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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 103명의 증언'

예상했던 것처럼, 이 책을 소개한 주요 언론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후쿠시마 사태 직후의 한국 언론들은 진보와 보수에 상관없이 원전 관련 기사를 쏟아냈었는데, 어느덧 그 '장사'가 수명을 다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운이 없다. 두달쯤 전에만 출간했더라도 꽤 화제가 됐을 텐데, 애석하게도 사주를 잘못 타고 세상에 나온 셈이다.

기사를 쓰기 전, 저자와 관련한 몇가지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받고는 대여섯 시간 후에 책의 저자인 63세의 여기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관련한 내용들을 e메일로 보내왔다. 기사에는 그 내용을 일일히 다 소개하지 못했으니, 블로그에라도 올려놓는 게 좋을 성싶다. 알렉시예비치는 한국에서는 비록 생소하지만, 그간 50여권의 저서를 써낸 왕성한 필력의 저널리스트다. 1948년 우크라이나의 스타니슬라브 태생이고, 아버지는 벨라루스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후, 여러 매체에서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약중이다. 제2차세계대전, 소련과 아프간의 전쟁, 소련 붕괴,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이 그간의 취재 목록에서 가장 눈에 띈다. 이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취재해 집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것이 출판사 측의 전언이다.


'새잎'이라는 신생 출판사는 '이동하'라는 이름의 용감한 청년(정확한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목소리가 싱싱한 걸로 미루어 그냥 '청년'이라고 해두자)이 홀로 꾸려가는 1인 독립 출판사다. 그가 내게 보내준 매우 성실한 메일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그가 보내준 저자 알렉시예비치의 홈페이지 주소도 소개한다. http://alexievich.info/izdanija.html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에 갇힌 체르노빌 피해자 103명을 인터뷰해 글로 옮긴 '육성록'이다. 현재까지 한국을 포함해 세계 17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을 기반으로 TV 단막극과 연극들도 여러 편 제작됐는데, 알렉시예비치의 홈페이지에서 그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http://alexievich.info/film_theaterEN.html또 그중 몇 작품은 유투브에서 일부를 직접 볼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Y1WznYyNY80

http://www.youtube.com/watch?v=m4tBu47Rlbo
http://www.youtube.com/watch?v=_GIxY21UzgM
http://www.youtube.com/watch?v=sX3DzIuP7vU
http://www.youtube.com/watch?v=h8ekmAmQeXg
http://www.youtube.com/watch?v=gbTZGInaB-E
http://www.youtube.com/watch?v=Id-lVOW2m10

  

저자는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을 위해 서문을 새로 썼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한다. 기사에 없는 내용이다.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중이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그리고 한국에 21기가 있다. 종말을 앞당기기에 충분한 개수다. 그중 20퍼센트가 지진 위험 지역에 있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흙과 집은 주인을 잃은 채로 남아 있고... 수백개의 죽은 전깃줄과 수백 킬로미터의 도로가 의미없이 연결돼 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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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난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악몽

▲체르노빌의 목소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새잎

한 여인이 죽어가는 남편에게 다가간다. 의사가 다급하게 말린다. “가까이 가면 안됩니다. 만지지 마세요! 입 맞추면 안됩니다. 이제 그는 방사선 오염 덩어리입니다.” 이런 대사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셰익스피어도 단테도 혀를 내두를 대사가 체르노빌 참사 이후에 가능해졌다. 임신 중이었던 여인은 소방대원이었던 남편에게 울며 다가가 입을 맞추고 손을 맞잡았다. 사랑의 대가는 혹독했다. 여인은 자신의 건강과 아기의 목숨을 한꺼번에 잃었다.

이 책은 인구 1000만명의 작은 나라 벨라루스에서 일어난, 지금도 진행 중인 참상의 기록이다.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주민들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았다. 물론 벨라루스에는 원전이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접한 국경 근처에 체르노빌이 있었던 까닭에 국토의 23%가 방사능에 오염됐다. 오염지역 거주민은 약 210만명, 그 가운데 어린이가 약 70만명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평범한 아버지와 엄마, 남편과 아내, 농부, 사냥꾼, 군인, 간호사, 교사 등 모두 100여명이다.


벨라루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기자 알렉시예비치(63)가 10년에 걸쳐 만난 사람들의 육성을 간추려 책으로 엮었다. 아무도 그날의 참사를 상상하지 못했다. 왜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뜨고 군인들을 실은 탱크가 몰려오는지, 주민들은 어리둥절했다. 벌을 키워 먹고살던 늙은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에 정원에 나가니 익숙하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어요. 벌이 한 마리도 없었소. 단 한 마리도! 이게 뭐지? 대체 무슨 일이야?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벌이 나타나지 않았소. 나중에야 원전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지. 우린 아무 것도 몰랐소. 벌들은 그걸 알았는데 말이오.”

지금도 벨라루스에서는 방사선 피폭이 국민들의 가장 커다란 사망 원인으로 손꼽힌다. 간신히 생명을 건진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계속 죽고, 갑자기 죽어요. 길을 가다가 쓰러져서 깨어나지 않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심장이 그대로 멎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견뎌냈는지, 아무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아요.” 군에서 제대한 남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지 몰라서 두려워요. 내 친구는 죽을 때 몸이 부어올라 드럼통 같았죠. 크레인을 운전하던 옆집 사람은 온몸이 숯처럼 새까매지고 어린아이처럼 야위어갔습니다. 난 평범하게 죽고 싶어요. 체르노빌식 죽음이 아닌 평범한 죽음을 맞고 싶어요.”

젊은 엄마 라리사는 “아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루”를 낳았다. 아기는 온몸의 구멍이 다 막혀 있었다. 열린 것이라곤 두 눈뿐이었다. 라리사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내가 사는 곳에서 사랑에 빠지면 안된다는 걸 몰랐던 것이 죄였다”고 말한다. 아기는 4년에 걸쳐 네 차례의 큰 수술을 받으며 간신히 생명을 건졌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다. 벨라루스보다 의료 시설과 수준이 월등한 곳에서 치료받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이른바 의료 선진국의 큰 병원으로 날마다 편지를 보낸다. “내 딸이 살 수만 있다면 실험용 개구리나 토끼가 돼도 괜찮아요”라고 오열한다.

사람들은 원전이 군사적 핵과 달리 안전한 것이라고 여겼다. 핵전문가들의 허장성세가 잘못된 믿음을 부추겼음은 물론이다. 소련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는 “소련의 원전은 사모바르(러시아의 전통 주전자)만큼이나 안전하다”면서 “크렘린 궁전 옆의 붉은 광장에 원전을 지어도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알렉시예비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그대로 믿은 결과, ‘평화적 핵’이 집집마다 있는 전구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다”고 아프게 지적한다. 그는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며 최근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주목한다. 저자가 보기에 후쿠시마 사태는 “우리가 겪는 두 번째 핵수업”이다. 그는 “세계에서 세 번째 경제대국이 ‘평화적 핵’의 반란 앞에 무릎 꿇은 것을 보라”고 강조한다.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일본의 원전 보호체계도 9.0의 강진 앞에서 아기의 배냇저고리에 불과했다”며 “우리가 진보라고 불렀던 곳에는 잔해만 남았다”고 개탄한다.

저자는 러시아 환경단체의 통계를 인용해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150만명”이라고 적시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벨라루스에서는 계속되는 저준위 방사선의 영향으로 각종 암과 지적장애, 신경정신 질환을 유발하는 유전자 돌연변이의 발생률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체르노빌의 증인”으로 자처하는 초로의 기자 알렉시예비치가 지금도 녹음기를 들고 참상의 현장을 누비는 이유다. 1997년 출간돼 세계 17개국에서 번역된 책. 2006년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에서는 이번에 처음 번역됐다. 김은혜 옮김. 1만6000원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