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8-11 21:46 |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묘미 가운데 하나는 ‘낯선 연극’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통념으로 해석하기 난감한 ‘이상한 연극’일 때도 있다. 그래서 객석에 앉은 관객은 때때로 불편하거나 지루하다. ‘대체 이게 뭔 소린가’라는 푸념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어딘가 불편한, 새로운 상상력과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소극장에 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대학로의 정보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프로즌 랜드>(사진)는 그런 점에서 볼 만한 연극이다. 84년째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상한 나라에서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어느 가족의 파멸을 때로는 희화적으로, 때로는 비극적으로 그려낸다. 리얼리즘과 블랙 코미디가 뒤섞이면서 관객의 눈을 혼란스럽게 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신예 작가 겸 연출가 이재신의 상상력은 신선하면서도 묵직해 보인다. 최근의 연극판에서 종종 눈에 띄는, 휴머니즘을 가장한 우파적 센티멘털리즘과 멀찌감치 거리를 둔 점도 작가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극의 배경은 혹독한 겨울이다. 동쪽과 서쪽은 84년째 길고 긴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왜 전쟁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공습경보가 울릴 때마다 방공호로 대피하는 일상에 젖어 있다. 관객의 눈앞에 펼쳐진 무대는, 그 전쟁의 와중에 겨우겨우 삶을 유지하는 어느 가족의 허름한 집. 콘크리트 벽에는 여기저기 금이 갔고, 네 식구의 차림새는 노숙인과 진배없다. 깡통만 들려주면 영락없는 거지다. 게다가 아버지는 기면증 환자. 어디선가 포탄 터지는 소리라도 들려오면 졸도하듯 잠에 빠져든다. 엄마는 나이만 잔뜩 먹었을 뿐, 하는 짓은 영락없는 어린애다. 오히려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딸 ‘만영’이 훨씬 노련하고 영악하다. 하지만 그 영악함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공포이자 본능이다. 아들 ‘만수’는 치유되기 힘든 정신질환에 빠진 채 정물처럼 겨우 숨만 쉬는 상태. 그는 군대에 동원됐다가 적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던 와중에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의 엄혹함을 ‘전쟁’이라는 상황으로 치환해 보여준다. 네 식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전쟁만을 겪어왔으며, 그것이 경험의 전부인 까닭에 누구도 ‘평화’를 상상하지 못한다. 다만 이런 꿈을 꿀 뿐이다. 잠에 빠져든 엄마는 커다란 빵을 가지고 따뜻한 바닷가를 홀로 걸으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딸 만영은 “순결을 상징하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딴딴따단” 하는 환상을 품곤 한다.
하지만 아무도 꿈을 이루지 못한다. ‘외부인’들이 일가의 허름한 집을 한차례씩 방문할 때마다 가족의 삶은 점점 황폐해진다. 가장 먼저 찾아온 외부인은 하얀 모자를 쓴 사람들. 그들은 “낡아빠진 국가 방공호를 믿을 수 없으니, 당신네들 집에 사설 방공호를 만들어주면 두둑하게 돈을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래서 가족은 곡괭이를 구하려고 발버둥친다. 결국 딸 만영이 공병대원에게 몸을 팔고 간신히 곡괭이 한 자루를 얻어내지만, 그 곡괭이로 방공호를 파들어갈수록 일은 더욱 꼬인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옆집 박씨, 동네 반장, 정보부 요원 등이 차례로 가족을 방문하면서 결국 살인이 일어나고 네 식구는 마침내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작가 겸 연출가 이재신은 이 과정을 통해, 자본과 공권력이 가족과 개인을 파탄내는 상황을 만화적 상상력으로 비틀어 묘사한다.
연극의 전개 속에는 일종의 퍼즐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극중의 엄마가 길거리에서 주워온 “알 수 없는 암호가 적혀 있는 이상한 책”. 이것은 연극의 곳곳에서 의미없는 말장난처럼 수시로 등장한다. “13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이상의 시 ‘오감도’는 그렇게 여러번 반복되면서, 같은 작가의 소설 <날개>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연극의 구조에 대한 일종의 ‘힌트’를 제공한다. <날개>의 주인공 ‘나’는 유곽에서 몸 파는 아내에게 얹혀 살다가 집 밖으로 외출하면서 점점 자아에 눈을 떠가지만, 이 연극은 그 구조를 정확히 반대로 뒤집는다. 외부인들이 ‘우리’를 찾아오면서 점점 산산조각나는 삶.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생존하는 인물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찍어대는 정신질환자 만수뿐이다. 연극 <프로즌 랜드>가 인식하는 현실은 그렇게, ‘식민지 조선’보다 오히려 잔인하다. 극단 청우(대표 김광보)의 스물여섯번째 작품. 22일까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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