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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시민이여, 시장에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라

경제학의 배신…라즈 파텔 지음, 제현주 옮김|북돋움

“저주로다. 광인이 맹인을 이끄는구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대사다. 시장만능주의가 세상을 뒤덮은 통제 불능의 시대를 이만큼 적절하게 비유하는 언어도 별로 없을 성싶다. 책의 저자인 라즈 파텔은 그 광인의 한 명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 19년이나 재임한 앨런 그린스펀을 지목한다. 저자는 열렬한 자유시장 옹호자이자 세계경제의 입법자로 군림해온 그가 “미국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랜드는 한국에선 다소 생소하지만, 1982년 타계 이후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잃지 않는 미국 작가다. 특히 그녀가 1957년 발표한 <아틀라스-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이 그렇다. 이 대하소설은 재계 거물들이 정부 관리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라는 ‘사회악’과 투쟁하는 모습을 영웅적으로 그려내며 극단적인 자유시장주의를 선동했던 ‘문제작’이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혁명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랜드는 소설 속에서 이타주의를 ‘도덕적 식인풍습’으로 간주한다. 이타주의라는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면, 결국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친다는 얘기다. 즉 도덕적인 체하면서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책의 저자인 파텔에 따르자면 그린스펀은 “이 자극적인 철학에 이끌려 랜드의 추종자”가 됐다. “이기주의가 최상의 세상을 낳을 수 있으며 어떠한 형태의 규제도 완전한 실패로 끝나리라고 굳게 믿었던 인물”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를 곤경으로 몰아넣은 자유시장에 대한 환상을 ‘안톤의 실명(Anton’s blindness)’이라는 비유로 풀어낸다. 오스트리아 신경학자인 가브리엘 안톤의 이름을 딴 이 질병은 뇌졸중이나 외상에 의한 두뇌손상 이후 일어날 수 있는 희귀한 증상이다. 이 질환을 앓는 사람은 시력을 잃고서도 자신이 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 환각에 따른 여러 증상을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겨댄다. 예컨대 창문 밖으로 어떤 마을을 보았다고 한다거나, 굶주린 소녀가 집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시장만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상황을 “안톤의 실명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질환을 앓는 환자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환상을 믿지 않는 것, 다른 감각 및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경제와 사회에도 이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자신이 칼 폴라니(1886~1964)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물건의 실제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한다. 폴라니는 1945년 저서인 <거대한 전환>에서 자유시장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제 요소인 노동, 토지, 화폐를 허구적 상품으로 전락시켰음을 간파한 바 있다. 태생적으로 자기조절 능력이 없는 자유시장경제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폴라니가 내세운 비판의 요지였다. 아울러 폴라니는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시장화’에 맞서는 ‘대항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것은 곧 “시장이 할퀸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회로부터의 대응”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대항운동’에 주목한다. 저자는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시장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오는 운동”을 역설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대항운동들을 소개한다. 그 운동들은 “정치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참여해 얻어내는 직접 민주주의로서의 정치다. 

예컨대 저자는 국제적 농민운동 조직인 ‘라 비아 캄페시아’를 거론한다. 1993년 미국과 유럽의 농민단체들이 한데 모여 설립한 이 조직은 가족농장을 기초로 한 지속가능한 영농을 지원한다. 현재 69개국에 1억5000만명이 넘는 회원을 지닌 거대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와 대결”한다. 공유지 파괴에 저항하고 식량 주권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그래서 지금은 “말리에서 네팔, 볼리비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정부가 그들의 비전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사회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다.

미국의 토마토농장 노동자들도 ‘이모칼리 노동자연대’를 만들어 거대 외식산업체에 맞섰다. 그들은 1993년 출범 이래 토마토 파운드당 노동 단가를 둘러싼 싸움에서 맥도널드, 얌!브랜드, 버거킹, 서브웨이 등 4대 외식업체와 협약을 맺어내는 승리를 이끌어냈다. 저자는 “토마토 노동 단가가 시장사회의 변혁에서 사소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얻어낸 정치·사회적 유대는 더 큰 변화를 위한 발판”이라고 평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판자촌 거주민 약 3만명은 ‘아바랄리 바세음존돌로’(줄루족 언어로 ‘판자촌 사람들’)라는 조직을 구성해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를 위해 싸운다. 저자는 바로 이 빈민운동 조직의 웹사이트 운영자다. 아프리카계 영국인인 저자는 옥스퍼드대학과 런던 정경대학을 거쳐 미국 코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제 마흔살의 젊은 경제학자다. 세계은행과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이 ‘화려한 스펙’의 저자는 2010년 남아공이 세계 최대의 스포츠행사인 월드컵을 개최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쫓겨나 36㎡의 판잣집에 갇혔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남아공뿐 아니라 미국 필라델피아 빈민들의 주거권 투쟁도 아울러 소개하면서 “공유지에 합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특히 저자가 대항운동의 성공 사례로 주목하는 것은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주에서 사파티스타가 건설해 낸 “새로운 종류의 민주주의”다. “1994년 마야계 원주민에 대한 처우 개선과 토지 분배를 요구하며 멕시코 정부와 전쟁을 선포한 반정부 단체” 사파티스타는 “15년 만에 그들의 땅을 얻었고, 해방된 영토에 수만명을 위한 학교와 보건시설”을 지었다. 저자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건설한 생활민주주의와 사법제도”다. 사파티스타의 민주주의 기초단위는 “보통 15~100여개 가구로 구성된 마을”이다. 각 단위에서는 정기총회가 열리고 누구나 참여해 자유롭게 발언한다. 사람들은 총회를 통해 마을당 남녀 동수로 2명 혹은 4명의 책임자를 뽑고, 최종적으로는 5명으로 이뤄진 ‘훈타스’ 위원회를 만들어 사파티스타의 통제 아래 있는 모든 영토를 관할한다. 훈타스의 사법 기능은 징벌보다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술주정뱅이를 수용하는 감옥이 있긴 하지만 활용 빈도가 높지 않다. 대신 훈타스는 “경고와 보육 및 지역 봉사”를 권고한다. 그리고 영토 입구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여기는 반란 사파티스타 영토입니다. 여기서는 국민이 이끌고 정부는 복종합니다.”

저자 파텔은 냉철한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가슴 뜨거운 운동가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대항운동들에서 “참여적 민주주의”라는 공통점을 발견하다. 명분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지극히 반민주적인 정치를 정당화해주는 구실로 활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하면서, 우리의 삶을 옥죄는 시장주의를 이겨낼 대안으로 “일상 속에서 직접 참여하는 정치를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시민이여, 시장에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