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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애들 싸움에 망가진 ‘중산층의 교양’…연극 '대학살의 신'

기사입력 2010-05-06 10:56 위클리경향

열 한 살짜리 아이 둘이 공원에서 싸웠다. 정확히 말하면 페르디낭이 브루노의 앞니 두 개를 박살냈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들이 모였다. 원만한 합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합의가 부드럽게 이뤄질 기미가 영 요원하다. 신경전이다. 두 부부는 서로의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고 팽팽하게 설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치고받을 수준까지 육박한다. 그렇다고 진짜로 치고받진 않는다. 교양있는 중산층인 그들에게 물리적 폭력은 사회적 금기일 터. 그러나 그들은 남의 핸드백을 집어던지고 화병의 꽃을 바닥에 내던지면서 난동을 부린다. 그리고 마침내 걸쭉한 육두문자까지 심심찮게 등장한다. 두 부모가 보란 듯이 걸치고 있던 ‘교양’이라는 외피는 그렇게 무너진다.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에서 비롯된 어른 싸움을 무대로 옮겨 놨다. 그래서 이 연극은 중산층의 교양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 방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조롱과 풍자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양반의 팔자걸음 속에 숨은 비루한 욕망을 꼬집었던 것처럼 유럽의 저들은 부르주아적 교양을 쉼없이 조롱해 오지 않았던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학살의 신〉이 보여 주는 메시지가 특별히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게다가 주제를 펼쳐가는 방식도 가볍고 경쾌하다. 그 덕분에 적어도 3분에 한 번씩 관객의 배꼽을 흔든다. 연극적 외피 속에 TV시트콤 같은 속내를 슬쩍 끼워 넣었다는 인상도 들게 한다. 말하자면 상업적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그것은 2000년대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는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영리함’일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도 인기 속에 공연된 그녀의 전작 〈아트〉가 단 세 명의 배우를 등장시켜 관객을 쥐락펴락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네 명의 배우들이 전작과 같은 ‘말빨의 향연’을 펼친다. 이럴 때 흥행의 관건은 당연히 배우들의 연기력과 스타성일 것이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 중인 〈대학살의 신〉에 영화 〈크레이지 하트〉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제프 브리지스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도 있다. 물론 캐런티는 엄청났을 테지만.

그래서 묵직한 뒷맛을 기대하는 관객에게 이 연극을 권하는 건 별로 온당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 편의 연극을 즐겁고 재밌게 맛보려는 관객에게 이만큼 괜찮은 메뉴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서 선보인 〈대학살의 신〉은 스타성보다 연기력 쪽에 좀 더 방점을 찍었다. 배우 박지일과 서주희, 오지혜와 김세동 등 네 명의 배우들이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소화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연기를 펼쳐 놓는다. 덕분에 이 연극의 관람 포인트는 중산층의 허위의식 운운하는 작품의 주제보다 몸을 사리지 않는 네 배우의 ‘신나는 연기’라고 볼 수 있다.

일등공신은 아네트 역할의 서주희다. 그는 완전히 몰입한 코믹 연기를 보여 준다. 극중의 아네트는 네 명의 캐릭터 가운데 가장 심약한 성격이지만 쉼없는 말싸움으로 연극이 자칫 지루해진다 싶을 무렵마다 한바탕씩 판을 뒤집어 놓곤 한다. 그는 남의 집 거실에서 사방으로 파편을 튀기며 구토를 하고 화병에 꽂힌 꽃을 바닥에 내던지며 난동을 부린다. 서주희는 그렇게 얌전하고 교양있고 섹시한 중산층 아줌마의 밑바닥을 온몸을 던지며 보여 줬다. 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문학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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