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5-12 17:48 최종수정 2010-05-13 10:30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이 연극이 던지는 질문은 그것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진실한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함축한다. 때는 1934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 북부의 탄광촌 애싱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광부들의 이야기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세계적 유명세를 얻은 영국 작가 리 홀(44)의 <광부화가들>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광부의 손자이자 아들로 태어나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리 홀의 메시지는 절박하다. 그는 3시간에 달하는 이 연극을 통해 “자본이 강탈해간 예술을 노동하는 공동체에 돌려달라”고 외친다.
어느날 애싱턴의 탄광촌에 미술교사 라이언이 찾아온다. 노동자교육협회의 초청을 받은 그는 미술사를 강의할 슬라이드를 잔뜩 챙겨왔다. 강의실에는 광부인 조지, 지미, 올리버, 치위생사 해리, 조지의 조카인 백수 청년 ‘꼬마’ 등이 모였다. 하지만 그들은 라이언의 미술사 수업이 영 공허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라이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벽화 같은 ‘위대한 작품’을 보여주면서 “느껴보라”고 주문하지만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광부들은 “이건 영 아닌데”라고 반응할 뿐이다. 그렇게 미술사 수업이 수렁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됐을 때, 불현듯 라이언이 제안한다. “직접 해요! 직접 그려보자고요.”
그것이 이른바 ‘애싱턴 그룹’으로 불렸던 광부화가들의 탄생이었다. 올리버의 <홍수>와 <클럽에서의 토요일 밤>, 해리의 <동풍>과 <위원회 모임> 등은 그들의 초기작이었다. 진솔해서 감동적인 그 그림들은 “땅 속으로 360m를 내려가서, 수평으로 1~2㎞를 무릎으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광부들의 삶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낭만적으로 덧칠하지 않았고 탄광 노동자로서의 정치적 구호를 그림을 통해 생경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애싱턴 그룹은 잠시 자본에 유혹당하기도 한다. 극 속에 선량한 후원자의 얼굴로 등장하는 헬렌 서덜랜드는 미술품 콜렉터로 유명한 실제 인물. 그녀가 광부화가들 가운데 가장 투자 가능성이 보이는 올리버에게 후원을 제안한다. “탄광에서 주급을 얼마 받아요?” “2파운드 3실링인데요.” “그러면 2파운드 10실링 드릴게요.” “왜 저한테?” “당신이 좋아서요.” “제가 좋다고요?”
헬렌의 제안에서 비롯되는 올리버의 갈등. 그것은 연극 <광부화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제기하고 있는 자본과 예술의 문제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한데 한국 공연에서 이 문제적 장면과 대사들이 지나치게 압축된 것은 다소 아쉽다. 또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를 찾은 광부화가들이 고흐의 그림 앞에서 주고받는 대사에도 좀더 액센트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한국 공연의 연출가 이상우는 리 홀의 대본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강철의 언어’를 상당 부분 ‘순치’시킨 것처럼 보인다. 코미디를 적절히 가미해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키려고 애쓴 흔적도 역력하다. 영국의 사회주의적 문화전통 속에서 탄생한 애싱턴 그룹의 이야기, 그들에게 바치는 ‘연극적 헌사’를 한국말로 옮기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을 터. 덕분에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광부화가들>은 실제 대본에 비해 다소 말랑해졌고 웃음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논리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작용도 간혹 발견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2차대전이 끝나고 탄광산업이 국유화되기 직전에 작업실에 다시 모인 애싱턴 그룹. 올리버가 걸개 그림을 펼쳐든다. 그리고 다들 외친다. “우리에게 예술을!” “사람을 위한 예술!” “모두 함께 누리는 예술!” 논리적 전제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구호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어서 펼쳐지는 영상 자막이 그 어색함을 상쇄한다는 것. ‘1984년까지 활동한 애싱턴 그룹, 우리는 단 한번도 상업적인 그룹이 아니었습니다.’ 애싱톤 그룹의 일원이었던 올리버가 남긴말이다. 권해효, 문소리, 원창연, 이대연, 윤제문, 민준호 등 출연. 이달30일까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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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이 연극이 던지는 질문은 그것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진실한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함축한다. 때는 1934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 북부의 탄광촌 애싱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광부들의 이야기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세계적 유명세를 얻은 영국 작가 리 홀(44)의 <광부화가들>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광부의 손자이자 아들로 태어나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리 홀의 메시지는 절박하다. 그는 3시간에 달하는 이 연극을 통해 “자본이 강탈해간 예술을 노동하는 공동체에 돌려달라”고 외친다.
어느날 애싱턴의 탄광촌에 미술교사 라이언이 찾아온다. 노동자교육협회의 초청을 받은 그는 미술사를 강의할 슬라이드를 잔뜩 챙겨왔다. 강의실에는 광부인 조지, 지미, 올리버, 치위생사 해리, 조지의 조카인 백수 청년 ‘꼬마’ 등이 모였다. 하지만 그들은 라이언의 미술사 수업이 영 공허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라이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벽화 같은 ‘위대한 작품’을 보여주면서 “느껴보라”고 주문하지만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광부들은 “이건 영 아닌데”라고 반응할 뿐이다. 그렇게 미술사 수업이 수렁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됐을 때, 불현듯 라이언이 제안한다. “직접 해요! 직접 그려보자고요.”
그것이 이른바 ‘애싱턴 그룹’으로 불렸던 광부화가들의 탄생이었다. 올리버의 <홍수>와 <클럽에서의 토요일 밤>, 해리의 <동풍>과 <위원회 모임> 등은 그들의 초기작이었다. 진솔해서 감동적인 그 그림들은 “땅 속으로 360m를 내려가서, 수평으로 1~2㎞를 무릎으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광부들의 삶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낭만적으로 덧칠하지 않았고 탄광 노동자로서의 정치적 구호를 그림을 통해 생경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애싱턴 그룹은 잠시 자본에 유혹당하기도 한다. 극 속에 선량한 후원자의 얼굴로 등장하는 헬렌 서덜랜드는 미술품 콜렉터로 유명한 실제 인물. 그녀가 광부화가들 가운데 가장 투자 가능성이 보이는 올리버에게 후원을 제안한다. “탄광에서 주급을 얼마 받아요?” “2파운드 3실링인데요.” “그러면 2파운드 10실링 드릴게요.” “왜 저한테?” “당신이 좋아서요.” “제가 좋다고요?”
헬렌의 제안에서 비롯되는 올리버의 갈등. 그것은 연극 <광부화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제기하고 있는 자본과 예술의 문제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한데 한국 공연에서 이 문제적 장면과 대사들이 지나치게 압축된 것은 다소 아쉽다. 또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를 찾은 광부화가들이 고흐의 그림 앞에서 주고받는 대사에도 좀더 액센트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한국 공연의 연출가 이상우는 리 홀의 대본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강철의 언어’를 상당 부분 ‘순치’시킨 것처럼 보인다. 코미디를 적절히 가미해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키려고 애쓴 흔적도 역력하다. 영국의 사회주의적 문화전통 속에서 탄생한 애싱턴 그룹의 이야기, 그들에게 바치는 ‘연극적 헌사’를 한국말로 옮기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을 터. 덕분에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광부화가들>은 실제 대본에 비해 다소 말랑해졌고 웃음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논리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작용도 간혹 발견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2차대전이 끝나고 탄광산업이 국유화되기 직전에 작업실에 다시 모인 애싱턴 그룹. 올리버가 걸개 그림을 펼쳐든다. 그리고 다들 외친다. “우리에게 예술을!” “사람을 위한 예술!” “모두 함께 누리는 예술!” 논리적 전제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구호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어서 펼쳐지는 영상 자막이 그 어색함을 상쇄한다는 것. ‘1984년까지 활동한 애싱턴 그룹, 우리는 단 한번도 상업적인 그룹이 아니었습니다.’ 애싱톤 그룹의 일원이었던 올리버가 남긴말이다. 권해효, 문소리, 원창연, 이대연, 윤제문, 민준호 등 출연. 이달30일까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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