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오늘 새벽 0시 40분 눈을 감으셨다. 29년생이시다. 지난달 15일 세상 떠난 울 아버지와 동갑이시다. 리선생은 평북 운산, 울 아버지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였다. 이래저래 켜켜이 마음이 아프다. 난 선생을 2004년 1월 인터뷰했었다. 며칠 전 전화를 미리 드렸더니 "난 지금 손도 벌벌 떨고 말도 잘 못해"하시며 "오지마, 오지마" 만류하셨다. "그래도 가겠습니다"라며 끝내 졸라서, 마지못해 승락하신 인터뷰였다. "경향신문이 나한테 몇년째 신문을 공짜로 넣어주고 있으니, 그 답례로 생각하라"며 어렵게 인터뷰를 승락하셨다.
그때도 선생의 육신은 이미 고통 자체였다. 2000년 중풍을 맞으셨으니, 성치 않은 몸으로 10년을 버티신 셈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와 동행했던 당시의 인터뷰.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공연히 가슴이 뻐근하고 눈시울이 뜨겁다. 기자정신의 사표(師表), 리영희 선생.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원로인터뷰] 리영희 “南이 北보다 더 변해야”
기사입력 2004-01-26 11:52 최종수정 2004-01-26 11:52
"남북의 재통합을 위해서는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더 많이 변화해야 한다.”
3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리영희 한양대 교수(75)는 지난 17일 경향신문이 마련한 원로 인터뷰에서 한·미관계와 남북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리교수는 “최근 국내의 반전세력, 민주화세력이 성장하면서 기득권 세력의 친미적 경향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정부나 국회의 힘으로 그런 구조를 개선하길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미 예속적 구조를 벗어나려면 국민 대중의 의식개선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리교수는 또한 “남북 재통합을 위해서는 변화를 통해 서로 접근해가는 체제수렴적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서독 통일 당시 서독의 사례를 거론하면서, “남한도 사회주의 정책과 정당을 이해하는 융통성 있는 사회로 발전해야 남북한의 평화로운 재통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얼마전 송두율 교수의 재판에 방청객 자격으로 참석했던 그는 “내가 정보부에서 조사받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리교수는 몇년 전부터 건강 악화와 노환으로 인해 집필은 물론 바깥 나들이도 여의치 못한 상태. 그는 “지난 50년간 공자적 삶을 살았으니, 이제 여생을 노자적 삶으로 보내고 싶다”며 “요즘엔 괴테와 ‘도덕경’ 같은 고전을 주로 읽으면서 나의 내면과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보안법 통용되는 한국은 아직도 야만사회”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파헤쳐 동시대인들의 인식을 한단계 끌어올렸던 ‘의식화 교사’ 리영희 교수.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부터 후유증에 시달리는 선생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렸고 말투도 어눌했다. 하지만 눈빛은 예나 다름없이 형형했고 쇳소리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목소리도 여전했다. 경기 군포시 산본 8단지. 선생이 살고 있는 19층에서 바라보니 수리산이 바로 코앞.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등성이에 하얗게 꽃이 피었다. 처음엔 “그저 살아온 얘기나 하겠다”며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했던 선생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제가 쓴 졸작입니다”하며 건넨 ‘대한민국사’를 여기저기 들여다보다가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으로 말문을 열었다.
▲리영희 교수=이 책 아주 공들여 썼더군요. 내가 오래 전에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느낀 게 있어요. 그게 1900년 만국박람회 때 세운 거란 말이오. 그러면 그때 조선에는 쇠붙이로 만든 게 뭐가 있었던가? 이런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1900년의 프랑스에는 에펠탑 같은 엄청난 구조물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발달했던 거죠. 정말 대단하잖아요? 나는 영·정조 이후 우리 사회에 자본주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에요.
▲한홍구 교수=자본주의 맹아론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가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도 많지요. 그것은 60, 70년대에 일본식민사관에 대한 저항 사관으로서 의미가 컸던 것 아닐까요.
▲리영희=그렇지요. 남한 학자들이 북한의 사관에 자극을 받아서, 자생적으로 깨달은 게 아니라 받아들인 것이죠. 그래서 억지스러운 측면이 많은데, 난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나친 민족의식과 애국심에 집착하지 말았으면 해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탐구심으로 학문을 해야 합니다. 에펠탑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조건은 결국 경제적, 물질적 잉여가치였지요. 그런 잉여가 있어야 근대 문명의 생산이 가능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과연 경제적, 물질적 잉여가 있었나 하는 거죠. 없었어요. 텔레비전에서 사극을 보더라도 임금도, 신하도 탈것이라는 게 고작 가마란 말이죠. 그런데 문명이란 것은 바퀴에서 시작되는 거란 말이오. 두 개의 바퀴를 달면 물건과 인간의 이동이 편리한데, 왜 우린 바퀴 달린 탈것을 못 만들었냐는 거죠.
▲한홍구=못 만들기도 했고, 안 만들기도 했던 것 아닐까요.
▲리영희=안 만든 이유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들어오는데 20일도 안 걸리거든. 그런 외침을 당하다보니까, 항상 그걸 염려하는 거죠. 이런 민족이 어디 있나요? 이 얼마나 소극적 태도냔 말이에요.
▲한홍구=바퀴는 도로를 닦아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지요. 김옥균이 갑신정변 할 때도 그 개혁안을 들여다보면 도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상당히 핵심적인 문제제기 아닌가요.
▲리영희=김옥균도 그렇고, 박제가도 개탄을 한 적이 있어요. 중국에서 사통팔달로 발달한 도로를 보고 놀랐다고 쓰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린 20세기 초반까지도 가마밖에 탈것이 없었어요. 일본에 가보면 봉건시대에 세워진 성(城)이 있잖아요? 성벽을 쌓은 돌들이 엄청나게 큽니다. 사방 7~8m의 큰 바위덩어리거든요. 그걸 반듯하게 깎아 쌓아 올렸어요. 바퀴 달린 ‘구루마’가 있었으니까 가능했죠. 그게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이에요.
▲한홍구=선생님의 대표적 저술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글들입니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한 듯합니다. 50, 60년대의 친미적 분위기는 당시 상황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가 있는데, 90년대 이후 친미가 더 강하게 내면화되는 것 아닌가요.
▲리영희=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죠. 하나는 북한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된 것이죠. 소위 핵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북한과의 대결 상태라는 전제에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그 상황을 이겨 나가려면 미국의 보호밖에 없다는 식이죠. 또 하나는 대내적 상황의 변화인데, 국내에 반전 세력, 민주화 세력, 진정한 국가 이익을 생각하는 세력이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잖아요. 이 세력에 대항하려면 누구하고 손을 잡아야 하느냐? 그게 미국밖에 없다는 것이죠.
▲한홍구=올해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된 지 50주년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평등한 한·미관계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이나 대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리영희=지금 평등한 한·미관계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건 미군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미군이 존재하는 한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국가의 권한이 그저 상호 호혜적인 선에 다소 접근하는 그런 정도를 나는 가능한 걸로 봐요. 그런데 그것을 위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되어 있어요. 우리 정부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그리고 조약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미군 철수 문제도 그렇고, 간단한 독극물 방류 문제만 해도 재판 한번 제대로 못하잖아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국민 대중의 의식 능력 개선밖에 없어요. 국민 다수가 미국 없으면 못 산다는 자기능력 상실증에 걸려 있고, 외세숭앙적인 병에 걸려 있는 상태에서 무슨… 이걸 깨우치는 게 제일 중요해요.
▲한홍구=2000년에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지 않았습니까? 3년반이 지났지만 당시의 감격이 정말 옛날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남북관계가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를 갖고 시비를 걸면서, 모처럼 조성한 남북관계 진전의 기회를 깔아 뭉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태도뿐 아니라 남북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국내적 원인도 있지 않습니까.
▲리영희=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죠. 난 그 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80% 정도 된다고 봐요. 국민 개개인의 숫자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실제로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 엘리트 집단의 파워에서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봐야 하죠.
▲한홍구=통일이라는 용어보다 ‘남북 재통합’이라는 용어를 쓰시는데,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리영희=남북의 평화적인 재통합은 아주 중요한 문제죠. 난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기 싫어합니다. 통일이라는 용어를 안일하게 유행처럼 쓰고 있는데, 용어와 개념이 정확해야 해요. 나는 현재의 이질적인 두 체제를 재통합하기 위해서는 체제 수렴적인 방식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독일은 재통합이 될 때 체제 수렴을 새로 할 필요가 없었어요. 서독은 국가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할 수 있는 사회였거든요. 동독과의 통합에서 무리나 부작용이 거의 없었단 말이죠. 그러나 우리 남한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체제가 수렴되는 것, 즉 두 체제가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으면 둘이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북한은 이제 중국의 영향으로 변화해 가고 있죠. 남한은 북한이 더 변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사실은 남한이 북한보다 몇배 더 자기 변신과 수정을 해야 해요. 사회주의 정당과 정책 등 사회주의적 가치를 인정하는 포용력있는 사회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남북한이 서로 접근할 수 있어요. 현재의 체제로 접근하고 감싸안자는 것은 굉장한 착각이고 자기기만이죠.
▲한홍구=며칠 전에 송두율 교수의 재판에 다녀오셨지요? 선생님도 반공법으로 두번, 국가보안법으로 두번 구속된 적이 있으신데, 이번에 방청석에 앉아서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지요.
▲리영희=4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어요. 한마디로 야만이지요. 국가보안법의 목적과 기능이 통용되는 사회는 야만이지요. 송교수 재판의 구체적 내용들을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난 그 사람을 알아요. 송교수가 통일에 대해 갖고 있는 철학이나 사상이나 행동 양식은 검찰에서 주장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재판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가 야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서글픔을 느꼈어요.
▲한홍구=요즘은 어떻게 일과를 보내시는지요.
▲리영희=나는 이제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든가, 그와 관련한 상황 조성이라든가, 그런 걸 군자의 미덕으로 삼았던 논어적 삶을 떠나려 하는 것이죠. 난 이제 환자니까,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 속에 일체화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지난 50년을 외향적으로 살았다면, 이제 내향적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뇌기능도 많이 상실했어요. 나이도 너무 많고요.
▲한홍구=요즘엔 주로 무슨 책을 읽고 계신가요.
▲리영희=괴테를 읽어요. 노자를 한문 원전으로 보고 있고. 자꾸 고전 쪽으로 손이 가요. 고전을 잡으면 맘이 편안해져요. 내겐 두가지 큰 병이 있어요. 하나는 3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몸이 마비된 것인데, 이젠 손이 떨려서 글을 못 써요. 또 하나는 만성기관지염인데 교도소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생긴 것이죠. 지금도 추울 때는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해요. 저기 창밖에 보이는 산이 수리산인데, 날이 따뜻해져야 잠깐이라도 밖에 나갈텐데. 뭐, 머잖아 봄이 오면 바람이 따뜻해지겠지요.
〈문학수기자〉
"남북의 재통합을 위해서는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더 많이 변화해야 한다.”
3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리영희 한양대 교수(75)는 지난 17일 경향신문이 마련한 원로 인터뷰에서 한·미관계와 남북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리교수는 “최근 국내의 반전세력, 민주화세력이 성장하면서 기득권 세력의 친미적 경향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정부나 국회의 힘으로 그런 구조를 개선하길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미 예속적 구조를 벗어나려면 국민 대중의 의식개선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리교수는 또한 “남북 재통합을 위해서는 변화를 통해 서로 접근해가는 체제수렴적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서독 통일 당시 서독의 사례를 거론하면서, “남한도 사회주의 정책과 정당을 이해하는 융통성 있는 사회로 발전해야 남북한의 평화로운 재통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얼마전 송두율 교수의 재판에 방청객 자격으로 참석했던 그는 “내가 정보부에서 조사받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리교수는 몇년 전부터 건강 악화와 노환으로 인해 집필은 물론 바깥 나들이도 여의치 못한 상태. 그는 “지난 50년간 공자적 삶을 살았으니, 이제 여생을 노자적 삶으로 보내고 싶다”며 “요즘엔 괴테와 ‘도덕경’ 같은 고전을 주로 읽으면서 나의 내면과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보안법 통용되는 한국은 아직도 야만사회”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파헤쳐 동시대인들의 인식을 한단계 끌어올렸던 ‘의식화 교사’ 리영희 교수.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부터 후유증에 시달리는 선생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렸고 말투도 어눌했다. 하지만 눈빛은 예나 다름없이 형형했고 쇳소리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목소리도 여전했다. 경기 군포시 산본 8단지. 선생이 살고 있는 19층에서 바라보니 수리산이 바로 코앞.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등성이에 하얗게 꽃이 피었다. 처음엔 “그저 살아온 얘기나 하겠다”며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했던 선생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제가 쓴 졸작입니다”하며 건넨 ‘대한민국사’를 여기저기 들여다보다가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으로 말문을 열었다.
▲리영희 교수=이 책 아주 공들여 썼더군요. 내가 오래 전에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느낀 게 있어요. 그게 1900년 만국박람회 때 세운 거란 말이오. 그러면 그때 조선에는 쇠붙이로 만든 게 뭐가 있었던가? 이런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1900년의 프랑스에는 에펠탑 같은 엄청난 구조물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발달했던 거죠. 정말 대단하잖아요? 나는 영·정조 이후 우리 사회에 자본주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에요.
▲한홍구 교수=자본주의 맹아론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가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도 많지요. 그것은 60, 70년대에 일본식민사관에 대한 저항 사관으로서 의미가 컸던 것 아닐까요.
▲리영희=그렇지요. 남한 학자들이 북한의 사관에 자극을 받아서, 자생적으로 깨달은 게 아니라 받아들인 것이죠. 그래서 억지스러운 측면이 많은데, 난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나친 민족의식과 애국심에 집착하지 말았으면 해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탐구심으로 학문을 해야 합니다. 에펠탑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조건은 결국 경제적, 물질적 잉여가치였지요. 그런 잉여가 있어야 근대 문명의 생산이 가능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과연 경제적, 물질적 잉여가 있었나 하는 거죠. 없었어요. 텔레비전에서 사극을 보더라도 임금도, 신하도 탈것이라는 게 고작 가마란 말이죠. 그런데 문명이란 것은 바퀴에서 시작되는 거란 말이오. 두 개의 바퀴를 달면 물건과 인간의 이동이 편리한데, 왜 우린 바퀴 달린 탈것을 못 만들었냐는 거죠.
▲한홍구=못 만들기도 했고, 안 만들기도 했던 것 아닐까요.
▲리영희=안 만든 이유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들어오는데 20일도 안 걸리거든. 그런 외침을 당하다보니까, 항상 그걸 염려하는 거죠. 이런 민족이 어디 있나요? 이 얼마나 소극적 태도냔 말이에요.
▲한홍구=바퀴는 도로를 닦아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지요. 김옥균이 갑신정변 할 때도 그 개혁안을 들여다보면 도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상당히 핵심적인 문제제기 아닌가요.
▲리영희=김옥균도 그렇고, 박제가도 개탄을 한 적이 있어요. 중국에서 사통팔달로 발달한 도로를 보고 놀랐다고 쓰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린 20세기 초반까지도 가마밖에 탈것이 없었어요. 일본에 가보면 봉건시대에 세워진 성(城)이 있잖아요? 성벽을 쌓은 돌들이 엄청나게 큽니다. 사방 7~8m의 큰 바위덩어리거든요. 그걸 반듯하게 깎아 쌓아 올렸어요. 바퀴 달린 ‘구루마’가 있었으니까 가능했죠. 그게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이에요.
▲한홍구=선생님의 대표적 저술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글들입니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한 듯합니다. 50, 60년대의 친미적 분위기는 당시 상황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가 있는데, 90년대 이후 친미가 더 강하게 내면화되는 것 아닌가요.
▲리영희=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죠. 하나는 북한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된 것이죠. 소위 핵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북한과의 대결 상태라는 전제에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그 상황을 이겨 나가려면 미국의 보호밖에 없다는 식이죠. 또 하나는 대내적 상황의 변화인데, 국내에 반전 세력, 민주화 세력, 진정한 국가 이익을 생각하는 세력이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잖아요. 이 세력에 대항하려면 누구하고 손을 잡아야 하느냐? 그게 미국밖에 없다는 것이죠.
▲한홍구=올해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된 지 50주년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평등한 한·미관계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이나 대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리영희=지금 평등한 한·미관계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건 미군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미군이 존재하는 한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국가의 권한이 그저 상호 호혜적인 선에 다소 접근하는 그런 정도를 나는 가능한 걸로 봐요. 그런데 그것을 위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되어 있어요. 우리 정부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그리고 조약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미군 철수 문제도 그렇고, 간단한 독극물 방류 문제만 해도 재판 한번 제대로 못하잖아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국민 대중의 의식 능력 개선밖에 없어요. 국민 다수가 미국 없으면 못 산다는 자기능력 상실증에 걸려 있고, 외세숭앙적인 병에 걸려 있는 상태에서 무슨… 이걸 깨우치는 게 제일 중요해요.
▲한홍구=2000년에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지 않았습니까? 3년반이 지났지만 당시의 감격이 정말 옛날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남북관계가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를 갖고 시비를 걸면서, 모처럼 조성한 남북관계 진전의 기회를 깔아 뭉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태도뿐 아니라 남북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국내적 원인도 있지 않습니까.
▲리영희=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죠. 난 그 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80% 정도 된다고 봐요. 국민 개개인의 숫자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실제로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 엘리트 집단의 파워에서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봐야 하죠.
▲한홍구=통일이라는 용어보다 ‘남북 재통합’이라는 용어를 쓰시는데,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리영희=남북의 평화적인 재통합은 아주 중요한 문제죠. 난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기 싫어합니다. 통일이라는 용어를 안일하게 유행처럼 쓰고 있는데, 용어와 개념이 정확해야 해요. 나는 현재의 이질적인 두 체제를 재통합하기 위해서는 체제 수렴적인 방식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독일은 재통합이 될 때 체제 수렴을 새로 할 필요가 없었어요. 서독은 국가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할 수 있는 사회였거든요. 동독과의 통합에서 무리나 부작용이 거의 없었단 말이죠. 그러나 우리 남한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체제가 수렴되는 것, 즉 두 체제가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으면 둘이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북한은 이제 중국의 영향으로 변화해 가고 있죠. 남한은 북한이 더 변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사실은 남한이 북한보다 몇배 더 자기 변신과 수정을 해야 해요. 사회주의 정당과 정책 등 사회주의적 가치를 인정하는 포용력있는 사회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남북한이 서로 접근할 수 있어요. 현재의 체제로 접근하고 감싸안자는 것은 굉장한 착각이고 자기기만이죠.
▲한홍구=며칠 전에 송두율 교수의 재판에 다녀오셨지요? 선생님도 반공법으로 두번, 국가보안법으로 두번 구속된 적이 있으신데, 이번에 방청석에 앉아서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지요.
▲리영희=4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어요. 한마디로 야만이지요. 국가보안법의 목적과 기능이 통용되는 사회는 야만이지요. 송교수 재판의 구체적 내용들을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난 그 사람을 알아요. 송교수가 통일에 대해 갖고 있는 철학이나 사상이나 행동 양식은 검찰에서 주장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재판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가 야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서글픔을 느꼈어요.
▲한홍구=요즘은 어떻게 일과를 보내시는지요.
▲리영희=나는 이제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든가, 그와 관련한 상황 조성이라든가, 그런 걸 군자의 미덕으로 삼았던 논어적 삶을 떠나려 하는 것이죠. 난 이제 환자니까,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 속에 일체화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지난 50년을 외향적으로 살았다면, 이제 내향적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뇌기능도 많이 상실했어요. 나이도 너무 많고요.
▲한홍구=요즘엔 주로 무슨 책을 읽고 계신가요.
▲리영희=괴테를 읽어요. 노자를 한문 원전으로 보고 있고. 자꾸 고전 쪽으로 손이 가요. 고전을 잡으면 맘이 편안해져요. 내겐 두가지 큰 병이 있어요. 하나는 3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몸이 마비된 것인데, 이젠 손이 떨려서 글을 못 써요. 또 하나는 만성기관지염인데 교도소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생긴 것이죠. 지금도 추울 때는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해요. 저기 창밖에 보이는 산이 수리산인데, 날이 따뜻해져야 잠깐이라도 밖에 나갈텐데. 뭐, 머잖아 봄이 오면 바람이 따뜻해지겠지요.
〈문학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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