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고 아! 감탄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야지”
ㆍ연극 ‘광부화가들’ 3년 만에 재연출… ‘풍자의 달인’ 이상우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절룩절룩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무릎에 마침내 탈이 나고 말았다. 주말마다 기를 쓰고 감행했던 북한산 등반 탓일까. 여섯달째 지팡이 신세를 지고 있는 연출가 이상우(62)는 “연골이 닳은데다 찢어지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껄껄 웃으며 농을 던졌다. “다리만 이렇지 상체는 멀쩡해요. 내 친구 황지우보다 내가 훨씬 건강하다니까.”
영국의 극작가 리 홀의 연극 <광부화가들>을 준비 중인 연출가 이상우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극장 옆 골목의 작고 저렴한 일식집에서다. 지난 27일 점심 무렵, 7000원짜리 ‘냉모밀’을 주문한 그는 ‘젊은 시절’ 얘기부터 꺼내놨다. 왜, 어쩌다가 연극쟁이가 됐나?
“원래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만화 그리기에 심취했으니까. 하지만 만화가가 되겠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어요. 그랬다간 어머니가 자살하시겠다고 난리 피우실 거 같아서. 그땐 다들 그랬지만 우리집도 정말 가난했거든요. 대학에 가서도 호시탐탐 만화 그릴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학보사 만평 담당으로 합격했어요. 선배들이 내 그림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거든.(웃음) 그런데 결국 못 그리게 됐죠. 원래 만평을 담당하던 선배가 군대 훈련소 신체검사에서 퇴짜를 맞고 학교로 되돌아왔어요. 어떻게 보면 그래서 연극을 하게 된 거죠.”
서울대 미학과 1학년이던 그는 문리대 연극반에 들어가 포스터를 그렸다. 꿩 대신 닭이었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재미”에 들락거렸던 연극반에서 <나폴레옹 꼬냑>을 연출하러 온 시인 김지하를 만났고, “친구 (김)민기와 어울려 다니다가” 소설가 황석영도 만났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같았던 대학시절”이었다. 교련 반대 시위를 하다가 훈련소행 기차를 타야 했고, 군 복무 뒤 복귀한 연극반에는 “연출을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탓”에 마침내 연출을 하게 됐다. 거기까지가 연출가 이상우의 ‘출생신고서’에 적힌 이력이다.
-시사만평가를 꿈꿨던 청년이 결국 ‘풍자로서의 연극’으로 나아갔군요? 1977년 연우무대를 창단한 이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연출가 이상우가 보여준 경향을 ‘풍자’라는 단어로 요약해도 크게 무리는 없겠죠? 기존의 시각에서 보자면 기승전결을 무시한 듯한, 어찌 보면 산만하게까지 보이는 극적 구성도 역시 ‘이상우 스타일’일 테고.
“네, 그런 연극을 주로 했죠. 그런데 좀 차가웠나봐요. 평론가 구히서 선생이 ‘냉소적 풍자’라고 했죠. 쉰살 무렵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어요. 혹시 내가 사람을 도구적 관점에서 봤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고. 요즘에는 제가 많이 따뜻해졌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래요. (웃음) 그리고 연극은 어차피 스토리잖아요. 멋진 비주얼에 집착하는 연극은 정직한 연극이 아니죠. 그런데 스토리에 기승전결이 있나요? 그런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을 뿐이죠. 그 과정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곁가지를 치면서 뻗어나가는 거죠. 그게 제가 생각하는 스토리입니다.”
그는 주문한 ‘냉모밀’ 그릇을 후딱 비웠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열심히 ‘흡입’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천천히 먹으라는 눈짓을 보내며 또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내 연극이 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어요. 그런데 이건 생각하죠. 무대에 오른 배우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연극을 하고 싶다고. 연극이야말로 사람을 보는 예술이니까요. 젊을 때는 연출 중심의 연극을 했다면 이젠 배우 중심의 연극을 하려는 거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서야 이번 연극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2010년 초연 당시 <광부화가들>에 쏟아진 언론과 평단의 호평은 뜨거웠다. 같은 해에 연극평론가협회가 ‘올해의 베스트 연극 3’로 선정했고,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도 거머쥐었다. 3년 만의 재공연이다. 원작자 리 홀은 사회주의적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는 영국 연극계에서도 입장이 선명한 축에 속한다. 실제로 그는 영국 뉴캐슬의 탄광촌에서 나고 자랐으며, 연극 <광부화가들>의 세부에는 그의 실제적 체험들이 적잖이 녹아 있다. <광부화가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평범한 광부들이 화가로 변신하는 과정, 이어서 빚어지는 예술과 자본의 갈등이다. 아울러 예술은 ‘노동하는 공동체’의 것이라는 메시지까지 담아내고 있는 연극이다.
-이 연극은 색깔이 매우 분명하죠. 한국에서 이런 연극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두번째 공연을 하시면서 어떤 점에 특히 유의하고 계시는지.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저를 완전히 매료시켰던 희곡이죠. 나는 왜 이런 작품을 쓰지 못했을까, 그런 질투심마저 느낄 정도였어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연극인데, 초연 때는 제대로 올리는 것 자체에 급급했어요. 이번엔 더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죠. 그리고 음악처럼, 어느 한 부분도 불필요하지 않은 연극. 유기적 완성도가 높은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 예컨대 이번 공연에서 배우 8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장면이 있어요. 얼핏 혼란스러워 보이죠. 하지만 거기에는 질적인 통일성이 있어야 하죠. 한 치의 틈도 없는. 그걸 만들어내는 게 참 어려워요.”
-연극에서 재미란 무엇일까요?
“그 재미란 게, 단지 낄낄거리며 웃는 건 아니죠. 음…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연출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관객의 관심의 끈을 바짝 조여 당기는 것.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 끈을 절대 놓치지 않는 것. 사실 감동이라는 게 별 거 아닙니다. 관객의 반응이 나오면 그게 감동이라고요. 웃든지, 울든지, 아니면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리든지. 2시간짜리 연극에서 그게 계속돼야 하는 거죠. 말하자면 관객이 2시간 동안 시간을 잊어야 하는 겁니다. 제가 공연이 끝난 후 관객에게 가장 듣고 싶은 얘기가 뭔 줄 아세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라는 말입니다.”
공연은 9월13일부터 10월1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펼쳐진다. 강신일, 김승욱, 민복기, 김중기, 채국희, 송재룡, 이원호, 권진란, 김용현 등이 출연한다. 이른바 ‘이상우 사단’의 배우들이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다시 지팡이를 들고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연출가가 좋은 연출가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한데 나쁜 연출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요.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다시는 저 연출가하고 같이 공연하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을 갖게 만들면 나쁜 연출가예요. 자기 만족에만 빠진 연출가는 결코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없어요.”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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