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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아도르노, <한줌의 도덕>..."전체는 허위다"


 

피아노 치는 아도르노.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쇤베르크의 제자였다. 베베른과 함께 작곡을 공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그의 저서 <현대음악의 철학>은 '빈악파'의 일원으로서 미학적 견해를 표출했던 저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는 무조음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가 보기에 음악에서의 '조성'이란,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조성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제된 '관행'일 뿐이며, 쇤베르크로부터 발원한 무조음악이야말로 그 관습에 도전하는 일종의 저항이었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견해다. 

아래 박스는 경향신문 토요일자에 새로 만든 '에디터의 책꽂이' 코너에 첫번째로 썼던 글. <현대음악의 철학>보다 조금 앞서 집필했던 <한줌의 도덕>을 주마간산으로 소개한 10매짜리 원고다.  




[에디터의 책꽂이]“전체는 허위이다”

기사입력 2011-02-11 22:14 | 최종수정 2011-02-11 22:30

‘에디터의 책꽂이’를 시작하면서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책부터 꺼내드는 것은 무모한 짓일지도 모르겠다. 좀더 말랑말랑하면서도 윤곽선이 뚜렷한 책, 확실한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있어서 ‘복기’(復棋)에 용이한 책을 골라드는 게 대중매체에 몸담고 있는 자의 현명함일 텐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련 곰탱이’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슬며시 후회가 밀려온다.

다시 꺼내든 <한줌의 도덕>은 역시 버겁다. 철학을 전공한 후배의 권유로 몇 해 전 손에 잡았던 것인데, 민망하게도 두어 달이나 걸려 읽어냈던 난공불락의 책이다. 아도르노의 다른 책들이 대개 그렇듯, 이 책을 읽어내는 일에도 적잖은 고통이 뒤따른다. 번역자 최문규는 그것을 아도르노 특유의 “진지함과 유희성, 긍정과 부정의 경계가 해체된 듯한 아이러니한 글쓰기의 특성” 때문으로 설명한다. 아도르노의 글은 문장과 문장의 인과관계를 훌쩍 벗어나 자유자재한 유영을 펼치고, 독해의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접속사들마저 거의 방출함으로써 읽는 이를 미로 속에 헤매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고삐 풀린’ 말처럼 내달리는 방식이야말로 아도르노적이며, 이 책이 추구하는 주제와 긴밀하게 닿아 있다. 알고 보면 주제는 간명하다. 책의 74쪽에 자리한 문장. “전체는 허위다”라는 짧은 문장이야말로 이 책을 함축한다. 모든 ‘전체성’은 일종의 ‘사기’라는 과감한 선언. 그것은 박정희시대에 나고 자라 1980년대에 20대를 보내야 했던 작금의 중년들을 묘하게 가슴 떨리게 만든다.

어째서 아도르노는 ‘전체성’에 대해 그토록 진저리를 친 것일까. 아도르노의 생애와 사상은 철저하게 길항(拮抗)한다. 유태인 지식인이었던 아도르노는 ‘히틀러’와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20세기 전반기의 폭력적 전체주의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나치의 추격에 쫓긴 발터 벤야민은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아도르노는 끝까지 살아서 “상처 입은 삶”을 견뎠다. 하지만 고통의 기억은 나치의 몰락과 히틀러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 망명 이후인 1944~47년 쓰여진 이 책에서도 보여지듯, 그것은 이미 일상 곳곳에 침투한 ‘괴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전쟁이 끝나면 삶은 정상적으로 되며 문화는 재건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파국은 영구화된다.”(82쪽)

아도르노는 우리에게, ‘전체성’이라는 야만은 히틀러라는 개인의 광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비극의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인들이 그토록 신봉해온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이성이라는 괴물은 개별적 존재의 차이를 지우고 동일한 개념으로 획일화했으며, 마침내 ‘우리’와 다른 ‘그들’을 대량 학살하는 비극으로 내달렸다. 어찌 히틀러와 나치뿐이었겠는가. 이성과 합리성에 기대 역사의 진보를 외쳤던 20세기 초·중반은 오히려 참상의 시대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수천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공황으로 벼랑끝에 내몰린 사람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헤맸다.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비개념적’인 것들, 헤겔에 의해 무자비하게 부정됐던 ‘비이성적’인 것들의 부활을 시도한다. 그것은 거대하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며 감성적인 것들에 가깝다. ‘상처 입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라는 부제 아래, 일상에서 건져올린 구체성의 사유를 153개의 짧은 에세이로 풀어놨는데, 그 하나하나가 아도르노의 절절한 고백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문장의 미로에서 건져올린 몇몇 경구들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함께한다는 것, 교류와 협조의 모습을 띤 인간성이란 비인간성을 말없이 용인하는 가면일 뿐이다.” “시대를 통일시킬 경우 개개 존재의 행복과 도덕적 본질을 결정짓는 모든 차이는 객관적으로 사라진다.”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침묵도 객관적인 정신이다.”

6년 전, 원제를 그대로 살린 <미니마 모랄리아>(김유동 역, 길출판사)가 출판되기도 했으나, 필자는 1995년 솔출판사에서 내놓은 책에 이미 손때를 묻혔다. 두 책의 번역을 비교할 능력이 없으니, 손때 묻은 책에 더 정이 갈 수밖에.

<문학수 문화부장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