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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청력 잃고 더 빛난 예술

입력 : 2009-03-19 17:46:02수정 : 2009-03-19 18:35:27

베토벤은 26세 때부터 청력을 잃기 시작했다. 50세 무렵이 되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청력 상실은 2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행됐다. 하지만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1824~1884)는 경우가 달랐다. 그는 느닷없이 청력을 잃는다. 50세였던 1874년. 환청이 점점 심해지더니 그해 10월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됐다.

스메타나는 왜 갑자기 청력을 잃었을까.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는 것은 ‘매독설’이다. 독일의 내과의사 디터 케르너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죽음>(현암사)이라는 책에서 스메타나의 청력 상실을 “매독에서 비롯된 진행성 마비”로 설명한다. 그는 베토벤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다만 그것이 천천히 진행되거나 빨리 진행된 차이였다는 것. 케르너는 같은 책에서 슈베르트와 파가니니의 사인(死因)도 매독이었다고 설명한다.



매독 때문이었든 아니면 정신분열이나
우울증 때문이었든, 스메타나는 음악가로서의 연륜이 한창 무르익던 50세에 갑자기 외부의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된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 가극장의 지휘자직을 사임하고 칩거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그때부터 오로지 작곡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내면에서 울려오는 기억과 상상의 소리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걸작들은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다. 베토벤이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중기(中期) 이후에 ‘걸작의 숲’으로 들어섰듯, 스메타나도 청력을 잃고 난 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음악을 남겼다. 전부 여섯 곡으로 이뤄진 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과 현악4중주 1번 ‘내 인생으로부터’(From My Life)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두 곡의
성격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는 ‘조국에 대한 헌사’이고, 또 하나는 ‘개인적 심경고백’이다. 청력을 잃은 말년의 스메타나는 보헤미아의 민족주의를 웅대한 스케일의 관현악으로 묘사해 체코인들에게 바쳤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현악기 4대를 동원한 소박한 규모의 실내악으로 자신의 인생을 반추했다. 스메타나는 그렇게 귀먹은 상황에서도 ‘체코의 예술가’라는 공인으로서의 자각을 놓치지 않았으며, 동시에 굴곡 많았던 자신의 개인사를 음악적 자전으로 남길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에 시시각각 닥쳐오던 정신이상증세를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교향시 ‘나의 조국’은 1874년부터(1872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5년에 걸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벽 위에 지어진 성(城)을 묘사하는 첫곡 ‘비셰흐라트’를 쓸 때만 해도 아직 귀가 먹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두번째 곡 ‘몰다우강’을 쓸 무렵에는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스메타나가 묘사한 몰다우강은 압도적 음량(音量)으로 흘러간다. 체코 남부에서 발원해 북쪽을 향해 거칠게 흘러가는 물살, 숲에서 벌어지는 사냥 풍경, 농가의 흥겨운
결혼식, 관현악 총주가 강약의 대비를 급하게 오가는 급류, 그러다 마침내 넓은 강폭을 이루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눈에 보이듯 선연한 풍경이다. 계속해서 3곡 ‘샤르카’, 4곡 ‘보헤미아의 초원과 숲에서’, 5곡 ‘타보르’와 6곡 ‘블라니크’가 이어진다.

‘몰다우’는 독일어식
발음이다. 체코는 약 300년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지배층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스메타나가 한창 활약하던 19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체코어 사용자보다 독일어 사용자가 더 많았다. 이때 오페라를 통해 ‘모국어’의 부활을 꿈꿨던 작곡가가 바로 스메타나. 따라서 ‘몰다우’는 ‘블타바’라는 체코식 표현으로 부르는 것이 더 맞겠다. 음반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나의 조국’은 라파엘 쿠벨릭이 지휘한 연주들. 그는 보스턴심포니(71년),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84년), 체코필하모닉(90년) 등과 이 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바츨라프 노이만이 체코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75년)을 선호하는 애호가들도 적지 않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