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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연극 '하얀 앵두'…따뜻한 유머, 공허한 뒷맛

연극평론가 김옥란은 극작가 배삼식을 일러 “유쾌한 소요유(逍遙遊)”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세상사의 악다구니와 무관하게, 느긋하고 자유스럽게 노닌다는 뜻일 테다. 김옥란은 이에 대해 “극적인 클라이맥스도, 꽉 짜인 플롯의 인과관계도 없다. 대신 깊이와 여백이 있다”고 부연한다. 그것은 이 극작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적 관점과 태도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중인 <하얀 앵두>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입각 내정자들의 청문회를 앞두고 세상이 온통 뒤숭숭한 와중에도, 배삼식의 연극은 여전히 따뜻하고 느긋한 유머를 선사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8명. 늙은 진돗개 ‘원백이’까지 셈한다면 9명의 캐릭터가 연극 속에서 저마다 역할을 선보이는데, 어느 누구도 무언가에 경도되거나 극단적인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착한 심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배삼식은 그렇게 잘나지도 모나지도 않은 “소요유”적 인물들을 강원도 영월 근처의 어느 산골로 데려와 관객의 눈앞에 한 편의 ‘무공해 연극’을 펼쳐놓는다.





53세의 ‘반아산’은 별볼 일 없는 작가다. 얼마 전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받고 산골로 삶터를 옮겼다. 그의 아내 ‘하영란’은 그다지 이름을 날리지 못한 연극배우다. 때때로 TV드라마에도 얼굴을 비치지만 그저 잠시 나왔다 들어가는 정도다. 딸 ‘반지연’은 18세의 여고생. 이 예쁘장한 아이는 열일곱살 위의 윤리교사와 사랑에 빠져 임신에까지 이르고 만다. 반아산의 대학 후배인 ‘권오평’은 지질학자다. 10년 전 아내와 사별했다. 스무살 아래의 조교 ‘이소영’은 그를 흠모하면서도 노상 구박만 당한다.

거기에 의미있는 인물 두 명이 더 등장한다. 70대의 동네 노인 ‘곽지복’. 주문진이 고향인 그는 본의 아니게 ‘납북어부’가 됐다가 간첩으로 몰려 교도소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 와중에 가족을 모두 잃고 영월 산골로 들어와 남은 생을 보내는 중이다. 또 한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90대의 ‘송도지’ 할머니. 반아산이 이사해 들어온 시골집의 원래 주인이었던 그녀는 극중 ‘막간극’에 혼령의 모습으로 몇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무서운 음기를 뿜어내는 귀신이 아니라,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착한 혼령’이다.



가슴 속에 다들 한가지씩 상처를 간직한 인물들을 통해 몇개의 에피소드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진돗개 원백이다. 열네살이나 먹은 이 늙은 개가 숫처녀 ‘복순이’를 건드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복순이의 주인 곽지복 노인이 반아산의 집을 찾아와 노발대발 역정을 내고, 반아산은 그에게 싹싹 빌면서 이웃사촌의 관계가 이뤄진다. 곽노인은 반아산의 집에서 TV도 보고 고기와 막걸리도 얻어먹으면서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휑했던 마당에 온갖 꽃나무를 심어주면서 반아산이 늘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을 재현해준다. 이 연극에서 꽃나무를 심는 행위는, 황폐하게 단절된 세상에서도 영원히 이어져온 자연의 섭리, 그렇게 반복되는 재생(在生)의 메시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에피소드는 여고생 딸 하지연의 임신. 원백이 사건에서 가해자 입장이었던 반아산은 피해자로 신분이 바뀌어 길길이 날뛰고, 학교에 사표를 내던진 교사 ‘윤조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연이를 책임지겠다”며 ‘장인 어른’의 발목을 붙잡고 애걸복걸 매달린다. 만약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적잖이 충격적이었을 교사와 여고생의 임신 사태. 하지만 작가 배삼식은 이마저도 소요유적 웃음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말은 해피 엔딩이다. 지연이와 윤조안은 17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결혼하고, 권오평과 이소영 조교도 새로운 사랑을 설계한다. 늙은 개 원백이는 어느날 세상을 떠나지만 복순이는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는다. 반아산은 다시 작품을 구상하고, 하영란은 새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연습에 돌입한다. 한때 어긋나 보였던 모든 것들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하얀 앵두>의 결말은 아쉽게도 TV드라마적 통속에 빠진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족형 전원 판타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연극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머릿속이 좀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김동현 연출. 8월 29일까지. 

<문학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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