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6-03 18:00 최종수정 2010-06-04 00:16
막이 오르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에서 “와”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잡아끄는 매혹적인 무대였다.
30m가 넘는 깊이를 그대로 살려낸 갈색 톤의 질감 있는 무대. 전면은 널찍하고 뒤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서 사다리꼴 모양새를 취했다.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오래된 영지 ‘벚꽃동산’에 자리한 대저택의 실내다. 오랜 세월 간직해온 풍요로움과 당당함, 그 저택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숱한 가솔들, 하지만 러시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면서 점점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벚꽃동산의 슬픈 운명을 고스란히 담아낸 무대였다. 삐걱대는 나무 틈새로 간신히 스며 들어오는 햇살. 그것은 마치 앓아 누운 노인의 팔목처럼 앙상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린 체호프의 <벚꽃동산>(사진). 에밀 카펠류쉬가 디자인한 무대는 기대한 대로 미학적 완성도가 높았다. 그는 6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공연한 체호프의 <갈매기>에서도 그렇게 근사한 무대를 펼쳐보인 적이 있다. 무대의 폭과 깊이를 남김없이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실과 상징을 적절히 배합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번 무대도 역시 그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연극은 첫인상의 강렬함을 뒷받침할 만한 뒷심을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배우들의 덜 익은 연기 탓이었다. 그것이 캐스팅의 실패이거나 연습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연출자 그레고리 지차트콥스키와 한국 출연진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연 첫날인 28일, 가예프 역을 맡은 배우 이찬영을 비롯한 몇몇 외에는 어설프게 겉도는 연기를 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연히 앙상블은 무너졌다.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앙상블이야말로 체호프 연극의 관건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체호프 연극은 산만하고 시끄러운 소동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크다. 체호프는 언제나, 힘주어 말하지 않지만 은근히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치밀한 연기와 앙상블이야말로 체호프의 내밀한 속내를 푸는 열쇠다.
우리는 그것을 한 달 전 LG아트센터에서 확인한 바 있다. 러시아의 거장 레프 도진이 연출한 <바냐아저씨>에서였다. 당시 이 연극은 러시아어로 공연됐음에도 관객에게 체호프 연극의 짙은 울림을 전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어로 공연됐음에도 울림이 짧다. 주지하다시피 올해는 체호프 탄생 150주년. 상반기에 이미 여러 편의 체호프 연극이 공연됐고 관객의 눈높이는 당연히 올라갔다. 이 정도의 <벚꽃동산>으로는 현재의 관객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힘들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늙은 하인 피르스 역을 맡은 관록의 배우 신구가 휘청거리던 연극의 중심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방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적막감을, 배우 신구가 ‘홀몸’으로 보여준다. “인생이 다 지나갔어. 그런데도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것도.”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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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에서 “와”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잡아끄는 매혹적인 무대였다.
30m가 넘는 깊이를 그대로 살려낸 갈색 톤의 질감 있는 무대. 전면은 널찍하고 뒤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서 사다리꼴 모양새를 취했다.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오래된 영지 ‘벚꽃동산’에 자리한 대저택의 실내다. 오랜 세월 간직해온 풍요로움과 당당함, 그 저택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숱한 가솔들, 하지만 러시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면서 점점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벚꽃동산의 슬픈 운명을 고스란히 담아낸 무대였다. 삐걱대는 나무 틈새로 간신히 스며 들어오는 햇살. 그것은 마치 앓아 누운 노인의 팔목처럼 앙상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린 체호프의 <벚꽃동산>(사진). 에밀 카펠류쉬가 디자인한 무대는 기대한 대로 미학적 완성도가 높았다. 그는 6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공연한 체호프의 <갈매기>에서도 그렇게 근사한 무대를 펼쳐보인 적이 있다. 무대의 폭과 깊이를 남김없이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실과 상징을 적절히 배합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번 무대도 역시 그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연극은 첫인상의 강렬함을 뒷받침할 만한 뒷심을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배우들의 덜 익은 연기 탓이었다. 그것이 캐스팅의 실패이거나 연습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연출자 그레고리 지차트콥스키와 한국 출연진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연 첫날인 28일, 가예프 역을 맡은 배우 이찬영을 비롯한 몇몇 외에는 어설프게 겉도는 연기를 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연히 앙상블은 무너졌다.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앙상블이야말로 체호프 연극의 관건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체호프 연극은 산만하고 시끄러운 소동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크다. 체호프는 언제나, 힘주어 말하지 않지만 은근히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치밀한 연기와 앙상블이야말로 체호프의 내밀한 속내를 푸는 열쇠다.
우리는 그것을 한 달 전 LG아트센터에서 확인한 바 있다. 러시아의 거장 레프 도진이 연출한 <바냐아저씨>에서였다. 당시 이 연극은 러시아어로 공연됐음에도 관객에게 체호프 연극의 짙은 울림을 전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어로 공연됐음에도 울림이 짧다. 주지하다시피 올해는 체호프 탄생 150주년. 상반기에 이미 여러 편의 체호프 연극이 공연됐고 관객의 눈높이는 당연히 올라갔다. 이 정도의 <벚꽃동산>으로는 현재의 관객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힘들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늙은 하인 피르스 역을 맡은 관록의 배우 신구가 휘청거리던 연극의 중심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방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적막감을, 배우 신구가 ‘홀몸’으로 보여준다. “인생이 다 지나갔어. 그런데도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것도.”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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