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쯤 전 명동예술극장 커피숍에서 손숙 선생과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공연이 막 끝난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불빛에 비친 손선생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면서, '손선생도 이제 많이 늙으셨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왠지 애잔한 심정이 되었던 것 같다. 6년 전 연극 담당을 처음 맡았을 때 첫번째 인터뷰이가 아마도 손선생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손선생은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속을 다 보여줬었다. 나는 그렇게 투명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마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모양이다.
두번째 인터뷰는 4년이 흘러서 이뤄졌다. 이번에는 배우 추상미와 함께였다. 지금은 추상미의 신랑이 된 이석준과 몇해 전 독일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당시 둘은 연애중) , 그때 나는 뒤셀도르프의 한 고서점에서 LP를 100장쯤 샀었다. 일행이 아마 10여명쯤 됐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죄다 시인 하이네의 생가를 구경하러 갔었고, 나는 고서점 좌판대에 진열된 LP 앞에서 거의 눈이 뒤집혔었던 것 같다. 한데 그 무거운 LP보따리를 선뜻 나눠 들었던 '착한 인간'이 바로 뮤지컬과 연극을 번갈아 드나드는 배우 이석준이었다. 아마 엄청 무거웠을 게다. 하지만 눈이 커다란 배우 이석준은 "안 무거워요, 괜찮아요"를 연발하면서 내가 미안해 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 자리에 마주앉은 추상미에게 신랑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던 것 같다.
기사입력 2004-12-09 16:18 최종수정 2004-12-09 16:18
배우 손숙 “내가 연기한 ‘그녀들’. 그게 바로 나였을까?”
상처 입은 여자의 신산한 삶. 배우 손숙은 자신이 무대에서 보여줬던 숱한 ‘그녀들’의 모습을 그렇게 요약했다. 1968년의 데뷔작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부터 최근의 ‘어머니’까지, 손숙은 그동안 연기했던 ‘그녀들’에 대해 “운명에 휘둘리며 고통받는 여자, 혹은 세상의 완강함에 날개 부러진 영혼들”이라며 “어쩌면 그렇게 나 자신과 쏙 빼닮은 역할만 해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유학생활에 적응 못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거나(그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 하나뿐인 여동생과 애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담배 피우는 여자), 어느날 불현듯 “이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출구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셜리 발렌타인). ‘신의 아그네스’ ‘위기의 여자’ ‘굿나잇 마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숙은 그 많은 ‘그녀들’의 순탄치 못한 인생을 언급하면서 “신산하다”는 단어를 여러번 반복했다.
배우 손숙의 삶도 ‘그녀들’처럼 팍팍했다. 경남 밀양의 다죽리(多竹里). 그녀는 대나무가 유난히 많은 안동 손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 자식 셋을 낳았고,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은 채 거의 평생을 일본에서 지냈다. 어린 손숙은 밀양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왔다. 사춘기 무렵의 그녀에게 “아버지는 미칠 것 같은 증오의 대상”이었고, 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너희들 땜에 내가 이 고생’이라는 푸념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다.
“아버지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기생이 되려는 상상까지 했으니까. 가문에 먹칠을 해서라도 아버지를 괴롭히고 싶었어. 우리 엄마는 왜 아버지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않을까….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났어요. 마흔살이 훨씬 넘어서야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죠. 엄마의 희생에도 감사하게 되었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 비틀린 감정은 결국 "부성애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녀는 고려대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어린’ 나이에 같은 학교 연극반 선배였던 아홉 살 연상의 배우 김성옥과 결혼했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 생활도 포기했고, 연극에 대한 열망마저 고민없이 접었다. “그저 좋은 남자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게 여자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극의 ‘마력’을 완전히 떨쳐버리긴 힘들었어요. 결혼하고 2년 후 남편한테 겨우 허락을 받고 다시 무대에 섰어요. 그 작품이 바로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였어요. 대학 연극이 아닌 프로무대 첫 작품이었죠. 그때만 해도 주부가 본업이었고, 연극은 그저 취미 정도였는데….”
‘알콩달콩 살고 싶다’는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했던 결혼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와 빚더미. 복병처럼 몰려온 가난이 그녀를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서게 했다. 손숙은 "그때부터 나의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연극에 몰입하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닮은 숱한 ‘그녀들’을 열연하면서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달콤한 가정을 잃은 대신 배우로서의 삶을 되찾았다"고 했다.
14일부터 31일까지 코엑스 아트홀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는 ‘어머니’는 이제 배우 손숙의 대표작이다. 일제의 징용과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하면서 남편의 바람기, 혹독한 시집살이, 게다가 자식의 죽음까지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 작가이자 연출자인 이윤택(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신산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니의 삶을 특유의 웃음과 눈물로 버무려낸 연극이다. 손숙은 “나는 어머니 가슴에 평생동안 못을 박은 불효자식”이라며 “이 작품은 나와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獻辭)”라고 말했다. (02)6000-6790~1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배우 손숙 “내가 연기한 ‘그녀들’. 그게 바로 나였을까?”
상처 입은 여자의 신산한 삶. 배우 손숙은 자신이 무대에서 보여줬던 숱한 ‘그녀들’의 모습을 그렇게 요약했다. 1968년의 데뷔작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부터 최근의 ‘어머니’까지, 손숙은 그동안 연기했던 ‘그녀들’에 대해 “운명에 휘둘리며 고통받는 여자, 혹은 세상의 완강함에 날개 부러진 영혼들”이라며 “어쩌면 그렇게 나 자신과 쏙 빼닮은 역할만 해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유학생활에 적응 못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거나(그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 하나뿐인 여동생과 애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담배 피우는 여자), 어느날 불현듯 “이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출구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셜리 발렌타인). ‘신의 아그네스’ ‘위기의 여자’ ‘굿나잇 마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숙은 그 많은 ‘그녀들’의 순탄치 못한 인생을 언급하면서 “신산하다”는 단어를 여러번 반복했다.
배우 손숙의 삶도 ‘그녀들’처럼 팍팍했다. 경남 밀양의 다죽리(多竹里). 그녀는 대나무가 유난히 많은 안동 손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 자식 셋을 낳았고,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은 채 거의 평생을 일본에서 지냈다. 어린 손숙은 밀양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왔다. 사춘기 무렵의 그녀에게 “아버지는 미칠 것 같은 증오의 대상”이었고, 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너희들 땜에 내가 이 고생’이라는 푸념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 비틀린 감정은 결국 "부성애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녀는 고려대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어린’ 나이에 같은 학교 연극반 선배였던 아홉 살 연상의 배우 김성옥과 결혼했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 생활도 포기했고, 연극에 대한 열망마저 고민없이 접었다. “그저 좋은 남자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게 여자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극의 ‘마력’을 완전히 떨쳐버리긴 힘들었어요. 결혼하고 2년 후 남편한테 겨우 허락을 받고 다시 무대에 섰어요. 그 작품이 바로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였어요. 대학 연극이 아닌 프로무대 첫 작품이었죠. 그때만 해도 주부가 본업이었고, 연극은 그저 취미 정도였는데….”
‘알콩달콩 살고 싶다’는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했던 결혼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와 빚더미. 복병처럼 몰려온 가난이 그녀를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서게 했다. 손숙은 "그때부터 나의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연극에 몰입하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닮은 숱한 ‘그녀들’을 열연하면서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달콤한 가정을 잃은 대신 배우로서의 삶을 되찾았다"고 했다.
14일부터 31일까지 코엑스 아트홀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는 ‘어머니’는 이제 배우 손숙의 대표작이다. 일제의 징용과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하면서 남편의 바람기, 혹독한 시집살이, 게다가 자식의 죽음까지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 작가이자 연출자인 이윤택(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신산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니의 삶을 특유의 웃음과 눈물로 버무려낸 연극이다. 손숙은 “나는 어머니 가슴에 평생동안 못을 박은 불효자식”이라며 “이 작품은 나와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獻辭)”라고 말했다. (02)6000-6790~1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두번째 인터뷰는 4년이 흘러서 이뤄졌다. 이번에는 배우 추상미와 함께였다. 지금은 추상미의 신랑이 된 이석준과 몇해 전 독일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당시 둘은 연애중) , 그때 나는 뒤셀도르프의 한 고서점에서 LP를 100장쯤 샀었다. 일행이 아마 10여명쯤 됐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죄다 시인 하이네의 생가를 구경하러 갔었고, 나는 고서점 좌판대에 진열된 LP 앞에서 거의 눈이 뒤집혔었던 것 같다. 한데 그 무거운 LP보따리를 선뜻 나눠 들었던 '착한 인간'이 바로 뮤지컬과 연극을 번갈아 드나드는 배우 이석준이었다. 아마 엄청 무거웠을 게다. 하지만 눈이 커다란 배우 이석준은 "안 무거워요, 괜찮아요"를 연발하면서 내가 미안해 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 자리에 마주앉은 추상미에게 신랑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던 것 같다.
연극 ‘가을 소나타’의 손숙&추상미
기사입력 2009-11-22 17:33
ㆍ엄마와 딸의 애증 변주곡… 원작은 베르히만의 동명 영화
술 취한 딸이 엄마에게 쏘아붙인다. “엄마는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줬어. 내게 있는 예민하고 섬세한 것들을 멍들게 하고, 살아 있는 것들의 숨통을 틀어막았어.” 얼굴이 달아오른 엄마가 항변한다. “난 엄마라는 내 모습이 불안하고 어색했어. 난 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너보다 더 불안하고 두려워한다는 걸 네가 알아주길 바랐어.” 중년이 된 딸과 노년에 접어든 엄마의 대화. 피할 수 없는 통과제의다. 모녀가 할퀴고 물어뜯는 이 전쟁은, 그들이 정작 엄마와 딸로 다시 만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다.
스웨덴 출신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1918~2007)의 영화 '가을 소나타'는 엄마와 딸의 애증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중심적인 피아니스트 엄마와 예민한 심성의 딸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의 상처’가 폐부를 찌를 듯이 날카로운 대사로 드러낸다. 특히 엄마와 딸로 만난 잉그리드 버그만과 리브 울만의 명연(名演)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 당시 버그만은 암투병 중이었다.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일부 애호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영화 '가을 소나타'가 연극 무대에서 펼쳐진다. 엄마와 딸로 만나는 배우는 손숙과 추상미. 지난 18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배우의 손에는 막대한 분량의 대사가 빼곡히 담긴 대본이 어김없이 들려 있었다. 손숙이 말했다 “무서워요. 대사가 엄청나게 많아서. 이제 공연 3주 전인데, 지금이 가장 힘들 때죠. 대본을 늘 갖고 다녀요. 화장실 갈 때도 가져 가고,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들어요.”
그래도 배우 손숙은 30년 전부터 꿈꿔왔던 작품을 더 늦기 전에 공연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가을만 되면 “몸살처럼 욕망이 생기던 작품”이라면서 “이건 바로 내 얘기”라고 말했다.
“이해랑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부터 이 작품을 꼭 연극으로 해보고 싶어서 여러 번 졸랐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이뤄지지 못했어요. 그동안 영화도 몇차례 보고 딸 역으로 나온 울만의 자서전까지 읽으면서, 언젠가 꼭 해보겠다고 벼르던 작품이죠. 극중의 피아니스트 엄마와 제 삶이 무척 닮았어요. 제가 딸이 셋인데, 우리 아이들도 내 보살핌 없이 자기들끼리 컸거든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죠. 지금도 대사를 외우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자녀들에게 소홀했던 예술가 엄마의 자책. 추상미는 그 반대편의 기억을 털어놨다. 유년 시절에 아버지(고 추송웅)를 유난히 따랐다는 그는 “대학 때 영화를 처음 보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가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했다.
“처음부터 묘하게 이 영화에 매료됐고, 지금까지 3번이나 봤어요. 아버지는 지방 공연이 아주 많았던 분이거든요. 지금도 기억나요. 아빠가 공연 떠나면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울던 거. 아주 꼬마 때 기억인데도 희한하게 잊혀지지 않아요. 1979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떴을 때도 엄청 울었어요. 아빠가 대통령이 될까봐 겁이 났거든요. 저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대통령은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난 거죠.”
‘빨간 피터’로 한 시대를 살았던 배우 추송웅은 그때 딸에게 “아빠는 꼭 대통령 할 거다. 내년에 출마한다”고 짐짓 으름장을 놓았던 모양. 그렇게 따랐던 아버지는 85년 별세했다. 딸의 몸에 ‘배우’라는 유전자를 남긴 채. 그 딸이 겨우 12살 때였다. 이제 어른이 된 딸은 이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사람은 어른이 돼서도 ‘상처받은 아이’를 자기 내면에 그대로 갖고 있대요. 이 연극은 결국 그 상처를 터트려서 치유해가는 이야기인 셈이죠.”
영화에서 그랬듯이 연극 '가을 소나타'에도 엄마 샬롯과 큰딸 에바 외에 두 명의 배우가 더 등장한다. 발달 장애를 앓는 둘째딸 헬레나와 에바의 남편 빅토르.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샬롯이나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가는 에바와 달리, 이타심으로 충만한 두 사람은 이 연극을 감정의 파도에서 건져내는 관찰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헬레나 역에 이태린, 빅토르 역에 박경근. 연출가 박혜선은 “소통하지 못하고 살아온 엄마와 딸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심리적 고립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하지만 이해와 화해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그려내겠다”고 했다. 다음달 10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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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1-22 17:33
ㆍ엄마와 딸의 애증 변주곡… 원작은 베르히만의 동명 영화
술 취한 딸이 엄마에게 쏘아붙인다. “엄마는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줬어. 내게 있는 예민하고 섬세한 것들을 멍들게 하고, 살아 있는 것들의 숨통을 틀어막았어.” 얼굴이 달아오른 엄마가 항변한다. “난 엄마라는 내 모습이 불안하고 어색했어. 난 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너보다 더 불안하고 두려워한다는 걸 네가 알아주길 바랐어.” 중년이 된 딸과 노년에 접어든 엄마의 대화. 피할 수 없는 통과제의다. 모녀가 할퀴고 물어뜯는 이 전쟁은, 그들이 정작 엄마와 딸로 다시 만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다.
스웨덴 출신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1918~2007)의 영화 '가을 소나타'는 엄마와 딸의 애증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중심적인 피아니스트 엄마와 예민한 심성의 딸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의 상처’가 폐부를 찌를 듯이 날카로운 대사로 드러낸다. 특히 엄마와 딸로 만난 잉그리드 버그만과 리브 울만의 명연(名演)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 당시 버그만은 암투병 중이었다.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일부 애호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영화 '가을 소나타'가 연극 무대에서 펼쳐진다. 엄마와 딸로 만나는 배우는 손숙과 추상미. 지난 18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배우의 손에는 막대한 분량의 대사가 빼곡히 담긴 대본이 어김없이 들려 있었다. 손숙이 말했다 “무서워요. 대사가 엄청나게 많아서. 이제 공연 3주 전인데, 지금이 가장 힘들 때죠. 대본을 늘 갖고 다녀요. 화장실 갈 때도 가져 가고,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들어요.”
그래도 배우 손숙은 30년 전부터 꿈꿔왔던 작품을 더 늦기 전에 공연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가을만 되면 “몸살처럼 욕망이 생기던 작품”이라면서 “이건 바로 내 얘기”라고 말했다.
“이해랑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부터 이 작품을 꼭 연극으로 해보고 싶어서 여러 번 졸랐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이뤄지지 못했어요. 그동안 영화도 몇차례 보고 딸 역으로 나온 울만의 자서전까지 읽으면서, 언젠가 꼭 해보겠다고 벼르던 작품이죠. 극중의 피아니스트 엄마와 제 삶이 무척 닮았어요. 제가 딸이 셋인데, 우리 아이들도 내 보살핌 없이 자기들끼리 컸거든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죠. 지금도 대사를 외우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자녀들에게 소홀했던 예술가 엄마의 자책. 추상미는 그 반대편의 기억을 털어놨다. 유년 시절에 아버지(고 추송웅)를 유난히 따랐다는 그는 “대학 때 영화를 처음 보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가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했다.
“처음부터 묘하게 이 영화에 매료됐고, 지금까지 3번이나 봤어요. 아버지는 지방 공연이 아주 많았던 분이거든요. 지금도 기억나요. 아빠가 공연 떠나면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울던 거. 아주 꼬마 때 기억인데도 희한하게 잊혀지지 않아요. 1979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떴을 때도 엄청 울었어요. 아빠가 대통령이 될까봐 겁이 났거든요. 저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대통령은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난 거죠.”
‘빨간 피터’로 한 시대를 살았던 배우 추송웅은 그때 딸에게 “아빠는 꼭 대통령 할 거다. 내년에 출마한다”고 짐짓 으름장을 놓았던 모양. 그렇게 따랐던 아버지는 85년 별세했다. 딸의 몸에 ‘배우’라는 유전자를 남긴 채. 그 딸이 겨우 12살 때였다. 이제 어른이 된 딸은 이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사람은 어른이 돼서도 ‘상처받은 아이’를 자기 내면에 그대로 갖고 있대요. 이 연극은 결국 그 상처를 터트려서 치유해가는 이야기인 셈이죠.”
영화에서 그랬듯이 연극 '가을 소나타'에도 엄마 샬롯과 큰딸 에바 외에 두 명의 배우가 더 등장한다. 발달 장애를 앓는 둘째딸 헬레나와 에바의 남편 빅토르.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샬롯이나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가는 에바와 달리, 이타심으로 충만한 두 사람은 이 연극을 감정의 파도에서 건져내는 관찰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헬레나 역에 이태린, 빅토르 역에 박경근. 연출가 박혜선은 “소통하지 못하고 살아온 엄마와 딸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심리적 고립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하지만 이해와 화해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그려내겠다”고 했다. 다음달 10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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