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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연극인

변방연극제 임인자 감독...약자의 시선으로 던지는 물음표

한 여섯달쯤 전이었을까. <비정규식량배급자>라는 연극을 꽤 재미있게 봤다. 극단 '이안'의 창단작이었는데, 나는 젊은 신생 극단의 창단작들은 가능하면 챙겨보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거기에도 옥석을 가리는 선별은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맥주 한잔 마실 사람은 요 옆집으로~"라는 전언을 남겼더니, 그날 무대에 섰던 대부분의 배우들이 다시 모였다. 

그중에 배우가 아닌 사람이 둘 있었다. 한 명은 극단 이안의 대표인 연출가 오경택이었고, 또 한 명은 이날 공연의 기획과 홍보 등을 맡고 있던 임인자였다. 그는 변방연극제 사무국장으로 오래 일하다가 올해 드디어 "업계 최연소 예술감독"이라는 직함을 갖게 된 연극 프로듀서다. 내 기억으로는 사석에서 임군(나는 그를 임군 혹은 인자군이라고 부른다. 물론, 공식적으로 부를 때는 임감독이라고 호칭한다)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눠본 건 그날이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작금의 대학로에서 이렇게 때묻지 않은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임군은 부끄러움이 많으면서도 열정적이고, 세상에 대한 시각이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데가 있다. 물론 그에게서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혼돈'을 볼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그 선머슴애 같은 덤벙거림이야말로 내가 '최연소 예술감독'인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였던 것 같다. 

[문화 프런티어] 변방연극제 임인자 예술감독

기사입력 2010-10-05 21:48 | 최종수정 2010-10-06 10:34


ㆍ약자들 시선으로 세상에 던진 뼈있는 의문부호

‘변방’이란 무엇일까? 올해 변방연극제의 예술감독에 취임하면서 ‘업계 최연소 예술감독’이라는 “원치 않는 타이틀”을 갖게 된 임인자 예술감독(34)은 “흔히들 ‘변방’을 비주류, 언더그라운드로 해석하지만 나는 ‘최전방’의 개념으로 이해한다”고 했다. “제도권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거점”이라는 것이 그의 의지다.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연극적 감동이라는 게 한 편의 연극을 보면서 울고 웃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어떻게든 동시대인의 의식과 감성을 건드려야 하죠. 하지만 감정을 해소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봐요. 겉으론 아무 문제 없이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와 균열 투성이인 세상에서, 그 균열된 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변방의 눈(目)이어야 하겠죠.”

올 가을에 국내에서 열리는 공연예술 축제가 거의 20개에 달한다. 주로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특징도 주제도 뚜렷하지 않은 채, 그게 그것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12회째 축제의 막을 내린 변방연극제는 뚜렷한 변별점을 갖는다. 대개의 공연예술 축제들이 ‘형식적 새로움과 완성도’ 혹은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변방연극제는 일종의 정치적 지향성을 갖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억압된 자, 혹은 빼앗긴 자의 시선”이다. 임 예술감독은 “극장이란 애초에 중요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했다. “그 정치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눈물, 콧물 흘리는 감정의 공간이 아니라 정치적·미학적 각성을 이뤄내는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해마다 발목을 잡는 건 제작비의 열악함이다. 올해에도 고작 4000만원의 제작비로 13작품을 공연했다. 여타 축제들이 적게는 수억원씩, 많게는 20억~30억원씩 제작비를 들이는 것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껌값’이다. 임 예술감독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제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다”며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조의 변’을 털어놓으면서도 하하 웃었다.

“인천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자랐어요. 광주는 저한테 예술적 감성을 키워주고 관점을 갖게 해준 도시죠.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지만, 중학교 정문 옆에 붙어있던 포스터는 어린 저에게도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죠. 저수지에서 떠오른 부패한 사람의 얼굴이었거든요. 두 눈이 툭 튀어나온 보라색 얼굴이요. 아, 정말 쇼크였죠. 어린 마음에도 ‘그는 왜 저렇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오래도록 남았어요. 두번째로 기억나는 풍경은 해마다 오월이면 도청 앞에서 열리던 문화제인데, 그때 모여든 군중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어요. 광장뿐 아니라 공중전화 부스 위까지 사람들이 올라가고, 호텔과 빌딩 창문에도 까맣게 얼굴을 내밀고 있던 모습. 그 와글와글하면서도 역동적이었던 분위기가 제 감각 속의 어딘가에 지금도 남아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그는 고교 시절만 해도 “무용부를 지독하게 싫어하던 학생”이었다. “무용부 아이들이 워낙 부르주아적인 데다 만날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율학습비가 비싸다고 항의하다 교사에게 심하게 야단을 맞은 ‘이유있는 반항아’였던 임 예술감독은 “학교가 무용부 아이들에게 특혜를 준다고 여겼다”고 했다.

“그런데 남도예술회관에서 열린 문화제에 갔다가 그토록 미워했던 무용부 아이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 말았어요. 그 친구들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춤추는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거든요. 아, 저 친구들은 나보다 더 힘든 일을 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좋은 대학 가겠다고 교과서와 참고서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말이죠. 제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그때 막연하게나마, 나도 예술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됐죠.”

처음에는 배우로 출발했다. 교육대학에 입학해 ‘교육 기술자가 돼가고 있구나’라는 회의에 빠졌을 때 “유일한 출구가 돼준 건 연극반”이었다. 김지하 원작의 <금관의 예수>에 창녀로 출연했던 게 연극과의 첫 대면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교육대학을 그만두고 중앙대 연극학과로 진학해 연출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때부터 그는 정극보다 현실을 반영하는 연극 쪽으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중대 연극학과의 학풍은 형식적 미학을 중시하는 쪽이어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학과 재학 시절은 “가난 때문에 실어증을 앓을 만큼 힘든 시절”이었다. 그것을 치유했던 계기는 7개월간의 인도여행이었고, 람나가르에서 열리는 람릴라 연극제에서 “온 마을이 이야기 속의 공간으로 전이되면서, 일상공간이 신화로 이어지는 장면을 목격하는 또 하나의 소득”을 얻기도 했다.

어느덧 인터뷰의 말미. 2004년부터 변방연극제에 참여해 사무국장으로 일하다 마침내 예술감독의 자리에 앉은 그는 “물론 어깨가 무겁지만, 그 무게에 짓눌리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극제를 꾸려간다는 건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술감독이 할 일은 축제의 예술적 비전을 만들고 세상에 대해 질문과 화두를 던지는 것이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모든 걸 주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게 제 역할이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할 겁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작품으로 보여줄 겁니다.”

<글 문학수·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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