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꽂이

맥신 그린... '사랑의 상상력'을 깨워라

<블루 기타 변주곡>은 컬럼비아대의 노교수 맥신 그린이 링컨센터 인스티튜트 워크숍에서 했던 강연들을 모은 책이다. 한국 언론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서점에서도 그다지 팔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아까운 책이다.  기사입력 2012-01-06 20:36   

 

---------------------------------------------------------------------------------------------------------------------블루 기타 변주곡

맥신 그린 지음·문승호 옮김 | 다빈치 | 368쪽 | 2만원

100세를 바라보는 여성 노교수가 한국어판 서문을 직접 썼다. 그 자체로 경이롭다. 미국 컬럼비아대 티처스 칼리지의 명예교수, 60여년 동안 교육철학과 사회이론, 미학을 강의해온 맥신 그린(95)은 “철학은 의문에서 출발합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책의 문을 연다. 그것은 이 책에서 주로 거론하는 예술 교육의 문제에 직결된다. 무릇 예술이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진정성 어린 질문이어야 한다. 하지만 허다한 ‘예술들’이 보편에 안주하면서 스스로 생명을 저버린다. 때로는 개인적 감상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저자 그린은 예술에 대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지루함, 불평등에 마취돼 있는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객관적 실제’라는 공식적 진술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자유로운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우리가 예술을 제대로 경험하면 “널리 깨어 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바로 이 ‘널리 깨어 있음’이야말로 저자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다. 그것은 “측정 가능하거나 예측 가능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려는 감각”이다. 다시 말해 “상상하는 힘”이다.

저자는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의 주된 관심사”라고 밝히면서 “마음 속에 이미지를 형성하는 힘, 경험을 새로운 것으로 형성하는 힘, 측은지심을 통해 다른 이의 상황에 대입해보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그것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한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의식화’(Conscientization) 이론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우리는 ‘널리 깨어 있음’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인식하고, 이러한 부정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상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예술 작품을 미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더 좋은 인간 관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계기임을 역설한다.

책은 이 원로교수의 강연집이다. 저자는 1975년부터 뉴욕 링컨센터의 인스티튜트 워크숍에서 초·중등 교사들을 대상으로 ‘심미적 교육’에 대해 강의해왔다. 책에는 그 오랜 세월의 강연에서 24편을 골라 수록했다. 옮긴이 문승호(오클라호마 주립대 교수)에 따르면, “그린 선생의 철학에 기초하여 무용, 회화, 연극 등 다양한 작품을 함께 감상한 후 같이 토론하고, 작품에 대한 그린 선생의 새로운 관점을 듣고 다시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과정으로 이뤄진 수업”에서 행해졌던 강의들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블루 기타’는 시인 윌리스 스티븐스(1879~1955)의 시에서 빌려왔다. “당신에게 블루 기타가 있군요/당신은 주어진 그대로 그것을 연주하지 않지요/…그 블루 기타가 당신을 놀라게 합니다”라는 유명한 시구. ‘블루 기타를 지닌 사람’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이 표현은 상상력에 대한 메타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상력의 창문을 활짝 열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모든 심미적 교육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특히 오늘날의 문화는 “상상력을 단념시키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직해주의, 다시 말해 말뜻 그대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주변의 실제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모든 단위의 학교에서 이뤄지는 심미적 교육은 “문학, 회화, 음악, 무용 및 그 밖의 예술을 통해 수많은 가능성과 질문들을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좀더 문명화시키는 작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금지된 코드를 깨는 것, 인위적인 방해물을 뚫고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술은 그래서 “대안적 삶”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저자는 상상력을 변혁의 모태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 상상력이 언제나 올바르진 않다. “때때로 우리를 절망감에 빠지게 하며, 일종의 의구심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상상력이 언제나 자애로운 것은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거론한다. “검은 립스틱을 바르고 검은 우비를 입고 나타나 친구들을 총살하는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고등학생들, 스킨헤드라고 불리는 파시즘의 상징들”이 그런 사례에 속한다. “그들 역시 대안적 현실을 찾아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물론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우슈비츠 같은 나치 캠프를 상상력에 포함시키긴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부 공포영화나 폭력 영화가 젊은이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그들에게 미적 체험이라고 불릴 만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저자는 상상력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전제돼야 함을 강조한다. 모든 형태의 심미적 교육은 상상력의 창을 활짝 열어주는 동시에 세상을 향한 사랑을 북돋는 일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교육이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궁리하는 것도 시인, 화가, 극작가, 음악가들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랑의 유무(有無)’도 뛰어난 예술을 판별하는 척도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예술작품을 체험한다는 것은 “민주적 공동체의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예컨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카라마조프와 동생 알료샤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우리 도시의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해 상상”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공동체가 그 문제에 대해 자문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수면상태에 빠진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저자가 역설하는 사회적 상상력은 “유토피아에 대한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상상력을 깨우는 것, 다시 말해 “메타포에 대응하는 능력”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심미적 교육이 “예술작품을 수동적으로 바라보거나 배경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작품을 능동적으로 학습하고 적극적으로 대면하면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명 미술관의 수많은 작품을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은 하등 무용하며 “여러 사람과 하나의 작품을 심도 있게 체험하는 것, 같은 작품을 여러번 반복해 접하면서 다른 관점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즉, 반복적인 미적 체험과 토론의 조직화를 통해 “널리 깨어 있음”을 획득하고 “사회적 상상력과 다양한 관점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심미적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순수 형식주의와 엘리트주의, 기능주의”를 거부한다. “일부 학교에서 예술-심미 교육이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에게 예술적 체험이란 사회적 상상력으로 충만한 전인적(全人的) 인간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의 후반부에서 언급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그는 199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미국의 흑인 여류작가 토니 모리슨의 <재즈>, 유태인 작곡가 멘델스존, 인도의 음악가 라비 생카, 미니멀주의를 추구하는 현대음악가 필립 그라스 등을 거론하면서 “나는 그들의 예술을 접하면서 경험의 지평을 넓혔노라”고 고백한다. 그런 예술 작품들을 통해 미국의 작가 신시아 오지크가 비유한 “이방인의 친숙한 심장”을 상상하게 됐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개방성의 확장, “서로 다른 문화들이 한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지되는 가운데 이뤄지는 예술적 경험”을 통해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키워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책에는 도발적인 언술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수십년의 강의 중에서 일부를 추려낸 까닭에) 주제와 내용이 서로 겹치거나 확장되거나 혹은 중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밑줄 그을 만한 대목들이 수두룩하다. 옮긴이는 노구(老軀)의 교수가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언제나 미리 준비한 원고를 손에 쥐고 이따금 천장을 응시하는 모습, 유머 섞인 어투와 힘있는 목소리로 청중을 빨아들이는 마력 같은 힘, 청중과 대화하듯이 강연을 이끌어가는 모습, 청중을 사로잡으면서도 존중하는 겸허하고도 강인한 모습.”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