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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독주회...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기억을 쌓는 일이기도 하다. 내 책상 오른편에는 나름대로  정리된 LP들이 꽤 꽂혀 있고, 그중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음반은 한 10장쯤 된다. 고교생이던 시절부터 소장해오던 것도 있고, 독일 뒤셀도르프의 고서점에서 구한 것도 있으며, 수년 전 영국 런던의 해롤드 아저씨에게서 꽤 비싸게 산 것도 있다. 미스터 헤롤드는 한국의 왠만한 LP쟁이들은 다 아는, 유명한 영국 할아버지다. 참으로 귀엽고 상냥하긴 한데 음반을 좀 비싸게 파는 게 흠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오랜 세월 정경화를 들어왔다. 물론 음반 외에 실연으로도 여러 차례 접했다. 

 

특히 그가 바이올린 대신 마이크를 들고 무대로 걸어나와 손가락 통증을 호소했던, 2005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기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순간이다. 나는 그날 밤 서둘러 사무실로 달려와 정경화의 연주가 손가락 마비 때문에 취소됐다는 기사를 30분만에 써서 출고했지만, 솔직히 말해 한 사람의 음악애호가로서는 매우 가슴 아픈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날 세종문화회관에서의 당혹감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손가락 상태가 안 좋다는 얘기를 공연 전에 주최측에게서 이미 전해 듣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바이올린을 들고 당당하게 무대로 걸어나오는 그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조바심과 당혹감의 배경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그의 연주가 담긴 LP의 먼지들을 후후 불어가면서, 그의 뜨거운 연주들이 전해주던 가슴 떨리는 순간들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왔으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마이크를 들고 무대로 나온 그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프고 허탈했다. 그것이 어느덧 7년 전 일이다.   

 

지난 15일도 마찬가지였다. 명동성당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원했다. 오늘 그의 연주가 부디 완벽하고 황홀하기를. 하지만 그것은 결코 화려한 연주에 대한 기대는 아니었다. 64세의 정경화가 들려줄 깊이와 진정성, 그리고 안정감 있는 연주에 대한 기대였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게다가 그날 연주할 곡은 바흐의 음악이었다. 

 

하지만 1시간 가량의 연주회가 끝난 후, 나는 매우 애매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호한 절충이 바로 아래 박스에 담긴 기사다. 아울러 기자로서의 '직업적 평가'보다 나에게 한층 실감났던 것은, 그동안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품어왔던 나의 주관적 애정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높은 기대치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올랐던 연주자였으며, 나는 여전히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까닭이다.   

 

 

 [객석에서]정경화의 바흐, 불안했지만 열정 가득

  기사입력 2012-05-16 21:22

 

대가에게 적용되는 잣대는 좀 더 엄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15일 밤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정경화 독주회(사진)의 출발은 다소 불안했다. 연주 목록에 올라 있는 곡은 모두 세 곡.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중에서 소나타 1번과 파르티타 1번, 소나타 2번이었다.

 

4악장으로 이뤄진 소나타 1번은 광시곡 분위기를 풍기는 느린 악장으로 문을 연다. 얼핏 들으면 즉흥곡풍의 호방함도 내재해 있다. 정경화의 애기(愛器)인 과르네리는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출발점을 떠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프레이즈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음을 부정하기 어렵겠다. 바흐가 남긴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존재 이유는 풍부한 다성의 선율들이 이리저리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화성의 오묘함일 터. 그래서 이 음악은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그 풍부한 화성을 마치 오르간처럼 직조해내야 하는 난곡이다.

그렇더라도 무대에 오른 이는 다름 아닌 정경화였다. 청중은 이 대가에게서 바흐가 펼쳐놓은 정교한 대위법의 향연,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의 대비, 다이내믹과 섬세함의 조화 같은 것들을 기대했겠지만, 이날 첫 연주에서 그 기대를 100% 충족시켰다고 보긴 어려웠다. 때때로 낭만적 격정이 넘실대면서 바로크적 유려함에 균열이 생기는 장면도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날의 첫 곡에 한정하자면,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는 연주였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정경화는 두번째 곡 ‘파르티타 1번’에서부터 안정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파르티타의 요체는 뭐니 뭐니 해도 ‘춤’일 것이고,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역시 선율과 리듬에서 강점을 드러냈다. 특히 순환적인 빠른 패시지는 물론이거니와, ‘사랑방드’의 절제된 슬픔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역시 정경화’라는 찬탄이 우러나올 만했다. 연주회는 그렇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청중의 가슴으로 밀려왔다.

 

세번째 곡 ‘소나타 2번’에서 연주자와 청중 모두가 한결 여유로워졌음은 물론이다. 더불어 음악을 향한 집중력도 커졌다. 마지막 악장 알레그로를 한창 달려나갈 무렵, 성당 밖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소음이 잠시 들렸지만 정경화는 전혀 흔들림 없이 연주를 마무리했고, 객석의 청중은 절반가량 기립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단정하고 엄격하다거나, 고품격의 세련된 연주라기보다는 진지하고 열정적인 연주였다고 해야겠다. 한때 정경화의 스승이었던 헝가리 태생의 거장 요제프 시게티(1892~1973)를 연상케하는 측면도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22일과 31일, 6월4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청중과 다시 만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아래 박스는 2005년 4월에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인터뷰다. 그는 매우 진솔하고 진지하게 답변했다. 나는 이 기사를 쓰면서 기분이 아주 좋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이 낳은 바이올린의 ‘월드스타’ 정경화가 9일부터 23일까지 고국 연주회를 펼친다. 지방 10개 도시를 순회하는 긴 일정. 데뷔 40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한 바퀴 도는 음악적 항해를 시도하는 셈이다. 주요 레퍼토리는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동양에서 온 마녀’로 불렸던 화려한 테크니션 정경화(57)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점점 농익어 가는, 자연스러운 음악성을 펼쳐놓을 듯하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때 바이올린을 포기하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며 “청중은 뛰어난 테크닉에 환호하지만, 테크닉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영혼의 소리”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바흐와 브람스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1982년에 차이코프스키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던 음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작(秀作)이다. 30대였던 그때, 연주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덕목’은 무엇이었는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가.

“바이올린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지내다가, 30대에 접어들어 잠시 쉬면서 나를 찾는 시간을 가졌다. 망망대해에 홀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유럽 전역에서 데뷔를 하고, 녹음과 계속되는 연주 스케줄로 정신없이 살다가 서른살을 넘기면서 한 6개월간 쉬었다. 마치 진공상태에 빠진 것처럼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150마일로 질주하던 기차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연주자’ 정경화는 있는데 ‘인간’ 정경화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연주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도 했다. 휴식을 거친 후 세상을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니 연주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그 음반을 녹음했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작년에 “브람스에 점점 애착을 갖게 된다”고 말했는데, 특히 브람스의 어떤 면이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가.

“브람스의 곡에는 혼이 담겼다. 한음 한음을 새기고 또 새겨서, 마흔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교향곡을 썼다. 또 그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요아힘의 도움을 받아 고치고 또 고쳐가면서 협주곡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이미 음악적으로 완벽한 사람인데도 요하임의 도움을 받을 만큼 겸손한 인간성을 가진 작곡가다. 인간관계에서도 유난히 잘 통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작품을 만났을 때도 느낌이 딱 오는 곡이 있는데, 내겐 브람스의 바이올린 곡들이 바로 그렇다.”

-이번 공연의 레퍼토리는 주로 바흐의 곡들이다. 바흐에 대한 생각은.

“바흐는 시간을 지배하는 작곡가다. 그의 음악은 영원할 것이다. 연주를 하다 보면 그의 음악적 카리스마에 저절로 빠져드는 나를 발견한다. 참, 이번에 연주할 곡 중에 바흐의 ‘바이올린협주곡 d단조’가 있다. 원래 바흐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작곡한 것을 여러 번 편곡해 현재는 쳄발로 협주곡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쓴 원본 악보를 어렵게 구했다. 이번에 고국 팬들과 함께 음미하고 싶다.”

 

-지방 10개 도시를 순회하게 된 계기와 취지는.

“유럽에선 아무리 작은 도시에서도, 정장은 아니더라도 자기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입고 공연장에 빽빽하게 들어와서 진지하게 음악을 듣는 청중이 참 많다. 그것이 늘 부러웠다. 8년 전에 젊은 연주자들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서울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지방에선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이제 한국에도 지방에 좋은 공연장도 많이 만들어졌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이후의 계획들은. 특히 레코딩 계획은.

“청중은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는 고난도 연주에 고무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다. 내 연주는 더욱 자유롭고 편안한, 동시에 감명을 줄 수 있는 음악이 되기를 바란다. 이젠 독주보다 실내악 연주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제 아이들도 거의 다 컸고 비교적 연주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음악가, 엄마, 아내라는 1인3역에서 좀 벗어나니 훨씬 현실적으로 세상을 직시하게 되고 놀랍게도 동시에 더욱 순수해진 자신을 느낀다. 고국 팬들을 만나는 기회도 더 늘릴 계획이다.”

-자녀들은 지금 몇 살인가. 연주와 엄마의 역할을 병행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가.

“큰아들 재곤이가 스물하나, 둘째 유진이가 열아홉이다. 30대 중반에 결혼해 얻은 아이들인데 함께 노는 것이 무척 재미있어서 남편과 진지하게 상의한 적도 있다. 연주를 접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말이다. 바이올린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음악이 없었으면 내 삶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여전히 진실이지만, 그보다 한수 위가 아이들이다. 연주가와 엄마의 역할, 어느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조바심 느낄 때도 많았다. 이번 연주를 위해서도 거의 한달가량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큰아이가 스물이 넘어선지 이젠 든든한 마음이 앞선다.”

-정명훈씨가 서울시향에 취임했다. 같은 음악가로서, 또 피를 나눈 형제로서 하고 싶은 얘기는.

“음악가로서도, 형제로서도 명훈이가 자랑스럽고 믿음이 간다. 우선 그런 결단을 내려준 것이 기쁘고 명훈이가 고국의 음악 발전에 한몫을 하려는 것이 고맙다. 큰 포부를 안고 시작하는 일인 만큼 기대한 성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지휘자 혼자의 힘만으로 오케스트라가 성장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서울시향의 모든 단원들과 명훈이가 한마음이 되어 초반부터 너무 큰 욕심을 내지 말고 하나씩 이루어 가기를 바란다.”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