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이오진의 <가족오락관>이 지난 19일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제 갓 대학(한예종 연극원)을 졸업한 새내기 작가. 한데 기대해볼 만한 신예의 등장이다. 참신한 상상력, 재기발랄한 스토리 전개와 경쾌한 캐릭터가 무엇보다 눈에 띈다. 아울러 세상의 일그러진 구조에 대한 작가적 안목도 느껴진다. 놀이로서의 연극과 사회적 반영으로서의 연극. 이 신예는 그중에서도 재기발랄한 놀이 쪽에 좀더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사회적 앵글로 들여다보면서, 우리 시대에 연극이 어떤 자리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정답으로서의 ‘가족’이 존재해왔던 게 사실이다. 책임감 강한 아버지와 예쁘고 상냥한 엄마는 바로 그 가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었다. 하지만 이 연극은 막을 올리자마자 우리의 기억 속에 주입돼온 ‘가족’이라는 유리집을 단숨에 허문다. 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까지, 온가족이 신나게 몸을 흔들며 노래방 기계 앞에서 악을 써댄다. 그 와중에 며느리이자 엄마인 ‘주정’의 휴대폰이 길게 울린다.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 “얘들아, 병원 가자. 아빠가 돌아가셨다.”
가장이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가족은 유지돼야 한다. 물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자나깨나 ‘단란한 가정’을 주입해온 세상은 이럴 때 냉랭하다. 결국 주정은 노래방 도우미로, 아들 ‘명진’은 컴퓨터 부품 공장 노동자로, 딸 ‘명주’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사회에 발을 내디딘다. 할머니 ‘순영’은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곧바로 까무러쳐 내내 식물인간 상태. 할아버지 ‘종덕’은 소주를 훌쩍이는 것과 TV채널 돌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는 노인네다. 그에게 의미있는 사회 활동은 며느리한테 ‘삥’을 뜯어 화투판을 기웃거리는 정도다. 다세대주택 3층에 세든 일가의 삶은 날이 갈수록 지저분하고 피폐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복수였다. 엄마와 아들이 어설프게 공모한 살인은 어렵지 않게 성사된다. 이어서 딸 명주를 임신시키고 모른 척하는 주유소 사장, 아침부터 밤까지 아들 명진을 괴롭히는 공장의 반장, 노래방에서 엄마 주정에게 오럴 섹스를 강요하는 남자 등이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TV뉴스에서는 연일 살인 사건이 흘러나오지만, 어설픈 일가족이 살인 행각을 벌였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제목이 암시하듯, 살인은 어느덧 오락이다. 가족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킬킬거린다. 급기야 식물인간 할머니의 목을 조르고, 주정뱅이 할아버지의 소주에 약을 타는 파탄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가족오락관>이 살인을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연극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들을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보여주면서, 오늘의 우리를 둘러싼 비인간적 삶에 대해 씁쓸한 표정을 짓게 만든다.
연출가 김태형은 무대를 조금 더 손봤으면 싶은 바람이 남는다. 가볍고 빠르게 흘러가야 할 블랙 코미디를 사실주의적으로 연출하면서 다소 엇박자가 나고 말았다. 게다가 무대 위에 과도하게 펼쳐진 소품들은 관객의 시선을 방해한다. 극 속에서 제대로 생명을 얻지 못하는 물건들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좀더 날렵한 다이어트가 필요해 보인다. 9월5일까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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