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출가 박근형을 좋아한다. 때로는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 이유를 열거해보자면 이런 것들이다. 연극을 향한 순수한 열정, 작품이 잘 안 풀릴 때 그가 짓는 초초^난감한 표정, 밑바닥에서 시작해 오늘의 박근형을 이뤄낸 뚝심, 작은 몸집 어딘가에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배짱, 허름한 옷차림, 약간 어리버리해 보이는 촌놈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만드는 연극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박근형을 처음 만난 건 대략 10년 전쯤이다. 그는 첫대면에서부터 "한잔 하면서 얘기하죠?"라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집으로 사람을 끌고 간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둘러대면서 번번히 그와의 대작을 피했으니 공연히 미안할 뿐이다. 하여튼 그는 처음 만난 10년 전에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죠?"라고 했는데, 별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형'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올해 초에 만났을 때도 그는 대뜸 "요 앞에 술집으로 가시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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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풍자가 존재하는 건 당연… 쓰라린 시대, 시원한 때도 있어야”
ㆍ‘동백아저씨’‘소설처럼’ 연작 무대 올리는 연출가 박근형·이은준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정문 앞. 극단 골목길의 사무실 겸 연습실은 바로 그 맞은 편에 있다. 오후 6시. 극작가 겸 연출가 박근형(51·사진 왼쪽)과 이은준(35·오른쪽)이 위층 횟집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같은 극단 선후배인 두 사람은 2월 1일부터 23일까지 대학로의 선돌극장에서 <동백아저씨>와 <소설처럼>을 한 무대에서 연작으로 공연할 참이다. 이날 인터뷰는 이 두 편의 신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지난해 9월 ‘박정희 비하’로 한동안 논란에 올랐던 박근형의 연극 <개구리>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밑바닥 인생·삼각관계 다룬 연작 내달 대학로서 공연
박정희 비하 논란 ‘개구리’
색안경 낀 비판은 옳지 않아
-이번 연극 <동백아저씨>는 연극작가 박근형이 직접 쓰고 연출하는 신작이라는 점에서 눈길이 갑니다. 지지리 궁상맞은 40대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런 극단적인 밑바닥 삶에 대한 이야기는 박근형 연극의 한 축이기도 하죠. 이를테면 <청춘예찬>도 그랬고.
“(옆자리의 이은준을 가리키며) 은준이가 <소설처럼>을 먼저 준비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한 60분 분량이죠. 같은 무대에서 연작으로 공연할 다른 연극이 한 편 더 필요했어요. 어떤 걸 써볼까 생각하다가 한달쯤 전에 TV <가요무대>에서 이미자씨가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걸 봤어요. 그때 문득 ‘이동백’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의 주인공 이동백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원장이 가요무대에서 이미자의 노래를 듣다가 아이의 이름을 동백이라고 지었다. 어느덧 마흔이 넘은 동백은 문방구 한쪽에서 도장 파는 일을 하면서 변두리 낡은 여관의 30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산다. 동백은 하루하루가 뼈가 시리게 외롭다. 여자에게서 위로받고 싶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엄청난 거금이랄 수 있는 10만원으로 여자를 사고, 그것을 잊지 못해 매주 10만원씩 모으기 시작한다.
이은준의 <소설처럼>은 영국 극작가 해롤드 핀터의 <배신>을 개작한 연극이다. 이은준은 “뻔한 삼각관계일 수도 있는 남녀의 이야기지만 우리 안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싶다”고 극작 의도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은준이 극작과 연출 겸업을 선언했던 첫 작품 <속살>(2011)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은준은 “나는 사람의 속마음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면서 “<속살>도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겉도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01년 국립극단에서 공연했던 박근형의 연극 <집>에서였다. 당시 국립극단 연수단원이었던 이은준이 이 연극의 조연출로 참여하면서였다. 이은준은 “당시 국립극단 김철리 예술감독에게 조르고 졸라서 대학시절부터 팬이었던 박근형의 조연출로 들어갔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것이 2002년 극단 골목길을 함께 창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주로 박근형이 쓴 작품을 연출했지만 3년 전에 본인이 직접 극작을 개시했다. “<프랑스 정원>(2010)을 연출했을 때부터 박 선배와 저는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거든요. 그동안 박 선배의 희곡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직접 쓴다는 건 역시 두려웠어요. 박 선배한테 어떻게 쓰냐고 물었더니 ‘그냥 쓰면 돼!’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첫작품 <속살>을 썼던 거죠.”
-이번에는 박근형 연출가에게 물어야겠네요. 이 질문을 빼놓고 갈 수는 없죠. 지난해 가을에 있었던, 이른바 ‘개구리 논란’을 겪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일본 도쿄에서 <쥐>를 공연하고 있는데 국립극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기자가 통화를 원한다고.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걸었죠. 질문에 대답을 다 했어요. 제 생각대로 얘기했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기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죠. 연극 <개구리>가 왜 그런 논란거리가 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거죠. <개구리>는 그리스 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이 원작인데, 원래부터 이 연극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는 작품입니다. 저는 우리 식으로 재창작하면서 현 대통령의 아버지(박정희)와 과거의 대통령(노무현)을 등장시켰던 거죠. 연극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지금도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제 연극 <선착장에서>를 보셨잖아요? 노무현 대통령 쌍꺼풀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다고 비아냥대는 장면이 나오지요. 하지만 노 대통령을 비하했다는 비난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박근형은 “한마디만 더 하겠다”고 했다. “국립극단 측에는 미안했습니다. 저로 인해서 마음고생들을 했으니까. 연극을 비판하려면 연출력이 미진했다든가, 각색을 잘 못했다든가, 배우들의 연기가 아쉽다든가 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죠. ‘국립극단에서 어떻게 이런 연극을’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연극에 풍자가 존재하는 건 당연하죠. 시대가 깜깜하니까, 이 쓰라림을 견디면서 가끔 시원할 때도 있어야 하잖아요. 경향신문 2면에 김용민 만평 있잖아요. 그 만평에서 보톡스 맞은 것 같은 대통령 얼굴을 보는 순간 왠지 시원해지잖아요? 그 시원함마저 느낄 수 없다면 절망이라고 할 수밖에요.”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강윤중 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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