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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근대의 풍경… 트위터로 잃은 ‘숭고한 외로움’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 트위터로 잃은 ‘숭고한 외로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조은평 강지은 옮김 |동녘 | 400쪽

 

책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사실은 이 책의 영어판 원제다. 좀 더 정확히 옮기자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띄우는 44통의 편지들’(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이라고 해야겠다. 애초에는 이탈리아 잡지에 연재했던 글이다. 좌파 계열 일간지인 ‘라 레푸블리카’가 여성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주간지 ‘여성을 위한 라 레푸블리카’에 2008년부터 2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모았다. 약간 난해한 글쓰기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7)도 여성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한 면모를 보여준다. 기존에 출간된 그의 저서들에 비해 비교적 잘 읽히는 책이다.

 

일단,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부터 살필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지금 이 시기’를 “그대로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액체의 상황으로 바라본다. “이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우리들이 좇으려고 안달하는 패션과 주목을 받는 대상들은 끊임없이 바뀐다. 어제 주목을 끌던 물건과 사건이 오늘은 주목받지 못하고, 또 오늘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물건과 사건도 내일이면 관심 밖의 것이 된다. 우리가 꿈꾸는 것들과 무서워하는 것들, 심지어는 희망을 품는 이유와 염려하는 이유조차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현대인의 이미지는 다급하게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부초와 같다.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와 이와는 정반대로 더 비참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너무도 재빠르게 다가오거나 때로는 사라지기도 하면서 자리를 뒤바꾸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는 근대는 “오늘은 확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내일은 전혀 쓸 데 없고 유감스러운 실수”로 만들어버리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변화에 재빨리 대처할 것을 강요한다. 

이제 하나의 유행어가 세계를 휘감고 있다. “좀 플렉서블(flexible)해 보라구!” 그렇게 ‘좀 더 유연해지기’ 위해 우리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려 한다. 저자는 “다행히 우리는 부모 세대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던 것들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어조는 시니컬하다. “인터넷과 월드 와이드 웹, 지구 곳곳의 구석과 틈새를 신속하게 연결할 수 있는 정보 고속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작고 편리한 휴대전화나 아이팟”은 마치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그는 많은 이들을 고통과 익사로 내몰고 있는 “왁자지껄한 소음, 거짓말과 환영, 쓰레기, 폐기물 같은 껍질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을 묘사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풍경’을 독해한다는 측면에서 발터 벤야민을 떠오르게 한다.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라는 풍경에 주목해 소비자본주의의 황폐함을 묘파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인 바우만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분열된 삶, 트위터처럼 지저귀는 대중, 인스턴트 섹스, 10대들의 대책없는 소비, 쇼핑 중독과 유행에 빠져 허우적대는 세태 등을 바라보면서 안갯속의 미래에 대해 우려한다. 아울러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조각조각 나눠진 에세이들을 묶어놓았다는 점에서도, 눈앞의 구체적 현실을 매개로 철학적 상념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도 앞세대의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 <미니마 모랄리아>를 연상시킨다. 일사불란한 논리에 기반을 뒀다기보다는 현실의 ‘깨알같은’ 모티브를 노학자의 직관으로 바라보는 즉흥적 서술이 빈번히 등장한다.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 중에서도 특히 주목하는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다. 책에는 한 달에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하루 평균 100여건, 깨어 있는 동안에 10분마다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물론 한국 청소년들이 보자면 그 정도는 아무런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밤낮 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에 빠진 그 소녀는 혼자 지내본 적이 거의 없으며,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울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다”며 “불행하게도 외로움을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외로움은 “숭고”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에 집중하게 해서,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것, 더 나아가 인간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해 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진통제, ‘접속’이라는 상황으로 도피할 수 있게 되면서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당신은 이제 충분하고도 진실하게 혼자 있을 수 없게 됐으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식으로 서로에게 충성을 맹세할 필요도 없어졌으며,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트위터(Twitter)는 새들이 지저귈 때 내는 소리를 뜻한다. 저자는 이 지저귐에 대해서도 우려가 깊다. 일단 그 확산 속도에 두려움을 표한다. 책에 따르자면, 2009년 미국의 ‘뉴스 앤드 옵서버’는 트위터 이용자 수가 지난해에 비해 900%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페이스북 사용자가 228% 늘어난 것에 비해 압도적인 추세다. 알려져 있다시피 트위터는 “140글자 이내의 단순한 물음과 재빠른 답신”을 특징으로 하는 대표적인 단문(短文)의 소통 방식이다. 정리와 삭제도 쉽다. 저자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이 지저귐에서 중요한 것은 “보여져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왜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목표로 삼고 무슨 꿈을 꾸는지, 어떤 것을 즐기며 어떤 것을 슬퍼하는지는 하등 중요한 것이 못되는” 피상적 소통이라는 얘기다. 

물론 거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트위팅의 효용성을 강조한다. 예컨대 “뭄바이 테러 당시 목격자들이 그 비참한 상황을 5초마다 80개의 트윗을 보내 알렸다”든지, 아랍 민주화에서도 트위터가 톡톡히 역할을 했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그런 ‘일부 사실들’은 본질과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거액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은 보여주면서도, 정작 실망한 수백만의 낙첨자들은 언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마저 장악한” 트위터가 “사람들의 교제와 그들을 묶어주던 유대감, 친밀함과 심원함, 영속성에 상처를 줬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됐다고 말한다. 게다가 금융이 주도해온 작금의 위기처럼, “트위터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는 세상 곳곳으로 확대되는 데 반해 그 이득은 사유화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온라인에서 인간의 행위와 사고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은 ‘유동하는 근대’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저자는 “가상적 관계들이 현실적 관계의 가장 실질적인 부분들을 마구 휘저어버리고 있다”며 “특히 10대들은 눈을 마주치는 방식으로 타인과 교감하는 일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처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상세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오프라인 생활에서는 으레 출몰하기 마련인 모순과 충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들의 유대관계를 “지웠다 다시 쓰거나 덮어쓰는 일”로 여기고 있으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가변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다시 말해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정체성을 재부팅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바로 하세요!”라는 슬로건은 유동하는 근대가 인간에게 내려준 ‘신의 선물’처럼 보인다. 저자가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보낸 44개의 편지 중에서 ‘상품화된 욕망’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글은 ‘인스턴트 섹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순간적 즐거움의 옹호자들은 “인내심이나 자기 희생,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게 얻어야 하는 즐거움”에 대해 냉소를 보내지만, 여든살이 넘은 바우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연애, 더디게 진행되는 성적 유혹의 작업”이야말로 “섹스에서 정말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런 경고도 잊지 않는다. “전자매체를 통해 장난삼아 바람을 피울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머잖아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다른 모든 중독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얻는 만족감도 매번 새롭게 투여하는 마약의 분량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점차 줄어들게 된다. 결국 우리는 보다 많은 양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즐거움의 질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는 세대 차이의 문제, 개인의 내밀한 프라이버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신용카드의 덫, 미래에 대한 공포 등 다양한 단상들이 잇따라 펼쳐진다. 저자가 바라보는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은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카뮈를 인용해가며 생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려는 입장을 보여준다. 이 유동하는 근대의 부조리를 개인이 아닌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고 대처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마지막 코멘트는 앞서 보여준 비관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냥 비관으로 막을 내렸으면 어땠을까. 21세기의 풍경을 ‘유동하는’이라는 수식어로 규정한 노학자의 불안과 우려를 엿볼 수 있는 책. 거듭 읽어도 해독하기 어려운 번역문들이 간혹 등장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