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그를 한번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으나, 이래저래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그의 신작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에 관한 보도자료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어느 순간엔가 머리 속에 한 줄의 문장이 날아와 박혔다. "내 아버지는 일본군 헌병이었다." 나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전화를 걸어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는 다음날 오전 11시 정각에 경향신문 앞에 나타났다. 칼같이 시간을 지켰다.
심상치 않은 인상이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작다. 귀티나는 얼굴이 아니라 그 반대다. 이런저런 풍파를 꽤나 겪었을 법한 인상이다. 나는 몸으로 삶을 견뎌낸 일본의 몇몇 예술가들을 상당히 애호하는 편이다. 그중에는 소설가 아사다 지로 같은 이도 있다. 그는 분명 우파적 성향의 작가이긴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꿈틀거림'을 좋아한다. 책상물림들, 대학에서 문학을 배운 관념적 테크니션들은 그렇게 진한 '육수'를 우려내지 못한다.
재일교포 2세,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보다 네 살 위다. 하지만 겸손하고 부끄럼도 많다. 장난 섞어 "형님"이라고 불렀더니 부끄러워하면서도 아주 좋아한다. 외모는 어딘지 꺼벙해 보이지만, 속에는 뭔가 단단한 알맹이가, 그 알맹이에서 나오는 힘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한국어를 거의 못한다. 인터뷰 통역을 위해 극단 미추 박현숙 실장의 도움이 컸다.
신작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6월 12일부터
기사입력 2012-05-24 21:48
오전인데 햇살이 따갑다. 지난 22일, 서울 정동의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카페.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55·사진)은 의자를 자꾸 그늘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눈, “연극 연습이 있을 때면 점심식사도 거른다”는 그는 순박하면서도 독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알려져있다시피 자이니치(재일동포) 2세인 그는 2008년 서울에서 공연해 폭발적 호응을 이끌었던 <야키니쿠 드래곤> 이후 한·일 양국을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묘파하는 연극인으로서 독보적 자리에 올라 있다. 이 연극은 같은 해 한국에서 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와 월간 한국연극 선정 ‘올해의 우수공연 베스트 7’에 뽑힌 것을 비롯해 일본에서도 ‘아사히 무대예술상’ ‘요미우리 연극상’ ‘기노쿠니야 연극상’ ‘쓰루야난보쿠 희곡상’ 등을 휩쓸었다.
현재 연습 중인 신작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는 작품의 배경을 해방 직전인 1944년, 한반도 남쪽의 작은 섬으로 설정했다. 섬에 주둔한 일본군과 현지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정의신 특유의 ‘경계인적 관점’으로 풀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세에 일본으로 건너와 50년 넘도록 고향에 갈 수 없었던 내 아버지가 이 연극의 모티브”라면서 “아버지는 일본군 헌병이었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연극작가 정의신의 출생과 성장,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들어본다.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는 6월12일부터 7월1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다.
나는 1957년 효고현의 히메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가 재학 중에 일본군에 입대해 헌병으로 복무했다. 그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고 종전 후엔 쌀집을 하셨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나는 아버지가 일본군 헌병이었다는 사실을 스물다섯살이 될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 아버지가 한번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아버지는 쌀집을 하면서 돈을 좀 버셨던 모양인데, 그렇게 성공을 하니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한데 이삿짐을 먼저 실어보낸 배가 현해탄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집 팔고 땅 팔아 마련한 전 재산이 거의 날아가버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 고향에서 나한테 돌아오지 말라는 얘기구나’라며 매우 낙담하셨다고 한다. 아버지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전 재산이 그렇게 침몰한 다음부터 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친척들과의 왕래를 아예 끊었다.
그래도 먹고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낙심할 틈도 없이 다시 일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고물상을 차려 생계를 이었다. 그때 내가 태어났다. 난 고물상집 아들이었고 5형제 중 넷째였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하고 같이 살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동네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 조선인 부락에는 화장장이 있었다. 나는 매일 시신 태우는 연기가 뭉실뭉실 퍼져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컸다. 내 유년기의 가장 강력한 기억이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내가 얼른 죽어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아마 그런 기억 때문에 내가 작가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어린 나는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고 믿었으니까.
아버지는 전쟁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기 때문인지 자식들을 대학까지 마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특히 일본의 제도교육을 모두 받아야 일본 사회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셨고, 되도록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셨다. 재일교포 2세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도시샤(同志社)대학 문학부 미학과에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 돌이켜 보자면, 고등학교 때부터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생겼던 것 같다. 시인 김지하를 좋아했다. 일본어로 번역된 그의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그가 쓴 희곡도 다 읽었다. 대학에 가서도 혼란은 여전했다. 평범한 일본인으로 사는 길은 아예 봉쇄돼 있었고, ‘나는 대체 뭘 하며 사나?’라는 고민이 점점 깊어졌다.
대학을 중퇴했다. 막막한 룸펜 시절이었다. 영화만 봤던 것 같다. 1년 동안 300편 넘는 영화를 봤다. 그 시절 얘기를 다시 꺼내는 건 지금도 좀 힘들다. 구구절절 말하긴 어렵지만, 밑바닥까지 내려간 삶이었다고만 해두자. 그때 봤던 영화 중에 앨런 파커의 <페임>이 강렬했다. 흑인이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서 여러 인종의 부랑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이야긴데, 그 영화에 ‘연극의 기본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또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들,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나한테 영화는 인생의 교과서였다. 나는 ‘인생은 죽기 위해서 사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걸 영화를 통해 배웠다.
요코하마영화학교(지금의 일본영화대학)에 들어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송죽(松竹)이라는 영화사에서 무대미술 파트 조수로 일했다. 그 무렵에 같은 자이니치 선배가 일하는 ‘블랙 텐트’라는 극단에 놀러 갔다가, 배우 워크숍에 참가하게 됐다.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는 그 극단에서 배우를 했는데 주로 코믹한 역할을 맡았다. 2년쯤 지났을 때 <사랑스러운 메디아>라는 연극을 처음 써서 연출까지 해봤는데, 그게 ‘기시타 희곡상’에 후보작으로까지 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연극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후보작으로만 올라가다가 1987년에 <더 테라야마>라는 작품으로 결국 그 상을 받았다. 게다가 같은 해에 <달은 어느 쪽에 뜨는가>(감독 최양일)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도 각종 상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아, 나는 영화에 더 맞나?’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웃음) 하지만 연극이 더 좋다.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이기 때문이다.
아, 아버지? 내가 아버지의 칼을 발견한 건 스물다섯살 때였다. 일본 헌병의 칼이었는데,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다 얘기해줬다. 아버지는 그때도 일언반구도 없으셨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크게 놀라진 않았다. 다만,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가장 괴로웠던 사람은 고향 논산에서 생을 마치신 할아버지였다. 아들이 일본군 헌병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해방 이후에 모진 삶을 겪으셨다. 결국 묫자리도 제대로 못 썼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았다. 50년 만의 귀향이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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