뒤에 웨이터를 불러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는, 음식이 나오면 레시피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듣던 대로 그는 요리에 대해 해박했다. 그날 내가 본 정명훈은 거푸 마신 와인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약간 취한 발음으로 평상시보다 훨씬 다변((多辯)을 쏟아냈다. 할 수 없이 나는 기자수첩을 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취중 인터뷰'는 제대로 기사화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곧바로 기사를 출고했지만, 지면 사정상 기사의 3분의1이 아예 날아가버렸던 것. 그 이상한 기사가 바로 이것이다.
그 다음 해에 이뤄진 만남은 순전히 '서울시향 예술감독' 정명훈과의 인터뷰였다. 서울시향 취임 1년을 넘기면서 중간 점검의 성격을 가진 인터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정마에는 찾아가는 시민음악회 등으로 한국에 클래식 바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좀 냉소적이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당시 그 바람은 여러 신문 지면에 잇따라 대서특필되면서 속도와 풍량을 키웠는데, 심지어 경향신문의 고정 필자였던 고려대 김우창 선생께서도 정마에의 찾아가는 음악회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글을 쓰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글을 읽는 내 심정은 좀 답답했었던 게 사실이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밖에도 나는 정마에 인터뷰를 여러 차례 더했던 것 같다. 그중에 어떤 인터뷰는 어느 교수께서 자신의 책을 내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거의 통째로 표절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글보시'도 꽤 한 셈이다. 한데 재밌는 것은 이 양반의 표절 방식이다. 어미와 조사만 살짝 바꾸기. 내가 알기로 그것은 동서고금의 표절 테크닉 중에서도 가장 치졸한 방식일 텐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립대학 선생께서 국가의 녹을 받아가며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정마에와 가장 최근 이뤄졌던 인터뷰는 지난 5월의 유럽 투어를 앞두고 진행했던 것. 하지만 나는 내가 쓴 그 인터뷰가 스스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래저래 독자에게 미안할 뿐이다. 대신 그보다 앞서 진행했던, 올해 초의 인터뷰를 이 자리에 올려놓는다.
서울시향·도쿄필 지휘자 정명훈 인터뷰
기사입력 2005-11-02 18:03 최종수정 2005-11-02 18:03
10월의 마지막 날, 일본 도쿄 오페라시티. 같은 빌딩 3층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지휘자 정명훈을 만났다. 밤 11시였다. 그는 술이 얼큰하게 올라 있었다. 그날 오후 7시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막을 올렸던 도쿄필하모닉의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협연자로 나섰던 한국의 첼리스트 고봉인(20)과 일본의 바이올리니스트 쇼지 사야카(22)의 연주도 크게 나무랄 데 없었다. 지휘자 정명훈은 상기된 표정으로 “오늘 연주 좋았지요?”라고 입을 열었고, 이어서 마음속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지휘자는 별것 아니다. 예순 살 되면 지휘 그만둘 거다”라고 말할 때는 잠시 표정이 굳기도 했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도쿄필하모닉과 서울시향을 다 맡고 있는데.
“도쿄필하모닉에서 지휘자 노릇하는 건 편하다. 일본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앙상블’을 중시하니까. 그들은 척척 맞지 않으면 스스로 못견뎌한다. 게다가 일본 연주자들은 알아서 다 준비해온다. 집에 가서 연습하라고 채근할 필요가 없다. 내 역할은 잘 걸어가는 사람들이 가끔 한번씩 날아가게 만들어주는 거다. 그런데 한국 오케스트라는 처음부터 날려고 한다. 끝에 가서 멋지게 날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날개를 푸드덕거리니까 아무것도 안된다. 그래서 이제 제대로 해보자는 거다. 그게 바로 서울시향이다.”
-오늘 두 협연자를 평가한다면.
“아, 고봉인. 재주가 너무 많아 탈이다.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데다 학문적 자질이나 열정도 대단하다. (봉인이가 재학중인)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들한테 물어봐도 나하고 똑같은 대답을 할 거다. 그런데 이게 아주 고약한 문제다. 내가 스무 살 조금 넘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명훈이 넌 진로 고민할 필요 없어서 행복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봉인이는 막판에 가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게 뭘지 난 모르겠다. 그 친구는 스테이지 경험이나 ‘끼’ 같은 거, 그런 것이 좀 약하다. 우리 누나(정경화)는 젊었을 때 그게 정말 대단했지.”
-쇼지는 어떤가. 지금 일본에서 이 친구의 인기가 굉장한데.
“진짜 음악가가 되려면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틴에이저 시절에 연주 잘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한번쯤 벌판으로 나가야 한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냥 죽을 수도 있다. 애들이 평생 테크닉에만 매달리면 어른이 돼서도 균형감각 없는 연주만 한다. 쇼지? 그 친구도 앞으로 힘든 시기가 올 수 있다. 음악은 궁극적으로 밸런스니까. 결국 정신적인 걸 보여줘야 한다.”
-베를린필하모닉이 곧 한국에 온다. 최근의 베를린필 사운드를 어떻게 생각하나?
“12년 전 베를린필과 리허설을 하다가 그만둬버린 적이 있다. 말을 안 듣더라. 10년 지나서 다시 만났더니 오케스트라가 확 젊어져 있었다. 사실 지휘자를 음악가라고 부르기 힘든 거 아닌가. 연주자가 더 중요하다. 지휘자? 이게 뭐 음악가인지 정치가인지…. 나는 60세가 되면 벗어날 거다. 하지만 ‘예스’한 것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진다. 우리 어머니가 그걸 안다. 내가 어릴 때 말을 너무 못해서, ‘너 음악하고 싶니?’라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었거든. 혼자서 인상만 쓰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 대답을 정말 오래 기다리셨다. 나는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이 큰 편이다. 서울시향에 대해 약속한 것은 꼭 지키겠다.”
12시가 임박한 시간. 레스토랑 점원이 다가와 문 닫을 시간이라고 얘기하자 정명훈은 그제서야 “어, 이제 일어나야지” 하며 윗옷을 걸쳤다. 그가 지휘하는 도쿄필하모닉과 고봉인, 쇼지 사야카의 연주회는 중국 상하이를 거쳐 한국으로 이어진다. 7일 부산문화회관, 9일 제주도문예회관, 11일 과천시민회관, 12일 세종문화회관, 1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다.
〈도쿄|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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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02 18:03 최종수정 2005-11-02 18:03
10월의 마지막 날, 일본 도쿄 오페라시티. 같은 빌딩 3층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지휘자 정명훈을 만났다. 밤 11시였다. 그는 술이 얼큰하게 올라 있었다. 그날 오후 7시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막을 올렸던 도쿄필하모닉의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협연자로 나섰던 한국의 첼리스트 고봉인(20)과 일본의 바이올리니스트 쇼지 사야카(22)의 연주도 크게 나무랄 데 없었다. 지휘자 정명훈은 상기된 표정으로 “오늘 연주 좋았지요?”라고 입을 열었고, 이어서 마음속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지휘자는 별것 아니다. 예순 살 되면 지휘 그만둘 거다”라고 말할 때는 잠시 표정이 굳기도 했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도쿄필하모닉과 서울시향을 다 맡고 있는데.
“도쿄필하모닉에서 지휘자 노릇하는 건 편하다. 일본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앙상블’을 중시하니까. 그들은 척척 맞지 않으면 스스로 못견뎌한다. 게다가 일본 연주자들은 알아서 다 준비해온다. 집에 가서 연습하라고 채근할 필요가 없다. 내 역할은 잘 걸어가는 사람들이 가끔 한번씩 날아가게 만들어주는 거다. 그런데 한국 오케스트라는 처음부터 날려고 한다. 끝에 가서 멋지게 날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날개를 푸드덕거리니까 아무것도 안된다. 그래서 이제 제대로 해보자는 거다. 그게 바로 서울시향이다.”
-오늘 두 협연자를 평가한다면.
“아, 고봉인. 재주가 너무 많아 탈이다.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데다 학문적 자질이나 열정도 대단하다. (봉인이가 재학중인)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들한테 물어봐도 나하고 똑같은 대답을 할 거다. 그런데 이게 아주 고약한 문제다. 내가 스무 살 조금 넘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명훈이 넌 진로 고민할 필요 없어서 행복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봉인이는 막판에 가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게 뭘지 난 모르겠다. 그 친구는 스테이지 경험이나 ‘끼’ 같은 거, 그런 것이 좀 약하다. 우리 누나(정경화)는 젊었을 때 그게 정말 대단했지.”
-쇼지는 어떤가. 지금 일본에서 이 친구의 인기가 굉장한데.
“진짜 음악가가 되려면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틴에이저 시절에 연주 잘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한번쯤 벌판으로 나가야 한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냥 죽을 수도 있다. 애들이 평생 테크닉에만 매달리면 어른이 돼서도 균형감각 없는 연주만 한다. 쇼지? 그 친구도 앞으로 힘든 시기가 올 수 있다. 음악은 궁극적으로 밸런스니까. 결국 정신적인 걸 보여줘야 한다.”
-베를린필하모닉이 곧 한국에 온다. 최근의 베를린필 사운드를 어떻게 생각하나?
“12년 전 베를린필과 리허설을 하다가 그만둬버린 적이 있다. 말을 안 듣더라. 10년 지나서 다시 만났더니 오케스트라가 확 젊어져 있었다. 사실 지휘자를 음악가라고 부르기 힘든 거 아닌가. 연주자가 더 중요하다. 지휘자? 이게 뭐 음악가인지 정치가인지…. 나는 60세가 되면 벗어날 거다. 하지만 ‘예스’한 것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진다. 우리 어머니가 그걸 안다. 내가 어릴 때 말을 너무 못해서, ‘너 음악하고 싶니?’라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었거든. 혼자서 인상만 쓰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 대답을 정말 오래 기다리셨다. 나는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이 큰 편이다. 서울시향에 대해 약속한 것은 꼭 지키겠다.”
12시가 임박한 시간. 레스토랑 점원이 다가와 문 닫을 시간이라고 얘기하자 정명훈은 그제서야 “어, 이제 일어나야지” 하며 윗옷을 걸쳤다. 그가 지휘하는 도쿄필하모닉과 고봉인, 쇼지 사야카의 연주회는 중국 상하이를 거쳐 한국으로 이어진다. 7일 부산문화회관, 9일 제주도문예회관, 11일 과천시민회관, 12일 세종문화회관, 1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다.
〈도쿄|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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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해에 이뤄진 만남은 순전히 '서울시향 예술감독' 정명훈과의 인터뷰였다. 서울시향 취임 1년을 넘기면서 중간 점검의 성격을 가진 인터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정마에는 찾아가는 시민음악회 등으로 한국에 클래식 바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좀 냉소적이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당시 그 바람은 여러 신문 지면에 잇따라 대서특필되면서 속도와 풍량을 키웠는데, 심지어 경향신문의 고정 필자였던 고려대 김우창 선생께서도 정마에의 찾아가는 음악회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글을 쓰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글을 읽는 내 심정은 좀 답답했었던 게 사실이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지휘자 정명훈 “내 이름 팔아서라도 클래식 대중화 힘쓸 것”
기사입력 2006-07-24 18:09 최종수정 2006-07-24 18:09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인 지휘자 정명훈(53)의 행보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지난 18일 귀국한 그는 19~20일 ‘노들섬 아트센터 설계안’ 심사에 참여했고, 24일 고려대에서 열리는 ‘찾아가는 시민음악회’를 시작으로 8월말까지 10차례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할 참이다. ‘클래식 비수기’인 한여름을 지휘자 정명훈이 뜨겁게 달구는 셈이다. 이제 ‘한국의 지휘자’로서 온전히 적응이 된 걸까. 인터뷰할 때마다 ‘동문서답, 횡설수설’로 일관해 질문자를 애먹게 하던 모습도 거의 사라졌다. 지난 22일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만난 지휘자 정명훈은 이례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다.
현재 프랑스 라디오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를 비롯해 도쿄필하모닉 특별예술고문, 서울시향 예술감독을 동시에 맡고 있는 그는 “나 자신도 유감스럽지만 아직도 한국어보다 외국어로 말하는 게 편하다”면서 “하지만 이제 한국에 뿌리내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개인적 소회를 털어놨다. 또 이번 귀국의 가장 큰 숙제랄 수 있는 서울시향의 전용 콘서트홀 건립 문제에 대해서는 “오세훈 시장으로부터 전용 콘서트홀을 지어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자신있게 답했다. ‘꼭 노들섬이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노들섬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며 “이명박 전 시장이 노들섬에 함께 지으려고 했던 ‘오페라하우스’는 당장 급한 게 아니기 때문에 콘서트홀 건립 이후에 생각해도 될 문제”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3월에 ‘세계적 오케스트라를 향한 첫 걸음’을 강조하면서 서울시향에 취임했다. 이제 1년 반이 지났다. 현재 서울시향의 수준에 대해 어느 정도 점수를 주겠나.
“어휴, 벌써 그렇게 됐나? 작년엔 새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 주력했고, 올해 1월에 ‘베토벤 사이클’을 시작한 시점부터가 서울시향의 새출발이라고 봐야겠다. 서울시향을 오페라에 비유하자면, 이제 프렐류드(전주곡) 단계일 뿐이다. 점수로 평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예전의 서울시향에 비해 적어도 2배는 좋아졌다. 세계적으로 톱클라스에 속하는 오케스트라는 10~12개다. 그 다음 2진이 50개, 3진이 100개 정도다. 4진은 더 많고 마지막 5그룹은 셀 수 없을 만큼 널렸다. 이제 서울시향은 4진으로 올라섰다. 전용 콘서트홀이 지어지는 시점에 3진에서 2진으로 도약하는 게 목표다. 세계 탑10? 그건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서울시장이 바뀌었다. 오세훈 시장은 “노들섬 예술센터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다시 수렴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귀국한 이유 중 하나가 전용 콘서트홀 문제 때문이다. 그저께 새 시장으로부터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을 꼭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곳이 노들섬일지, 다른 장소일지는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빨리 지어지면 3~4년인데, 시간이 좀더 걸릴 걸로 예상된다. 조금 늦어져도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그때까지 서울시향을 좀더 단련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셈이다. 새 콘서트홀에서 첫 연주를 하는 순간이 본격적으로 서울시향의 시대가 열리는 날이다. 오케스트라에 가장 중요한 ‘자극’은 전용 콘서트홀 아닌가. 그 다음 자극이 레코딩과 연주투어다.”
-콘서트홀이 어느 정도의 규모이길 원하는가. 얼마 전까지 예정지로 거론됐던 노들섬은 예술센터를 만들기엔 좁다.
“음…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제대로 울려주기 위해서는 1,800석 이내로 하는 게 좋다. 그런데 비즈니스적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 콘서트홀이 작으면 입장료가 올라간다. 그걸 감안한다면 2,200석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27일 환경재단이 주최하는 ‘물구나무 환경음악회’를 지휘하던데, 평소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물론이다. 나는 10년 전부터 환경문제를 위한 콘서트를 해왔다. 3회째 진행하다가 재정 문제로 계속하기가 힘들게 됐지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건 중요한 일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꼭 필요하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환경’과 ‘어린이’를 위해 일할 것이다.”
-노들섬에 예술센터를 짓는 것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난 한번도 노들섬에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노들섬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다가, 이번에 설계안 심사하는 것 때문에 그저께 처음으로 가봤다. 좁고 황폐하고 시끄럽더라. 그런데… (그는 이 부분에서 잠깐 뜸을 들였다) 이번에 공모된 7개 프로젝트 가운데 1개의 아이디어가 괜찮았다. 그 황폐한 섬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는데, 거의 섬을 다시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콘서트홀을 그 속에 보석처럼 살짝 숨겨놓는 디자인이었다. 삼성의 리움미술관을 설계했던 프랑스 건축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다.”
-서울시향이 지난 1월부터 ‘찾아가는 시민음악회’를 하고 있다. 서울시향은 지금까지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베토벤을 약 5만명이 들은 것으로 추정한다.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긍정성도 있지만, 지휘자 정명훈을 내세운 ‘지나친 바람몰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정명훈을 한번 보려고 오는 분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가. 외국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기부콘서트에 유명인을 동원한다. 그 유명인을 보려고 왔더라도 콘서트의 메시지에 동참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의 99%는 서울시향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나머지 1%는 음악에 관심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내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히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지 않나? 그런데 오늘 밤에 TV에도 나간다.”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서 어떤 사운드를 추구하나. 지휘자로서 본인의 스타일을 자평한다면.
“정확하고 깨끗하고 확실한 연주,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강조했던 거다. 겉멋 부리는 것보다 작곡가의 뜻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게 중요하다. 베토벤 음악이 얼마나 훌륭한가? 정확하게만 연주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못하면서 멋부터 부리려고 한다.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서울시향을 그만둘 때,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해도 ‘정확하고 깨끗한 앙상블’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지휘자로서의 스타일? 양측면이 다 있다. 독일인 같은 무뚝뚝함이나 완벽주의적 성향도 있고, 그 반대의 모습도 있다. 내가 처음 지휘를 맡았던 독일의 자를란트 오케스트라는 더 엄격하길 요구했다. 하지만 파리오페라단은 그 반대로 느꼈을 것이다.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너무 호랑이처럼 밀어붙이면 자칫 음악이 딱딱해진다.”
-작년에 일본에서 인터뷰할 때, 60세까지만 지휘하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예 지휘를 안하겠다는 건 아니고, 오케스트라의 공식 책임을 맡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지휘, 어린이들한테 의미있는 지휘, 그런 것들만 하고 싶다. 지휘?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기만 하지. 내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만 있었다면, 절대 지휘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을 잘하나.
“그런가?(웃음). 사실 지금도 한국말이 힘겹다. 영어가 가장 편하고, 그 다음은 불어, 이탈리아어 순서다. 하지만 이제 나이를 좀 먹어서 그런지 자꾸 고향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게 좋다.”
〈글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사진 남호진기자 land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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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7-24 18:09 최종수정 2006-07-24 18:09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인 지휘자 정명훈(53)의 행보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지난 18일 귀국한 그는 19~20일 ‘노들섬 아트센터 설계안’ 심사에 참여했고, 24일 고려대에서 열리는 ‘찾아가는 시민음악회’를 시작으로 8월말까지 10차례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할 참이다. ‘클래식 비수기’인 한여름을 지휘자 정명훈이 뜨겁게 달구는 셈이다. 이제 ‘한국의 지휘자’로서 온전히 적응이 된 걸까. 인터뷰할 때마다 ‘동문서답, 횡설수설’로 일관해 질문자를 애먹게 하던 모습도 거의 사라졌다. 지난 22일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만난 지휘자 정명훈은 이례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다.
현재 프랑스 라디오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를 비롯해 도쿄필하모닉 특별예술고문, 서울시향 예술감독을 동시에 맡고 있는 그는 “나 자신도 유감스럽지만 아직도 한국어보다 외국어로 말하는 게 편하다”면서 “하지만 이제 한국에 뿌리내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개인적 소회를 털어놨다. 또 이번 귀국의 가장 큰 숙제랄 수 있는 서울시향의 전용 콘서트홀 건립 문제에 대해서는 “오세훈 시장으로부터 전용 콘서트홀을 지어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자신있게 답했다. ‘꼭 노들섬이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노들섬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며 “이명박 전 시장이 노들섬에 함께 지으려고 했던 ‘오페라하우스’는 당장 급한 게 아니기 때문에 콘서트홀 건립 이후에 생각해도 될 문제”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3월에 ‘세계적 오케스트라를 향한 첫 걸음’을 강조하면서 서울시향에 취임했다. 이제 1년 반이 지났다. 현재 서울시향의 수준에 대해 어느 정도 점수를 주겠나.
“어휴, 벌써 그렇게 됐나? 작년엔 새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 주력했고, 올해 1월에 ‘베토벤 사이클’을 시작한 시점부터가 서울시향의 새출발이라고 봐야겠다. 서울시향을 오페라에 비유하자면, 이제 프렐류드(전주곡) 단계일 뿐이다. 점수로 평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예전의 서울시향에 비해 적어도 2배는 좋아졌다. 세계적으로 톱클라스에 속하는 오케스트라는 10~12개다. 그 다음 2진이 50개, 3진이 100개 정도다. 4진은 더 많고 마지막 5그룹은 셀 수 없을 만큼 널렸다. 이제 서울시향은 4진으로 올라섰다. 전용 콘서트홀이 지어지는 시점에 3진에서 2진으로 도약하는 게 목표다. 세계 탑10? 그건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서울시장이 바뀌었다. 오세훈 시장은 “노들섬 예술센터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다시 수렴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귀국한 이유 중 하나가 전용 콘서트홀 문제 때문이다. 그저께 새 시장으로부터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을 꼭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곳이 노들섬일지, 다른 장소일지는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빨리 지어지면 3~4년인데, 시간이 좀더 걸릴 걸로 예상된다. 조금 늦어져도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그때까지 서울시향을 좀더 단련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셈이다. 새 콘서트홀에서 첫 연주를 하는 순간이 본격적으로 서울시향의 시대가 열리는 날이다. 오케스트라에 가장 중요한 ‘자극’은 전용 콘서트홀 아닌가. 그 다음 자극이 레코딩과 연주투어다.”
-콘서트홀이 어느 정도의 규모이길 원하는가. 얼마 전까지 예정지로 거론됐던 노들섬은 예술센터를 만들기엔 좁다.
“음…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제대로 울려주기 위해서는 1,800석 이내로 하는 게 좋다. 그런데 비즈니스적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 콘서트홀이 작으면 입장료가 올라간다. 그걸 감안한다면 2,200석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27일 환경재단이 주최하는 ‘물구나무 환경음악회’를 지휘하던데, 평소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물론이다. 나는 10년 전부터 환경문제를 위한 콘서트를 해왔다. 3회째 진행하다가 재정 문제로 계속하기가 힘들게 됐지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건 중요한 일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꼭 필요하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환경’과 ‘어린이’를 위해 일할 것이다.”
-노들섬에 예술센터를 짓는 것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난 한번도 노들섬에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노들섬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다가, 이번에 설계안 심사하는 것 때문에 그저께 처음으로 가봤다. 좁고 황폐하고 시끄럽더라. 그런데… (그는 이 부분에서 잠깐 뜸을 들였다) 이번에 공모된 7개 프로젝트 가운데 1개의 아이디어가 괜찮았다. 그 황폐한 섬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는데, 거의 섬을 다시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콘서트홀을 그 속에 보석처럼 살짝 숨겨놓는 디자인이었다. 삼성의 리움미술관을 설계했던 프랑스 건축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다.”
-서울시향이 지난 1월부터 ‘찾아가는 시민음악회’를 하고 있다. 서울시향은 지금까지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베토벤을 약 5만명이 들은 것으로 추정한다.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긍정성도 있지만, 지휘자 정명훈을 내세운 ‘지나친 바람몰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정명훈을 한번 보려고 오는 분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가. 외국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기부콘서트에 유명인을 동원한다. 그 유명인을 보려고 왔더라도 콘서트의 메시지에 동참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의 99%는 서울시향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나머지 1%는 음악에 관심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내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히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지 않나? 그런데 오늘 밤에 TV에도 나간다.”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서 어떤 사운드를 추구하나. 지휘자로서 본인의 스타일을 자평한다면.
“정확하고 깨끗하고 확실한 연주,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강조했던 거다. 겉멋 부리는 것보다 작곡가의 뜻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게 중요하다. 베토벤 음악이 얼마나 훌륭한가? 정확하게만 연주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못하면서 멋부터 부리려고 한다.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서울시향을 그만둘 때,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해도 ‘정확하고 깨끗한 앙상블’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지휘자로서의 스타일? 양측면이 다 있다. 독일인 같은 무뚝뚝함이나 완벽주의적 성향도 있고, 그 반대의 모습도 있다. 내가 처음 지휘를 맡았던 독일의 자를란트 오케스트라는 더 엄격하길 요구했다. 하지만 파리오페라단은 그 반대로 느꼈을 것이다.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너무 호랑이처럼 밀어붙이면 자칫 음악이 딱딱해진다.”
-작년에 일본에서 인터뷰할 때, 60세까지만 지휘하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예 지휘를 안하겠다는 건 아니고, 오케스트라의 공식 책임을 맡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지휘, 어린이들한테 의미있는 지휘, 그런 것들만 하고 싶다. 지휘?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기만 하지. 내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만 있었다면, 절대 지휘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을 잘하나.
“그런가?(웃음). 사실 지금도 한국말이 힘겹다. 영어가 가장 편하고, 그 다음은 불어, 이탈리아어 순서다. 하지만 이제 나이를 좀 먹어서 그런지 자꾸 고향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게 좋다.”
〈글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사진 남호진기자 land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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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나는 정마에 인터뷰를 여러 차례 더했던 것 같다. 그중에 어떤 인터뷰는 어느 교수께서 자신의 책을 내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거의 통째로 표절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글보시'도 꽤 한 셈이다. 한데 재밌는 것은 이 양반의 표절 방식이다. 어미와 조사만 살짝 바꾸기. 내가 알기로 그것은 동서고금의 표절 테크닉 중에서도 가장 치졸한 방식일 텐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립대학 선생께서 국가의 녹을 받아가며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정마에와 가장 최근 이뤄졌던 인터뷰는 지난 5월의 유럽 투어를 앞두고 진행했던 것. 하지만 나는 내가 쓴 그 인터뷰가 스스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래저래 독자에게 미안할 뿐이다. 대신 그보다 앞서 진행했던, 올해 초의 인터뷰를 이 자리에 올려놓는다.
음악인생 50년 맞은 정명훈 “주어진 현실 따라가다 보니 지휘자의 길”
기사입력 2010-01-13 00:59
ㆍ어머니·두 누이·줄리니·메시앙 ‘날 이끈 사람들’
ㆍ서울시향 수준 이제야 아시아 정상급 중 하나
ㆍ60세 되면 꼭 하고 싶은 지휘만 가끔씩 할 것
50년이 흘렀다. 1960년 10월, 서울 시공관에서 김생려(1912~1995)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D장조’ 3악장을 연주하며 ‘꼬마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던 까까머리 정명훈. 그가 어느덧 57세의 지휘자가 되어 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만난 그는 일종의 ‘운명론’을 털어놨다. “스스로 지휘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고, 그냥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 ‘현실’은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두 누이(정명화·경화),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작곡가 메시앙”을 자신의 음악 인생 50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았다. “그밖에도 몇몇 사람이 나를 음악가의 길로, 구체적으로는 지휘자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 다섯 명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는 나를 한번도 꾸짖은 적이 없어요. 항상 ‘잘한다’고만 했지. 자식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지원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요. 두 누님은 나의 첫번째 음악 선생이나 마찬가지였죠. 누님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앙상블(조화)을 깨달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뒤따라가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아요. 1978년 LA필하모닉 부지휘자로 갔을 때만 해도, 지휘자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냥, (당시 상임지휘자였던) 줄리니 선생을 좋아해서 갔던 거죠.”
그는 2005년 타계한 지휘자 줄리니에 대해 “지휘자나 연주자들은 청중의 박수를 받으려는 욕망이 큰데, 그분은 오직 음악에만 집중했던 정말로 순수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손꼽은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에 대해서는 “성자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메시앙은 정명훈이 자신의 작품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녹음했을 때 “최고의 해석”이라고 극찬한 바 있으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정명훈을 위해 <4인을 위한 협주곡>이라는 음악을 쓰기도 했다. 그밖에도 정명훈은 자신을 지휘자의 길로 이끈 여러 ‘우연’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어릴 때는 피아노보다 운동에 빠졌어요. 농구, 미식축구, 수영, 육상 등등, 안 해본 운동이 별로 없어요. 내 주특기가 롱 점프(멀리뛰기)와 장애물 달리기였다니까. 그러다가 열세살 때 누님들이 (러시아 출신의 첼로 거장) 피아티고르스키 앞에서 오디션 받을 때 제가 반주자로 따라가게 됐어요.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다 듣고 난 피아티고르스키가 ‘너 지휘해볼 생각 없냐’고 하는 겁니다. 그게 지휘를 권유받은 첫 경험이었어요. 그후 뉴욕으로 가서 메네스음대 학장 앞에서 누님들과 또 오디션을 봤는데, 그때 학장이 피아노만 하지 말고 지휘까지 공부하겠다면 입학을 허가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장학금까지 준다면서. 그래서 지휘를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 거죠.”
그렇게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정명훈은 예술감독 취임 6년째로 접어드는 서울시향의 연주력에 대해 “이제야 아시아 정상급의 여러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라고 자평했다.
“5년 전에 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실력있는 오케스트라들이 거의 다 일본에 있었어요. 약 10개쯤 되죠. 이젠 서울시향이 거기에 추가된 것이고, 그중에서도 상당히 잘하는 축에 든다고 볼 수 있죠. 물론 NHK교향악단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걸 부인할 순 없어요. 일본 최고의 연주자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까. (제가 특별예술고문을 맡고 있는) 도쿄필하모닉도 NHK교향악단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울시향과 비슷한 수준이죠. 앞으로 유럽과 어깨를 겨룰 수준까지 가려면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도 한 5년쯤 걸리지 않겠어요?”
최근 한국의 차세대 연주자들에게 유난히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정명훈은 “그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20대의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손열음에 대해 “내가 그 나이였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친구들”이라고 평했다. 또 올해 15세의 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대해서는 “그 ‘꼬마’하고 작년에 협연을 가장 많이 했다”면서 “시야가 넓고 어른스럽다”고 말했다. 종종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서기도 하는 그는 “성악가를 반주해주고, 다른 연주자들과 협연하는 게 재미있어서 가끔 하는 것일 뿐”이라며 “취미 생활로 봐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3년 남았어요. 60세가 되면 모든 공식 직함에서 물러나 제가 꼭 하고 싶은 지휘만 가끔씩 할 겁니다. 스승이었던 줄리니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도 2012년에 끝나요. 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친구’ 같은 오케스트라만 가끔 객원 지휘하는 거죠.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필하모닉 같은 곳이요.”
정명훈은 그 말 끝에 “서울시향은 친구 이상의 오케스트라”라고 강조했다. 올해 8월부터 2년에 걸쳐 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선보일 그는 “말러의 교향곡은 마치 오페라와 같다”면서 “평생의 희로애락이 다 녹아 있는, 대단히 정서적이고 강렬한 음악. 그래서 말러는 지휘자의 육체를 몹시 지치게 만드는 작곡가”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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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1-13 00:59
ㆍ어머니·두 누이·줄리니·메시앙 ‘날 이끈 사람들’
ㆍ서울시향 수준 이제야 아시아 정상급 중 하나
ㆍ60세 되면 꼭 하고 싶은 지휘만 가끔씩 할 것
50년이 흘렀다. 1960년 10월, 서울 시공관에서 김생려(1912~1995)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D장조’ 3악장을 연주하며 ‘꼬마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던 까까머리 정명훈. 그가 어느덧 57세의 지휘자가 되어 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만난 그는 일종의 ‘운명론’을 털어놨다. “스스로 지휘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고, 그냥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 ‘현실’은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두 누이(정명화·경화),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작곡가 메시앙”을 자신의 음악 인생 50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았다. “그밖에도 몇몇 사람이 나를 음악가의 길로, 구체적으로는 지휘자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 다섯 명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는 나를 한번도 꾸짖은 적이 없어요. 항상 ‘잘한다’고만 했지. 자식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지원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요. 두 누님은 나의 첫번째 음악 선생이나 마찬가지였죠. 누님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앙상블(조화)을 깨달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뒤따라가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아요. 1978년 LA필하모닉 부지휘자로 갔을 때만 해도, 지휘자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냥, (당시 상임지휘자였던) 줄리니 선생을 좋아해서 갔던 거죠.”
그는 2005년 타계한 지휘자 줄리니에 대해 “지휘자나 연주자들은 청중의 박수를 받으려는 욕망이 큰데, 그분은 오직 음악에만 집중했던 정말로 순수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손꼽은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에 대해서는 “성자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메시앙은 정명훈이 자신의 작품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녹음했을 때 “최고의 해석”이라고 극찬한 바 있으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정명훈을 위해 <4인을 위한 협주곡>이라는 음악을 쓰기도 했다. 그밖에도 정명훈은 자신을 지휘자의 길로 이끈 여러 ‘우연’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어릴 때는 피아노보다 운동에 빠졌어요. 농구, 미식축구, 수영, 육상 등등, 안 해본 운동이 별로 없어요. 내 주특기가 롱 점프(멀리뛰기)와 장애물 달리기였다니까. 그러다가 열세살 때 누님들이 (러시아 출신의 첼로 거장) 피아티고르스키 앞에서 오디션 받을 때 제가 반주자로 따라가게 됐어요.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다 듣고 난 피아티고르스키가 ‘너 지휘해볼 생각 없냐’고 하는 겁니다. 그게 지휘를 권유받은 첫 경험이었어요. 그후 뉴욕으로 가서 메네스음대 학장 앞에서 누님들과 또 오디션을 봤는데, 그때 학장이 피아노만 하지 말고 지휘까지 공부하겠다면 입학을 허가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장학금까지 준다면서. 그래서 지휘를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 거죠.”
그렇게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정명훈은 예술감독 취임 6년째로 접어드는 서울시향의 연주력에 대해 “이제야 아시아 정상급의 여러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라고 자평했다.
“5년 전에 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실력있는 오케스트라들이 거의 다 일본에 있었어요. 약 10개쯤 되죠. 이젠 서울시향이 거기에 추가된 것이고, 그중에서도 상당히 잘하는 축에 든다고 볼 수 있죠. 물론 NHK교향악단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걸 부인할 순 없어요. 일본 최고의 연주자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까. (제가 특별예술고문을 맡고 있는) 도쿄필하모닉도 NHK교향악단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울시향과 비슷한 수준이죠. 앞으로 유럽과 어깨를 겨룰 수준까지 가려면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도 한 5년쯤 걸리지 않겠어요?”
최근 한국의 차세대 연주자들에게 유난히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정명훈은 “그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20대의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손열음에 대해 “내가 그 나이였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친구들”이라고 평했다. 또 올해 15세의 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대해서는 “그 ‘꼬마’하고 작년에 협연을 가장 많이 했다”면서 “시야가 넓고 어른스럽다”고 말했다. 종종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서기도 하는 그는 “성악가를 반주해주고, 다른 연주자들과 협연하는 게 재미있어서 가끔 하는 것일 뿐”이라며 “취미 생활로 봐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3년 남았어요. 60세가 되면 모든 공식 직함에서 물러나 제가 꼭 하고 싶은 지휘만 가끔씩 할 겁니다. 스승이었던 줄리니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도 2012년에 끝나요. 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친구’ 같은 오케스트라만 가끔 객원 지휘하는 거죠.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필하모닉 같은 곳이요.”
정명훈은 그 말 끝에 “서울시향은 친구 이상의 오케스트라”라고 강조했다. 올해 8월부터 2년에 걸쳐 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선보일 그는 “말러의 교향곡은 마치 오페라와 같다”면서 “평생의 희로애락이 다 녹아 있는, 대단히 정서적이고 강렬한 음악. 그래서 말러는 지휘자의 육체를 몹시 지치게 만드는 작곡가”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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