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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노닐다

광폭한, 춘래불사춘의 음악

입력 : 2009-03-05 18:33:22수정 : 2009-03-05 18:33:24

“봄에 들을 만한 음악은 뭐가 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음악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처럼, 일조량과 기온의 변화는 사람의 감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계절에 따라 마음에 와닿는 음악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따사로운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곡은 아주 많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종달새’, 베토벤의 교향곡 ‘전원’의 1악장,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의 4악장 등등,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아예 곡명을 ‘봄’으로 내건 음악도 적지 않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이다. 하지만 베토벤 자신이 이 소나타를 ‘봄’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일단 열외로 치자. 다음으로 떠오르는 곡은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에 등장하는 ‘봄’이다. 물론 하이든도 ‘사계’라는 제목의 오라토리오를 썼고 차이코프스키도 같은 이름으로 모음곡을 남겼다. 그들의 ‘사계’에도 당연히 따뜻한 봄날이 등장한다. 이밖에 드뷔시가 색채감 있는 관현악으로 그려낸 ‘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우아하면서도 흥겨운 왈츠 ‘봄의 소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봄의 음악’이다.

하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이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도 없다. 기상대는 평년보다 봄이 9일쯤 일러질 것이라 예보했고 개구리들도 일주일이나 일찍 깨어나 짝짓기에 분주하지만, 이 또한 본질은 ‘지구 온난화’일 뿐이다. 지금 이 땅에서 봄을 제대로 느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럴 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마도 슈만의 ‘봄’일 것이다. 슈만이 남긴 4개의 교향곡 가운데 첫 번째 곡. 그의 나이 31세에
작곡했던 이 곡은 ‘봄’이라는 표제와 달리 어둡고 광폭하며, 심지어 추운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악상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말하자면 ‘춘래불사춘의 음악’인 셈이다. 어떤 이들은 “약동하는 봄 기운” 운운하며 표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하지만, 네 개의 악장을 반복해 들을수록 슈만의 강박과 우울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추운 봄’의 음악이다.

트럼펫과 호른의 팡파르로 시작하는 1악장. 처음부터 무겁고 느리다. ‘봄이 왔다’는 암시로는 왠지 부적절해 보이는 이
불안한 팡파르는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번 반복된다. 가끔 목관악기들, 특히 플루트가 앞으로 나서며 봄날의 새소리를 연상케 하는 악구를 연주하지만, 그 새들의 지저귐마저 이내 사그라지고 다시 어두운 팡파르가 커다랗게 고개를 쳐든다. 이어서 라르게토(Larghetto)로 느리게 흘러가는 2악장. 슈만의 ‘봄’에서 가장 로맨틱한 악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 로맨틱은 우아함이나 사랑스러움보다는 쓸쓸한 비애에 가깝다. 아타카(attacca)로 중단없이 이어지는 3악장 스케르초에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고, 마지막 4악장에서 햇살처럼 잘게 부서지는 음표가 잠시 고개를 내밀지만 이 역시 관현악 총주의 무거운 기세에 눌려 사라진다.

베토벤의 ‘광기’는 더 지독한 양상으로 낭만주의자 슈만에게 대물림됐던 것 아닐까. 안타깝게도 슈만은 ‘마음의 병’을 끝내 치유하지 못했다. 그는 44세에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가 지나가던 배에 간신히 구조됐지만, 46세에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고 만다. 그는 왜 죽어가면서 아내 클라라에게 “알겠어(Ich kennen)”라고 말했던 것일까? 그의 삶이 남겨놓은 마지막 수수께끼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봄’은 이른바 ‘필청반’. 하지만 이 연주는 색채가 밝다. 번스타인 스타일로 채색된 ‘봄’이다. 그 화사함이 거북하다면 조지 셸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녹음이 좋겠다. 슈만의 ‘봄’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산만함’을 극복하려는 지휘자 셸의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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