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3월, 이스라엘필하모닉과의 연주회가 끝난 후, 뉴욕 카네기홀 그린 룸(Green Room)에서 여동생 셜리(Shirley)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레니는 카메라를 적잖이 의식한 채 담뱃불을 멋지게 당기고 있다. 꽤 여유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무렵, 그의 속은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녀사냥의 선봉에 섰던 <카운터어택>, <레드 채널스> 같은 매체들은 이미 한 해 전부터 그를 '위험한 빨갱이', '불순분자'로 낙인찍어 리스트에 올렸다. 사진과 같은 해의 5월16일, 레니는 셜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에 자신이 곧 소환돼 조사받을 것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털어놓고 있다. 좌파로 찍힌 데다 동성애 성향까지 알려져 있던 터라, 더욱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다행히(?) 레니는 송환되지 않았다. 하지만 2년 뒤 그는 미국 국무부의 여권심사국에서 '회개의 제스추어'를 연출해야 했다. 그는 바로 그 '치욕'의 진술서 덕택에 매카시의 그물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에 송환돼 동료를 팔아넘긴 댓가로 살아남았던 이들, 예컨대 엘리아 카잔 같은 이들에 비한다면 그나마 운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레니는 누군가를 고발하는 대신, 그저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그 직후에 레니는 국무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아 해외투어에 나갈 수 있었고, CBS와 콜럼비아는 이 '회개한 지휘자'에게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레니는 1950~51 시즌부터 계속됐던 공백기를 뒤로 한 채, 56~57 시즌에 뉴욕필하모닉 객원지휘자로 초빙됐고 그 다음해에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와 함께 공동 상임지휘자로, 또 그 다음해에는 단독으로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아내 펠리시아는 칠레 출신의 배우였다. 아주 예쁘다. 레니가 여진히 '좌파 청년 예술가'였던 시절에, 펠리시아는 우리로 치자면 동네 반상회 같은 곳에 나가 진보적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하지만 레니는 76년 펠리시아와 헤어져 동성애 파트너인 Tom Cochran과 '살림'을 차렸다. 그렇다고 법적인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였던 펠리시아를 아예 모른 척한 것은 아니었다. 1년 후 펠리시아가 병에 걸리자 그는 집으로 돌아와 7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호했다.
레니가 말러를 리허설 하고 있는 모습. <라이프>지에 게재됐던 사진이다. 1955년 촬영으로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레니가 진술서를 쓴 이후이긴 한데, 뉴욕필하모닉 포디엄으로 완전히 복귀하기 직전이다. 사진 속의 오케스트라가 뉴욕필하모닉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어쨌든 멋진 사진이다.
1970년 'Tanglewood 음악제'에서 말러의 2번 교향곡 '부활'을 지휘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이것은 마지막 악장에서의 한 장면일 성싶다. 레니가 탱글우드에서 말러를 처음 지휘한 것은 1948년이었다. 그때도 2번이었다. 당시만 해도 말러를 듣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말러붐이 일었던 것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그 붐을 맨 앞에서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레니였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라파엘 쿠벨릭, 게오르그 솔티가 '말러 전집' 녹음에 동참했지만, 레니만큼 말러와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준 지휘자는 찾기 힘들다. 그는 말러처럼 유태인이었으며, 지휘자인 동시에 작곡가였다. 그리고 말러가 그랬듯이, 뉴욕필하모닉과 빈필하모닉을 오가며 지휘했다. 게다가 1960년대는 '잊혀졌던 작곡가' 말러를 간절히 원하던 시대였다. 고상함과 퇴폐, 서정과 광기, 공포와 안식이 고통스럽게 뒤엉킨 말러의 음악에 사람들은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물론 오디오 기술의 진보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다. 장시간 녹음을 가능하게 만든 LP의 보급, 미세한 음향까지도 짜릿하게 잡아내 전달하는 하이엔드 오디오의 출현도 말러붐에 가세했다.
1963년, 레니는 '친구'였던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말러의 2번 '부활'을 지휘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때로는 신문과 잡지에서조차 이 장례식에서 레니가 지휘한 곡이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라고 '주장'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물론 잘못된 정보다. 레니는 장례식 연주를 맡아달라는 재클린의 부탁을 받고 2번 '부활'을 연주했던 것이 맞다. 다만, 그날 라디오에서 케네디의 급작스런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 5번의 4악장을 자주 틀었을 뿐이다. 레니가 장례식에서 그 유명한 아다지에토 악장을 연주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대통령 케네디의 동생인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가 세상을 떴을 때였다.
1951년의 '진술서' 이후에도, 레니가 자신의 윤리를 완전히 저버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60년대에 들어서자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닉슨 행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80년대의 그는 "핵무기를 만드는 데 들어갈 돈을 도서관과 학교를 짓는 데 써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레이건 행정부를 비판했고, 1989년에는 부시 행정부의 국가예술훈장 수여 제의를 거부했다.
물론 당시 레니의 명성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지휘자 번스타인'의 이름은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아시아 곳곳에도 깊이 각인돼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리무진 좌파'라는 말로 빈정댔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종종 언급되는 '강남 좌파'와 흡사한 용어인 셈이다. 그러나 타는 것이 리무진이든 사는 곳이 강남이든, 그 조어의 본질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좌파면 좌파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한데 그 요상한 조어는 스스로를 '빈곤 좌파'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음흉한 우파'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파가 '자기 편이 아닌 사람들'을 공격해 갈라놓는 정치적 방식은 과거의 미국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1980년대 후반, 레니는 내향의 세계로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것은 주변 지인들에게 거의 우울증으로 비칠 정도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두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갖는다. 89년 10월 뉴욕필하모닉, 90년 3월 빈필하모닉과 가졌던 연주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6월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베토벤 7번 교향곡을 지휘했고, 자신이 지휘자로 첫걸음을 내디뎠던 탱글우드로 돌아와 자신의 음악적 후원자였던 선배 지휘자 쿠세비츠키를 추모하는 음악회에서 마지막 지휘봉을 들었다. 사망은 그로부터 두달 후인 90년 10월 14일. 진피종과 폐암을 앓아오던 그는 뉴욕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기사입력 2011-02-25 19:31
포디엄에 선 그의 모습은 어땠던가. 그는 마치 연극배우와 같았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환하게 웃었고, 때로는 애원과 갈구의 표정으로 ‘리얼하게’ 음악을 ‘연기’했다. 두 팔은 독수리 날개처럼 커다랗게 퍼덕였고, 단원들의 심장을 찌를 듯 직진하던 지휘봉 끝은 부들부들 경련했다. 때로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렇게 그는, 포디엄의 배우였고 댄서였다. 그래서 유럽의 ‘정통주의자’들은 ‘원숭이 같은’이라는 수식어로 그를 빈정댔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90).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지휘 스타일 외에도 그가 남긴 기억은 많다. 이를테면 TV로 중계했던 ‘젊은이를 위한 음악회’를 통해 클래식음악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던 대중적 교사, 막힘없는 달변가, 뉴욕필하모닉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삶의 후반기에 빈필하모닉을 지휘하면서 미국 클래식을 대표했던 문화대사, LP와 스테레오 녹음 초창기였던 60년대에 ‘말러붐’을 일으켰던 말러 음악의 부흥사 등등. 그리고 이제, 하나를 추가해야 할 차례다. 풍문으로 들어왔던 ‘빨갱이 번스타인’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레너드 번스타인>(심산출판사, 2010)은 바로 그것을 추적한다. 게다가 그 추적은 실증적이다. 지금까지 감춰졌거나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던 문서들, 이를테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FBI 파일과 미국 의회도서관의 문서를 섭렵해 번스타인의 정치적 행동과 발언들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하버드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던 번스타인은 1937년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의 “표현력 넘치는” 지휘에 매혹돼 지휘자를 꿈꾸기 시작한다. 음악적으로는 “좌파”라는 비난을 숱하게 들었던 당대의 거장 에런 코플랜드의 영향과 후원을 받았다. FBI의 주목을 끈 사건은 대학을 막 졸업하던 무렵 벌어졌다. 번스타인은 시당국이 공연을 막았던 마크 블리츠스타인의 악극 ‘요람은 흔들리리라’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하버드대학 구내에서 연주했고, FBI 정보원은 그를 “공산주의자 집단인 ‘존 리드 소사이어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FBI의 ‘번스타인 파일’. 그것이 블랙리스트의 시작이었다. 좌파 언론인이었던 존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레닌의 친구였으며 미국 공산당의 창립자였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행운아였다. 미트로풀로스와 코플랜드가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이 청년은 1943년 8월 뉴욕필하모닉 보조지휘자로 들어간다. 행운의 여신은 지체없이 찾아왔다. 같은 해 11월14일 상임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가 몸져누운 덕택에 번스타인은 얼떨결에 지휘대에 서고, 그것이 CBS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한 방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렇다고 얌전해질 필요는 없었다. 좌파의 에너지가 오히려 왕성했던 당시 미국에서, 이 외향적인 청년은 곳곳에서 발언하고 몇몇 단체에 직접 가담한다. 아마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우파의 공세가 극심해지면서 마침내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칠 거라는 사실을 번스타인이 어찌 상상했겠는가. 그는 50년대에 자신이 겪어야 할 내리막길, 우파 잡지 ‘레드 채널스’에 “위험한 빨갱이”로 명시될 거라는 사실을 까맣게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풍은 현실이었다. 번스타인은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CBS로부터 출입금지 명령을 받고, 마침내 미국 국무부의 블랙리스트에까지 이름을 올린다.
자진해서 뉴욕필하모닉 지휘대를 떠났던 번스타인은 56년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폄하하는 반공적 진술서” 덕분이었다. 하지만 책의 저자인 배리 셀즈(라이더대 정치학과 교수)는 그것이 결코 번스타인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구체적 사례와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번스타인은 마지막까지 “진보적 자유주의자”였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말년의 번스타인이 점점 내향적(內向的) 음악으로 접어들었던 것을, “미국 사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그의 심정이 반영된 결과로 본다. 번스타인이라는 한 시대의 거장을 통해, 예술과 권력의 관계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책. ‘탈정치’에 길들여진 한국 음악계에서도 음미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특히 예술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문학수 문화부장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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