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7-21 18:06
고향은 완전히 물 속에 가라앉았다. 마을 어귀를 늠름히 지켜주던 느티나무, 고개 너머의 초등학교, 물수제비를 뜨고 다슬기를 건져올리던 실개천, 산등성이를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이던 진달래꽃…. 모두 사라졌다. 어린 시절 동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연극 <핼리혜성>(사진)은 그렇게, 눈부시지만 슬픈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1986년에 지구를 지나간 핼리 혜성처럼, 76년을 기다려야 다시 지구를 찾아오는 그 별처럼,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원형질’에 대한 아픈 회고다.
연극의 배경은 제천댐 수몰지구. 소극장의 한가운데 자리한 무대에 단순하고 커다란 타원형 수조가 놓였다. 수조에는 배우들의 정강이에 차 오를 만큼 물이 담겼다. 산중턱까지 물에 잠겨 점점 가라앉는 고향 마을의 형상인 셈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자신의 모습을 아직 완전히 잃지 않은 상태. 중앙의 무대를 바라보는 삼각형 구도의 객석 여기저기에 화가 장욱진 풍의 나무들이 서 있고, 산중턱 언저리엔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시골집 한 채가 자리했다. 하지만 홀로 남은 집은 외로워 보인다. 수조에는 여기저기 징검돌이 놓였고, 진달래 꽃잎과 나뭇잎이 둥둥 떠다닌다. <핼리혜성>의 무대는 그렇게 동화적이고 상징적이다. 무대 디자이너 하성옥의 솜씨. 최소한의 이미지로 모든 걸 설명해내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어린이책의 일러스트처럼 ‘예쁜 무대’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관객들은 그 ‘예쁨’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연극은 삼촌 혁택과 조카 명주가 수몰된 고향땅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삼촌이 고향에서의 추억과 아픔을 조카 앞에서 회상하는 한나절의 여정이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영주야 이 아래가 온통 마을이었어. 여기가 순덕이네 집 앞길쯤 될 거야. 우리 마을에 하나뿐인 구멍가게였지. 저기는 민용이네 밭, 저기는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도랑이 있었고….” 이어서 시계바늘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정놀이, 술래잡기, 강가에서 동무들과 고기잡기, 사소한 일로 엄마와 입씨름하기 등이 코러스 배우들의 유머러스한 몸연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특히 코러스 유명상의 능청스러운 바보 연기는 관극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그는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핼리혜성>의 연극적 유희성을 한층 부각시킨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어찌 추억이 하냥 아름답겠는가. 어린 시절의 체험을 한 편의 연극으로 털어놓은 신예 이양구는 ‘연출의 글’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를 여러 문장들 속에 슬쩍 끼워놓았다. “가난했던 부모, 부모 대신 서울로 돈 벌러 떠나야 했던 큰형.” 어쩌면 그것은 사라진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작가의 내면에 한층 크게 드리워진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르겠다. 연극 속에 등장하는 ‘혁준’은 혁택의 형이자 명주의 아버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가득했던 이 ‘이타적 인물’은 서울의 백화점 공사장에 돈 벌러 갔다가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이 연극은 ‘수몰된 고향’이라는 공간의 상실과 함께, 형의 주정과 폭력으로 산산조각나는 ‘가족의 몰락’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그래도 작가 겸 연출가 이양구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시종일관 놓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체험에서 빚어진 진실한 구체성은 관객들에게 감성적 설득력을 갖고 다가간다. 물론 극적 구성이 다소 성기다는 약점을 부인하긴 어렵겠다. 혁준의 ‘돌연한’ 변화, 딸 명주의 애매한 캐릭터 등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반면에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연극이 ‘한 편의 공연’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것. 동화적인 수조 무대에서 펼쳐지는 어린 시절의 회상 장면에서 5명의 코러스들이 보여주는 몸짓과 구음(口音)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솜씨였다. 그중에서도 장원, 고지현, 최현지는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정진을 기대한다. 23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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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완전히 물 속에 가라앉았다. 마을 어귀를 늠름히 지켜주던 느티나무, 고개 너머의 초등학교, 물수제비를 뜨고 다슬기를 건져올리던 실개천, 산등성이를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이던 진달래꽃…. 모두 사라졌다. 어린 시절 동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연극 <핼리혜성>(사진)은 그렇게, 눈부시지만 슬픈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1986년에 지구를 지나간 핼리 혜성처럼, 76년을 기다려야 다시 지구를 찾아오는 그 별처럼,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원형질’에 대한 아픈 회고다.
연극의 배경은 제천댐 수몰지구. 소극장의 한가운데 자리한 무대에 단순하고 커다란 타원형 수조가 놓였다. 수조에는 배우들의 정강이에 차 오를 만큼 물이 담겼다. 산중턱까지 물에 잠겨 점점 가라앉는 고향 마을의 형상인 셈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자신의 모습을 아직 완전히 잃지 않은 상태. 중앙의 무대를 바라보는 삼각형 구도의 객석 여기저기에 화가 장욱진 풍의 나무들이 서 있고, 산중턱 언저리엔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시골집 한 채가 자리했다. 하지만 홀로 남은 집은 외로워 보인다. 수조에는 여기저기 징검돌이 놓였고, 진달래 꽃잎과 나뭇잎이 둥둥 떠다닌다. <핼리혜성>의 무대는 그렇게 동화적이고 상징적이다. 무대 디자이너 하성옥의 솜씨. 최소한의 이미지로 모든 걸 설명해내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어린이책의 일러스트처럼 ‘예쁜 무대’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관객들은 그 ‘예쁨’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연극은 삼촌 혁택과 조카 명주가 수몰된 고향땅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삼촌이 고향에서의 추억과 아픔을 조카 앞에서 회상하는 한나절의 여정이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영주야 이 아래가 온통 마을이었어. 여기가 순덕이네 집 앞길쯤 될 거야. 우리 마을에 하나뿐인 구멍가게였지. 저기는 민용이네 밭, 저기는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도랑이 있었고….” 이어서 시계바늘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정놀이, 술래잡기, 강가에서 동무들과 고기잡기, 사소한 일로 엄마와 입씨름하기 등이 코러스 배우들의 유머러스한 몸연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특히 코러스 유명상의 능청스러운 바보 연기는 관극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그는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핼리혜성>의 연극적 유희성을 한층 부각시킨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어찌 추억이 하냥 아름답겠는가. 어린 시절의 체험을 한 편의 연극으로 털어놓은 신예 이양구는 ‘연출의 글’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를 여러 문장들 속에 슬쩍 끼워놓았다. “가난했던 부모, 부모 대신 서울로 돈 벌러 떠나야 했던 큰형.” 어쩌면 그것은 사라진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작가의 내면에 한층 크게 드리워진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르겠다. 연극 속에 등장하는 ‘혁준’은 혁택의 형이자 명주의 아버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가득했던 이 ‘이타적 인물’은 서울의 백화점 공사장에 돈 벌러 갔다가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이 연극은 ‘수몰된 고향’이라는 공간의 상실과 함께, 형의 주정과 폭력으로 산산조각나는 ‘가족의 몰락’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그래도 작가 겸 연출가 이양구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시종일관 놓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체험에서 빚어진 진실한 구체성은 관객들에게 감성적 설득력을 갖고 다가간다. 물론 극적 구성이 다소 성기다는 약점을 부인하긴 어렵겠다. 혁준의 ‘돌연한’ 변화, 딸 명주의 애매한 캐릭터 등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반면에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연극이 ‘한 편의 공연’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것. 동화적인 수조 무대에서 펼쳐지는 어린 시절의 회상 장면에서 5명의 코러스들이 보여주는 몸짓과 구음(口音)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솜씨였다. 그중에서도 장원, 고지현, 최현지는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정진을 기대한다. 23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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