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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팔로워는 늘어도 왜 친구는 줄까…alone together

외로워지는 사람들…셰리 터클 지음·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560쪽 | 2만3000원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관계의 단절’을 종종 묘사한다. <벚꽃동산>도 그렇고 <갈매기>도 그렇다. 거실의 벽난로 옆에서 차를 마시는 가족은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사실은 서로 딴 생각을 품은 채다. 그들은 상대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않는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먼 허공을 더듬는다. 말하자면 체호프의 연극들은, 한데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인간 군상을 빈번히 그렸다.


물론 100여년 전 러시아의 풍경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그런 정도의 ‘인간적 단절’은 애교로 치부될 법하다. “함께 있으나 따로따로인” 상황은 20세기 후반을 지나며 훨씬 더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 터클에 따르자면, 그 단절을 설계하고 추동하는 것은 테크놀로지다. 인간은 이미 테크놀로지가 설계한 ‘새로운 친밀함’의 세계에 깊숙하게 들어섰다. 테크놀로지의 행위 유도성(affordances)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강력하고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약점을 기다렸다는 듯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그 때문에 외로움을 타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디지털 연결망과 사교 로봇은 ‘친구 맺기를 요구하지 않는 교류’라는 환상을 제공하면서”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아예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해온 저자가 이 책의 서두에서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연결은 늘어나는데 왜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는 갈수록 줄어드는 걸까? 문자와 e메일을 사용할수록 왜 대화가 점점 서툴러지는 걸까? 아바타 꾸미기에 열중할 때 ‘진짜 나’는 어떻게 바뀔까? 사교 로봇과 함께 놀며 성장한 아이들은 점점 커가면서 어떤 인간관계를 맺을까? 저자가 보기에 인류는 이제 딱 두 명뿐이다. “그중 한 명은 네트워크화된 컴퓨터 안에, 또 한 명은 모바일 기기를 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제 우리는 언제나 작동 중인 상태로 네트워크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실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래서 그가 도달한 결론은 ‘다 함께 홀로’(alone together)다. 재즈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가 즐겨 연주했던 곡의 제목과 똑같다. 하지만 음악처럼 낭만적이지 않은, 살벌한 현실이다.

어느 40대 엄마가 황당해하며 저자에게 털어놓은 사연은 이렇다. “저는 새 유모를 구하고 있었어요. 지원자들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는 걸 좋아합니다. 평소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보려고요. ‘로니’라는 지원자의 집에 도착하니, 동거인이 문을 열어주더군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어요. 스물한 살쯤 돼 보이는 아가씬데, 양 엄지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더군요. 작은 부목을 대고 있는 게 아파 보여서 한마디 건넸어요. ‘아휴, 아프겠네요.’ 하지만 아가씨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아직 문자를 보낼 수는 있다더군요. 로니와 면담을 하러 왔으니 방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안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래요? 사생활 침해’라면서 문자를 보내겠다더군요.”

그래서 결국 고작 4~5m 거리에 있는 로니한테 문자메시지가 전해졌다. 저자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의 모습을 “제2의 자아”라고 명명한다. “컴퓨터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하는 나”라는 뜻이다. 그것은 점점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면서 “인간관계를 단순화”시킨다.

저자는 “문자와 e메일을 통한 의사전달은 서로의 감정을 축약시켜버릴 뿐만 아니라 상대를 처리해야 할 물건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진단한다. 젊은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한 학생은 휴대전화에 몰두하고 있는 엄마에게 느낀 서운함을 이렇게 전한다. “휴대폰이 훼방꾼이죠.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엄마는 그걸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흘 만에 엄마 얼굴을 보는 거라도, 차 안에 앉아서 엄마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언제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네트워크는 ‘다 함께 홀로’를 만드는 주범이다. 아울러 저자가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로봇이다. 물론 로봇은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일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이미 로봇을 생명체로 여기기 시작했으며, 로봇의 존재를 ‘없는 것보다 낫다’에서 ‘어떤 것보다 낫다’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현장주의 학자인 그는 놀이방에서 아이들에게 ‘퍼비’ ‘아이보’ ‘키즈멧’ 등과 같은 로봇을 건넨 후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꼬마들은 로봇의 사랑을 얻기 위해 춤추고 노래 부른다. 혹여 로봇이 자기를 싫어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저자가 보기에 아이들한테서만 그런 태도가 발견되는 게 아니다. 요양원에서 지내는 72세의 미리엄은 물범 모양의 사교 로봇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너도 사는 게 슬프지?”

이 책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우리의 인간다움이 사라지고 있음을 수많은 사례와 인터뷰를 통해 경고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테크놀로지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테크놀로지를 빚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다 함께 홀로’의 원인을 테크놀로지에서만 찾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의 한계처럼 보인다. 저자는 ‘단절’과 ‘외로움’의 보다 실체적인 이유인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왜 눈길을 던지지 않는 것일까?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