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직도 ‘고도’냐고?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 이보다 잘 쓴 희곡 못 봤거든”
|기사입력 2013-10-09 22:39
ㆍ병상에서 돌아온 ‘리얼리즘 연극의 거목’ 임영웅
지난봄, 여든을 바라보는 연출가는 쓰러졌다. 발단은 척추 디스크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병석에 누워 있었던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수술 이후의 진통제와 항생제가 의식을 아예 앗아간 탓이다. 그는 “몸이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만 흐릿하게 기억날 뿐, 병실에 누가 다녀갔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연극판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다녀와야 되는 것 아니냐는 설왕설래까지 떠돌았다. 그만큼 상태는 심각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지난 8일 서울 홍대앞의 산울림소극장. 연출가 임영웅은 다리를 약간씩 절어 걸음이 다소 불편했지만, 여전히 쩌렁한 목소리로 배우들에게 호통을 쳤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의 힘도 여전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살았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임영웅이 1969년 한국 초연한 이후, 거의 매년 공연해온 이 작품을 올해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게 됐다. 병석에서 훌훌 털고 일어선 노구의 연출가는 “이 작품은 나의 존재증명인 셈이다. 연극을 할 수 있는 날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69년 초연 이래 거의 매년 ‘고도를 기다리며’ 연출…
“요즘 연극인들, 죽기 살기로 해야지 폼으로 하면 되나”
-좀전에 단원 두 명이 무대 위의 티끌을 남김없이 줍더라고요. 티끌 좀 있어도 공연하는 데 별 지장은 없을 텐데, 너무 엄하신 거 아닙니까?
“기왕에 하는 거 철저하게 해야죠.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도 그렇지요. 한번 타협하게 되면 타성으로 굳어져요.”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1969년 초연하셨어요. 당시 한국의 연극판에서, 이른바 ‘부조리극’이라고 불리는 연극을 올리셨다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지금도 ‘부조리극’은 난해한 연극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데요.
“예, 내년이면 벌써 초연 45주년을 맞아요. 처음 연출할 때는 정말 악전고투했지요. 1960년대 초반에 신문사 문화부에서 연극담당 기자로 일할 때 일본어판으로 <고도>를 처음 읽었어요. ‘야, 이거 희한하다’라는 느낌을 받았지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것 같은,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습니다. 초연 때는 신구문화사에서 번역한 대본을 사용했어요. 불문학자 정명환 선생의 번역이었지요. 연출가인 저도 작품을 이해하려고 참고서적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초연하던 1969년에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 ‘난해한 연극’이 대박 났어요. 혹시 그런 찬스를 예감하셨나요?
“전혀 아니지요. 완전히 운이 좋았던 겁니다. 7월에 연습에 들어갔는데 가을에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잖아요. 일주일치 표가 완전히 매진돼서 3일 동안 연장공연을 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런 매진 폭풍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요. 그 해에 제가 직장 생활을 아예 접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전기가 됐던 해였습니다. <고도>의 흥행 성공, 또 국립극장에서 오태석의 극작가 데뷔작 <환절기>도 연출했고…. 곳곳에서 저를 찾기 시작했어요.”
임영웅의 연출 데뷔작은 1955년 <사육신>이다. 하지만 이후 10년 넘게 직장(신문사와 방송국)과 연극판을 오가며 생계와 열정 사이에서 외줄을 탔다.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중생활”이다. <고도>는 그에게 연극판으로의 완전한 전향을 가능케 한 계기였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국내에 극단이 고작 10여개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창단에 대해 거창한 변(辯)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껄껄 웃으며 “공연을 계속하려면 문화부에서 극단 등록증을 받아야 했거든. 그게 없으면 공연을 못했으니까”라고 말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들이 누구였냐고 묻자, “김성옥, 김무생, 함현진, 아, 이 친구는 정말 좋은 배우였는데 일찍 저세상으로 갔어. 또 이성웅, 손숙, 최선자, 사미자…”라고 답했다.
-요즘엔 극단도 많고 극장도 참 많습니다. 요즘 연극계를 어떻게 보시나요?
“(좀 망설이다가) 기왕에 연극을 하려면 죽기 살기로 했으면 좋겠어요. 취미로, 폼으로 하면 연극이 되질 않아요. 목숨 걸고 해도 될까말까 하니까요. 연극하는 데 무슨 목숨까지 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마음가짐은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요즘 연극에서 영상을 많이 쓰던데, 그럴 거면 그냥 영화를 하지 왜 연극을 합니까. 음향을 과도하게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연극이 아니라고 봐요. 모름지기 연극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관객한테 육성으로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연극의 맛이지요.”
-예전에 리허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육두문자를 날리시더군요.
“(크게 웃으며) 옛날엔 좀 했지.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배우한테만 그럽니다. 욕해도 안되는 배우한테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그건 내가 캐스팅을 잘못 한 거니까, 전적으로 내 책임일 뿐이지요.”
-연습 과정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읽는 거죠. 대본을 오래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품과 인물에 대해 제대로 분석할 수 있고 좋은 연기호흡이 나올 수 있지요. 연출가와 배우가 작품에 대한 해석이 같아야 해요. 따로 놀면 안됩니다. 2~3일 대본 읽고 바로 동작에 들어가면 좋은 호흡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다른 연출가보다 대본 읽는 연습을 2~3배쯤 더 합니다.”
그에게 ‘후학들 중에 특별히 관심 갖고 지켜보는 연출가가 있는가’라고 묻자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칭찬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꽤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 “음…, (이)성렬이하고 (김)광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더군”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왜 <고도>를 평생의 작품으로 택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발표된 지 50년이 가까워도 여전히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죠. 저는 이보다 잘 쓴 희곡을 본 적이 없어요. 현대적 감각으로 쓴 최고의 희곡입니다. 그래서 제가 연출하는 <고도>의 특징은 원작을 절대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한 글자도 고치거나 빼지 않습니다.” 공연은 11월24일까지, 산울림소극장.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김영민 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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