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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연극인

영원한 배우 백성희 선생, 천상의 무대로

  백성희 선생의 영결식에 다녀왔다. 2016년 1월 12일 오전,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몇몇 장면들이 있다. 손숙 선생은 울음을 참아가며 이날 영결식 사회를 봤다. 그 모습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또 손진책 선생은 조사를 읽다가 몇번이나 멈췄다.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는 다시 읽어내려갔다. 그만큼 그에게, 백성희 선생은 특별한 존재였다. 특히 그는 말년의 백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사람이다. 노선과 진영에 상관없이 '의리'를 지키는 그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일흔을 훌쩍 넘긴 그분들이 그렇게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오십대 중반의 나는 그들이 함께 보냈던 시절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르는 장사익 선생이 고인의 애창곡이었던 '봄날은 간다'를 애절하게 노래하자,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소리가 들리다가, 내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꼭 일흔살이 된 배우 김재건씨가 마침내 으흐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왼쪽 옆자리에 앉은 전무송 선생은 자꾸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면서 "내가 선생님, 이라고 부르던 분들은 다들 떠나셨네. 이제 배우로는 오현경 형님이 제일 맏이시네"라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성희 선생은 그렇게 떠나셨다.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사셨다. 수많은 후배들과 후학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서 떠나셨다. 1925년생이니 향년으로 91세. 생전에 만났던 고인의 모습과 목소리를 떠올리니, 주로 '스킨십'이 기억난다. 내 뺨을 어루만지며 농담을 던지곤 하셨다. "참 잘났다. 배우 최** 닮았다." 뽀뽀도 하셨다. 양쪽 볼에서 쪽쪽 소리가 났다. 그리고 생전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였던 2013년 2월의 인터뷰,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장민호'를 떠올리며 엉엉 울던 노구의 여배우, 나는 그 모습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민호야, 민호야” 떠난 장민호 부르며 평생 연극친구 회상

경향신문 | 입력 2013.02.27 21:46최종수정 2013.02.27 23:25
90세 바라보는 현역 배우 백성희씨
 “민호야, 민호야!” 노구의 배우 백성희가 먼저 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2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아흔이 되는 원로배우 백성희는 인터뷰 내내 “장민호씨”라든가 “그 사람”이라고 고인을 호칭했지만, 마지막에 이르자 마침내 설움이 복받친 듯했다. 

 

 “대추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연이 바람에 휘익 날아갔어. 이젠 자취도 보이질 않아. 민호도 그렇게 갔어. 처음엔 그저 멍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리워.” 

 

 눈물이 터진 것은 아주 순간적이었다. 1925년 9월2일 서울 중구 영락동에서 태어난 배우 백성희. 그는 인터뷰 내내 카랑하면서도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고, “이젠 사람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본인의 말과 달리 기억력도 여전했다. 그의 입을 빌려 밝혀둘 사실 하나. 백성희의 데뷔작은 1943년 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함세덕 연출)라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보다 한해 전에 출연했던 가극 <심청>(서항석 연출)을 데뷔작으로 기록하는 경우들도 왕왕 있지만, “멋도 모르던 고등학교(동덕고녀) 시절에 출연한 것이어서 공식 데뷔작으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본인이 인증한 1943년을 공식 출발점으로 친다면, 올해는 이 노구의 히로인이 ‘배우인생 70년’을 맞는 해다. 식민지 말기와 해방공간을 거쳐 오늘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유일무이한 배우 백성희. 3월 3일부터 23일까지 국립극단이 재공연하는 <3월의 눈>(손진책 연출)은 고 장민호의 유작인데다 두 사람이 함께 섰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무대에서는 지난해 11월 세상을 떠난 장민호를 대신해 변희봉이 무대에 오른다. 

원로배우 백성희가 지난 26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장에서 연극인생 70년을 회고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 관객의 요정으로 지내니 나이 든지 모르고 살아
60년 함께 무대에 섰던 고집불통 고 장민호씨, 시간이 갈수록 그리워
 

▲ 그와 함께했던 ‘3월의 눈’ 내달 3일부터 재공연 

 

-지난 70년간 약 400편의 연극을 하셨어요 ‘현실의 백성희’와 ‘작품 속의 백성희’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았겠습니다. 

“배우는 말이오, 관객의 정령(요정)이라우. 난 현실을 완전히 떠나서 살았어요. 1년에 네 작품을 하면 한 해가 다 갔어. 극중 현실이 곧 나의 현실이었지. 시대극을 하면 그 시대에 빠져 살았고, 로맨틱한 작품에서는 사랑을 하며 살았어요. 현실 속의 나는 없었어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우리나라에서 1955년 초연했는데 내가 여주인공 블랑쉬를 맡았지. 한국 최초의 블랑쉬였어요. 서른살 때였지. 그런데 그 작품을 26년 후에 또 했어요. 이번에도 블랑쉬였거든. 하지만 나는 나이 들지 않았다우. 여전히 블랑쉬였지. 나는 내 얼굴 변한 것도 잘 모르겠어. 배역과 분장한 모습만 떠올라. 그렇게 현실의 나를 잊어버리고 배역으로 살았어요.” 

 

-어떤 작품이 가장 기억나십니까? 

“참 많이도 했어요. 기억이 아예 안 나는 작품들도 많아요. 하지만 다 사랑스럽지. 악역도 사랑스러워요. 모두 내 피땀이 서린 거니까.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샤,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전쟁과 평화> 같은 연극들이 기억나죠. 국내 창작극으로는 김동리의 <무녀도>와 노경식의 <달집>이 있구요, 차범석의 <산불>에서 맡았던 극성맞은 역할도 기억에 남아요. 또 뭐가 있나? 더 있는 거 같은데, 잘 생각이 안나.” 

 

-장민호 선생과 처음 만나신 건 언제였나요? 

“국립극단이 창단된 게 1950년이잖아요. 1·4 후퇴 때 국립극단도 대구로 피란을 갔거든. 그때 장민호씨가 입단했어요. 어땠냐구? 에이, 나서기 좋아하고, 건방지고 고집 센 사람이었지. 실제 나이로 내가 누나가 분명한데도, 평생 한번도 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어. 최무룡씨도 나한테 누나라고 했는데 말이야. 장민호씨하고 그이하고 친구였거든. 그런데도 나를 부를 때마다 ‘어이, 백성희씨!’ 했다구. 아휴, 젊었을 때는 다투기도 참 많이 했어. 그이가 우기기는 또 얼마나 우긴다구. 그래도 우린 친구였어. 평생 동안 연극동지였지. 그런데 장민호씨는 혈혈단신 월남했잖아요? 그런 기질이 그 사람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구.” 

 

-처음으로 같이 섰던 무대는요? 

“피란 가서 했던 <원술랑>이 첫 무대였지요. 작년에 그이가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가 무대에서 함께 살았던 세월이 어언 60년이지요. 솔직히 말해 옛날에 내 상대역을 맡았던 멋진 남자 배우들이 어디 한둘이었수?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김동원 선생이 주로 내 파트너였어. 그때만 해도 민호는 그저 애송이였지.” 

마지막 말에서 그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역시 ‘여배우’다. “왕년의 나는 연극계의 여왕이었다”며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모습이 여전히 정정하다. 그의 입에서 이해랑, 이진순, 이원경 등 한 시절을 풍미했던 연출가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나한테 큰 소리를 못쳤어. 다른 선배 언니들한테는 호통을 쳐도, 나는 혼나 본 적이 없어. 사실 거기엔 다른 이유도 좀 있지. 내 남편이 그 선생님들하고 친구였거든.” 

 


국립극단에 입단하기 전, 그러니까 현대극장 단원이던 시절에 만났던 남편 나조화는 소설가 나도향의 동생이다. 배재고보에서 야구를 했고 니혼대 창작과에서 문학을 공부한 남자였다. 배우 백성희는 열아홉살이던 1944년에 열네살 연상인 그와 결혼했다. “연출가들이 배우한테 호통 치기 일쑤였던 시절, 후배들이 선배들 양말 빨아오던 시절”에도 공주의 자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덕택이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즐거워하던 낯빛이 2011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대목에 이르자 잠시 어두워졌다. 

 



“장민호씨와 초연했던 <3월의 눈>이 완전 매진됐잖아요. 못 본 관객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래서 곧바로 재공연을 준비했지. 바로 그 재공연을 준비하다가 쓰러졌어요. 연습장 가려고 옷을 차려입고 집을 막 나서려던 참에 꽝 하고 넘어갔지. 정신을 차려보니 전화벨 소리가 들렸어요. 간신히 전화기를 들었더니 국립극단 손진책 감독이더라구. ‘선생님 연습시간 됐는데 왜 안 나오세요?’ 하는 거야. 아주 잘 들려. 그래서 나도 자초지종을 설명했지. 내 느낌으로는 제대로 말을 한 거 같은데, 손 감독한테는 그냥 ‘어어어어’ 하는 소리만 들렸던 게야. 손 감독이 바로 병원에 연락해 구급차가 달려왔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장 선생 별세 소식도 손 감독이 알려줬지요? 

“그 얼마 전에 장민호씨가 누워 있던 병원에 다녀왔는데, 아휴, 이미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었어. 그이를 보는데 내가 손발이 벌벌 떨렸어요. 그이가 세상을 떠난 날도 손 감독한테 전화가 왔지. ‘운명하셨습니다’ 하더라고. ‘언제?’ ‘오늘 새벽에요.’ 난 그냥 멍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리워. 엊그제가 대보름이었잖아. TV에 연 날리는 모습이 나왔는데, 자꾸만 민호가 생각나는 거야. 대추나무에 걸려 있던 연이 하늘로 휘이 날아가는데, 그 연이 꼭 민호인 것만 같았어.” 

 

인터뷰는 그렇게 원로배우의 흐느낌으로 끝났다. 간신히 눈물을 추슬른 그에게 “배우로서의 마지막 꿈이 뭐냐?”고 묻자, “국립극단이 제대로 지어지는 것을 생전에 보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국립극단은 용산구 서계동의 옛 기무사 부지에 가건물 형태로 들어서 있다. 3월3일부터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되는 <3월의 눈>은 두 개의 캐스팅으로 진행된다. 화·목·토요일은 변희봉·박혜진, 수·금·일요일에는 변희봉·백성희가 출연할 예정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ㆍ연극인들, 병석의 ‘연극인생 73년’ 백성희 돌아보는 자리 마련

 

“나는 백성희 선생에게 한눈에 반했다. 선생은 당대의 비슷한 연배에서 따라갈 수 없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고, 동서양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배우였다.”(연출가 임영웅) “이성적이고 품위 있는 배우였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연기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그를 닮고 싶었다.”(배우 김금지) “그는 평범한 인물을 맡을 때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작은 역도 크게 만들었다. 그래서 작은 역을 경시했던 배우들에게 얼마나 아까운 역이었는가를 상기시켰다.”(연극학자 유민영)

1 1949년, 젊은 시절의 백성희. 2 1981년 출연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3 연극인생 50년 기념공연 ‘혼자 사는 세 여자’. 4 2011년 ‘3월의 눈’서 2012년 타계한 배우 장민호와 부부로 출연. 국립극단 제공
지난 22일 저녁, 서울 서계동의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 150여명의 연극인들이 한데 모였다. 80대의 원로들부터 20대의 신예들까지, ‘한국연극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백성희 선생(90)의 삶을 함께 돌아보는 자리였다. 올해로 연극인생 73년, 국립극단 배우로만 65년을 보낸 원로배우는 지금 노환 중이다. 서울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얼마 전부터는 시력과 청력이 급격히 떨어져 제대로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국립극단이 연극인 심포지엄 ‘국립극단 65년과 백성희’를 해가 가기 전에 마련한 이유다. 아울러 이 행사는 최근 간행된 회고록 <백성희의 삶과 연극-연극의 정석>의 출간기념회를 겸한 자리였다.

 

2년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자면, 선생은 1943년 현대극장의 <봉선화>로 데뷔했다. 물론 이에 대해선 연극학계의 이견도 있다. “1년 앞선 1942년 빅터가극단의 <심청>을 데뷔작으로 봐야 한다”(연극학자 김남석)는 의견이다. 하지만 선생은 “멋도 모르던 고등학교(동덕고녀) 시절에 출연한 것이라 공식 데뷔작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니, 그로부터 셈하더라도 73년을 연극배우로 살았다. 덕분에 한국 연극계에서 그와의 인연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날 심포지엄은 바로 그 기억을 꺼내놓는 자리였다. 병상의 선생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들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들 그렇게 ‘치열했던 배우, 따뜻하고 정갈했던 인간’을 기억했다.


사회를 맡은 배우 손숙은 “73년을 배우로 살아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운을 뗐다. 가장 최근 무대는 2013년 10~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바냐 아저씨>(이성렬 연출)로 기록돼 있지만,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선생은 무대에 설 몸과 마음을 지닌 국립극단의 ‘현역’이었다. 배우 손숙은 “세계를 통틀어도 이렇게 오래 무대를 지킨 배우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제가 젊었을 때, 지방공연을 가면 늘 선생님과 한방을 썼어요. 여배우들이 죄다 우리 방으로 몰려와 ‘섯다’를 치곤 했죠. 거의 밤을 새우며 놀았죠. 그런데도 선생님은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맨손 체조를 하셨습니다. 그 꼿꼿하고 당당한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1972년 국립극단에 입단했던 배우 박상규(상명대 교수)는 “인간적으로는 어머니 같았고, 배우로서는 멘토였다”고 회고했다. “1979년 <무녀도>에 함께 출연했습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배우이셨습니다. 낮에는 극단 연습실에서 연습하시고, 밤에는 창과 무당춤을 배우러 다니셨죠. 그야말로 프로였습니다.”


배우 김소희는 2004년 ‘백성희 연극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자전극 <길>에 함께 출연했던 인연을 떠올렸다. “딱 한번 같이 공연했지만, 무대의 두려움을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때 팔순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보다 더 꼿꼿한 척추, 부드러운 혀를 지니고 계셨어요. 끊임없이 훈련하지 않는 배우는 무대에 서면 안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셨지요. ”



배우 박정자는 자리에 나오지 못한 선생의 말을 대신 낭독했다. <백성희의 삶과 연극>(김남석 엮음)에도 수록돼 있는 그 육성의 한 대목은 이렇다.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젊은 남녀의 일몰이 같지 않다는 사실에,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연극에 대한 소회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나의 삶을 구성했다면, 나의 삶은 어쩌면 대단히 가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연극이 있었고, 그 연극은 내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게 만들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새로운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참으로 오랜 여행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연극계 ‘대모’ 백성희…천상의 무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