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
데버러 L. 로드 지음·윤재원 옮김 | 알마 | 350쪽 | 1만6000원
적어도 겉에서 보자면, 오늘날 미국의 대학들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다. 전 하버드대 총장인 데릭 복은 “연구조사의 역량, 전문교육의 질, 교육프로그램 혁신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자평한다. 런던타임스에 게재된 조사결과에 따르자면, 세계 최상위 10개 대학 중 7개가 미국 대학이다. 75년 전 미국에서 학사 학위 보유자는 25명 중 1명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의 만족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총체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90%에 가까운 교수들이 만족한다고 답변”했으며,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교수라는 직업을 택하겠다고 밝힌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80%”에 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데버러 로드(60)는 그 모든 현상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보기엔 오히려 모든 것이 그와 반대다. 일단 “대학 소비자들”로 불리는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이다.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지식의 추구라는 본래적 가치”는 가차없이 무너졌으며, 경쟁과 성장의 바이러스가 대학사회를 파고들면서 “대학들 사이의 순위 경쟁이 극에 달해 갖가지 부정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전시행정”을 펼치면서 “명성을 끌어올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을뿐더러, 교수들조차도 이러한 대학 문화를 내면화하면서 “개인적 명성을 쌓는 일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대학교수로 25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저자가 오늘날 미국 대학들의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 책이다. 이를테면 대학과 교수 집단에 대한 내부자의 고발인 셈이다. 저자는 “고발이라기보다 성찰”이라고 표현하면서 신중하고 온건한 문체를 구사하지만, 행간에 숨은 비판의 칼날은 예리하다. 게다가 그의 논지는 ‘한국인 저자의 책’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만큼 미국의 대학구조를 수입·추종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이 빠져있는 현실과도 거의 오차 없이 겹친다.
저자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대학들 간의 순위 매기기다. 그것은 유럽의 문화와 아주 다른 “미국적 특징”이다. 저자에 따르자면 “대학 순위를 발표하는 자료집의 연간 판매부수는 약 650만부”다. “무료로 배포되는 부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순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최고 행정가들의 주관적 소견,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명성, 예전의 순위 기록에 따른 후광효과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위에 따라 대학에 주어지는 이익 요소들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 행위들”이 빈번할뿐더러 “일부 기관은 사실을 날조”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정해진 순위는 결국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응시생의 수에 영향을 미치고 기관의 의사결정, 정부 지원에서의 우선 순위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순위 경쟁은 “성장주의”와 동행한다. 이제 “성장은 미국에서 대학행정의 기본 원칙”이다. “거대한 건물, 도서관 및 연구실 증축, 예산 확대, 홍보 캠페인의 확장 등”은 “대학의 힘이 커졌다는 환상”을 부여하고 “성취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거대한 제국주의적 건물 증축은 그 자체로 대학의 목적”이 된다. 그런 대결에서 밀려 서열이 낮아진 대학들은 “혁신보다는 모방에 열중하며, 스스로의 장점을 특화시켜 발전하기보다는 명성이 높은 대학을 따라하기”에 급급해진다.
거기에 “미국인이 학교에서 얻는 배움보다 지위에 더 가치를 두는 풍조”가 결합한다. 그것은 200년 전부터 이어져온 “미국의 문화”다. 고등교육을 족보나 혈통의 확보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얘기다. 저자는 “‘대학에 다닌다는 것에 미국만큼 중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나라는 없다”고 단언한다. “미국에서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과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런 관습에 물든 “고등교육 소비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최첨단 시설 등, 대학에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실린 만평을 사례로 든다. 여고생이 상담교사와 대학 진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갈 대학은) 라커룸이 넓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대학은 “구내식당의 메뉴 개선과 개인 운동 트레이너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유치하려는 대학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 간의 서열을 매기는 데 직결되며, 궁극적으로는 “대학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장학금 제도는 “점점 더 성적 중심으로 운영”된다. “장학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들에 대한 지원은 축소되고, 소득계층의 밑바닥에 속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교수생활을 해온 25년 동안 “대학 교육과 입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정부 지원은 크게 감소한 것”에 주목한다. 미국의 전체 예산에서 “고등교육에 할당되는 재정 비율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지만, 수업료는 두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 25%의 3분의 2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데 반해, 최저임금 생활자 25%의 집단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의 5분의 1만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연수입 20만달러가 넘는 가정의 자녀 중 약 40%가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입법자들은 그들만의 십자포화에 갇힌 채” 이 문제의 해결에 등한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는 대학교수들도 점점 더 “명성의 추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물론 “인지도를 향한 욕구는 학문적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긍정적이지 못한 부산물”만 잔뜩 쌓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저자는 “겉멋만 부린 문체, 난해한 주제, 과도한 인용과 참조”에 눈살을 찌푸린다. 이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교수들의 행태는 대학 콘퍼런스, 대담, 토론회 등과 같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교류와 모임”에서 드러나는데, “이목을 끌려고 애쓰는 그들의 행동은 마치 공작새의 구애의식과도 같다”고 조롱한다. “지적 깃털을 한껏 부풀려 과시”하면서 “최고 실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거나, 그 세계에 발을 디디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고민하면서 주변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지위와 명성을 향한 추구에는 “필수불가결하게 결핍”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구조적 필연이다. “신진 교수의 대다수를 공급하는 주요 대학에는 그들이 배출한 교수들이 들어설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다수의 신진 교수들은 “애초에 지원했던 곳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기관에 자리를 잡거나 겸임교수로 전락”한다. 그래서 “자기과시를 향한 집착은 종종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알력 싸움에서 승리자는 극히 드물고, 패배자는 사방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적) 자본이 자본을 낳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교수들이 명성과 지위를 향한 추구에 점점 더 매달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지식인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지만, 제대로 된 ‘공적 지식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지나친 실용주의” “과도한 자본의 지배”로 아우른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실용성은 20세기 초반부터 “필요한 것”으로 제기돼왔다. 예컨대 철강왕 카네기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물질적 부를 좇는 데 필요한 교육을 대학이 효과적으로 제공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 전역에 수천개의 도서관을 기부한 그조차도 “대학의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 대학의 목표는 여전히 “학생의 정신적, 윤리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제 대세는 바뀌었다. 저자는 “오늘날 대학은 실용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방향으로 변화”했으며, “전례없는 수준에서 대학의 자본화”가 이뤄졌다고 진단한다.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는 교수들은 이런 문제에 저항하기보다는 포섭돼 있다. 그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적인 영역의 일들에 영 무심하다. 그들은 다만 “지원비가 현저히 깎인다거나 의무사항이 늘어나는 등 자신의 이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때에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많은 대학에서 나타나는 이 “끈질긴 개인주의는 자기 영속화”하면서 “지적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책임감을 지닌 교수는 점점 줄어들고 대학에서의 양질의 교육도 붕괴”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사회를 비판의 시선으로 더듬은 저자는 “해결책은 원칙적으로는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그는 대학과 교수사회를 향해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주문한다. “대학기관과 교수협회, 재단 및 비영리 단체는 기존의 순위 체계를 개선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특히 교수들은 특정 지위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가 강조하는 요체는 “지식의 추구”라는 대학 본연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해야 “어느 정도의 방향 수정”이 가능해지며, 실용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대학 현실과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다는 고언이다. 저자는 현재 스탠퍼드대 법과대학 교수이며, 같은 대학 윤리센터의 소장으로 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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